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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중심이 곧 신앙입니다 (삼상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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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중심이 곧 신앙입니다 (삼상 16:7)

동물학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개와 고양이는 절대로 서로 사이좋게 놀 수 없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들의 감정 표현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바짝 들고 흔듭니다. 

그런데 반대로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쫙 내리고 있다가 오히려 사나와지면 꼬리를 빠짝 쳐듭니다. 서로가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은 사이가 좋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이 두 동물이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감정이 담긴 바디 랭귀지를 이해해야합니다. 너는 개요 나는 고양이고, 나는 고양이고 너는 개다 고로 감정의 표현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수용하는 데서부터 같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인지 모르지만 요즘은 놀랍게도 개와 고양이가 같이 지내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드디어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세월의 변화에 따라 자기들만의 통일 된 표현방법을 개발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예로부터 개와 고양이의 사이는 친할 수 없는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람을 깊이 알아가는 데도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성이 문젭니다. 한 사람을 알아 가는데 겉모습만 가지고는 실수합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인격을 평가하고, 성품을 판단하고, 사람됨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보이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훨씬 더 풍부한 아름다움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 진실이 숨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그 사람의 됨됨이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성이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인간성은 그의 지식, 그의 경험, 그의 기술, 그의 재력, 이것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됨입니다. 사람 됨됨이가 기본입니다. 인간성이 잘못되었는데 재능이 무슨 소용입니까? 지식 또한 잘못된 인간성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정이든 학교이든 간에 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됨됨이는 안 가르치고 물질의 노예, 맹목적인 성공이나 명예의 노예만을 만들어 간다면 이건 문제입니다. 지식인 보다 인간성이 먼저요, 기술자 보다는 인격자가 먼저요, 부자보다는 인간 됨됨이를 먼저 가르쳐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보시고자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을 이루어갈 것입니까? 사람 됨됨이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거든요. 사람의 인격이란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완성 되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의 인간성이란 전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 사람의 됨됨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전 생애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곧 그 사람의 인격이요, 됨됨이가 됩니다. 우리가 생명이 있는 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살아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기본적인 감정이란 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음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인격을 좌우합니다. 

인생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혹은 절제하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즐거울 때는 그 즐거움에 빠져야합니다. 그게 본성입니다. 즐거운 일에 즐거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괜히 즐겁지 않았던 일을 그 자리에서 생각해내면서 그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됨에 기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한편으로는 기쁠 때에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얼마나 그 기쁜 감정을 자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사람됨에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무척이나 기쁘지만 기쁘지 않을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이 기쁜 마음을 억제할 줄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정말 중요한 것은 화가 났을 때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얼마나 그 감정을 잘 다스리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후유증을 생각하고 그 결과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 뛰어난 인간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이렇게 자기의 마음을 질 다스려서 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바로 이런 마음의 중심을 가진 사람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셨던 하나님이 그 일을 후회하시면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훗날 사도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을 전도하면서 이 장면을 설교하는 중에 다윗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전파했던 부분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사무엘 선지가 이새의 집을 찾아갑니다. 가서 아들들을 다 데려오라 합니다. 그때 아버지 이새는 굉장한 일에 신나하면서 아들들을 죽 떠올려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 아버지 이새의 생각 중에 다윗은 없습니다. 설사 아들 중에 왕이 될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윗, 저건 아니라고 아버지가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차례대로 일곱 아들이 사무엘 앞에 지나가면서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지 심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중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묻습니다. “아들이 이 것 뿐이냐?” 아버지 이새가 대답합니다. “하나 막내가 있긴 한데 걔는 아닙니다. 아예 자격이 없어서 그냥 양이나 치러 가라고 보냈는데요.” 그러자 사무엘 선지가 “불러오라.” 합니다. 그래서 막내아들을 불러와 놓고 보니 바로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 하나님이 찾으시던 다윗이었습니다. 

아마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이 왕으로 삼을 사람을 하나님이 너희 집에서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생각했던 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키는 어느 정도 되어야하고 생김새도 웬만큼은 되어야하지 않겠느냐는 등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대 왕으로 세움을 입었던 사울 왕이 키도 남보다 더 컸고 얼굴도 잘 생긴 사람이었거든요. 그와 비슷해야한다는 나름의 기준을 세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어리거니와 키도 적은 다윗은 생각에 조차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기야 사무엘 선지자도 그 기준을 착각 했으니 이새야 오죽하겠습니까? 6절에 보면 사울에 버금가는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과연 자격이 있다고 할 만큼 착각했습니다. 사무엘이 이렇게 착각한 것에는 역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에 그의 외모가 중시 되었던 점에 영향을 받은 때문입니다. 사울이 왕으로 발탁되는 장면을 보면 그렇습니다. 

삼상 10:23,24절입니다. “그들이 달려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그때도 그랬으니 오늘 사무엘이 착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사무엘마저도 착각하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전에 키도 크고 얼굴 잘 생긴 사람, 사울에게서 실패했거든요. 지나보니까 그거 필요 없더라는 겁니다. 중요한 건 속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중심이라고 했습니다만 이 중심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을 이릅니다. 마음이란 지적, 감성적. 의지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인격의 핵심을 말합니다. 즉, 다른 의미로 인간성이요, 사람 됨됨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다윗을 택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이 이미 다윗의 믿음과 신앙적 용기를 보셨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다윗의 겸손을 보셨습니다. 혼자서 들로 양을 치러 나가 종일토록 군말 없이 충성하는 모습 속에서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 해나가는 신앙을 미리 발견하셨습니다. 훗날 십여 년 동안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장인이 사위를 죽이려고, 왕이 신하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희대의 비극 중에 역전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도리어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앙이요, 그의 겸손이요, 하나님이 일찍이 보셨던 다윗의 중심, 곧 그의 인간성이자 사람 됨됨이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인간에게서 보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중심이라고 하십니다. 

<원격탐사>라는 기술이 있습니다. 가시광선, 적외선, 마이크로파를 이용해서 먼 곳에 있는 대상물에 접촉하지 않고도 정보를 수집하여 해석하고 거기 필요한 정보를 읽어 내는 기술입니다. 그런가하면<레이더>와 같은 별도의 파장 영역을 사용하여 지하의 사물이나 공중에서 인간의 눈으로 본 것과는 다른 실물의 정확한 실체를 밝히는 기술도 있습니다. 이 시대 못난 인간들의 기술로도 이 정도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내면세계를 통찰하시는 능력이야말로 얼마만큼 완벽할 것인가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중심을 환하게 살피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신앙의 모습이 있어야합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하나님께서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대로가 내 인격이요, 인간됨됨인지 모릅니다. 내면의 세계, 영적인 세계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전부를 훤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중심이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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