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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양을 치라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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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을 치라 (요 21:15-17)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7) 


베드로의 재신임

본문은 흔히 “베드로의 회복”, 혹은 “베드로의 위임식”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처럼, 세 번 사랑을 고백했기 때문이요,  또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공개적으로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실족했던 베드로를 다시 신임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베드로의 사도직에 대한 불변성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설계하시고 세우셨습니다.  주님은 이 교회를 사도들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사도직은 절대적입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이 뽑으신 사도였습니다.  교인들이 투표해서 세운 사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실수를 했든지 그의 사도직은 주님이 인정하시는 한 불변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점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부모의 자식이 된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듯이, 내가 어느 목자의 인도를 받게 된 것도 나의 선택은 아닙니다.  
  
둘째로, 어떤 사람을 세워도 결국은 베드로보다 나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결코 神이 아닙니다.  실수도 많고 결점도 많습니다.  성급합니다.  과격합니다.  피곤하면 기도처에서 잠에 빠집니다.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나섰다가 “사단아 물러가라!” 책망도 듣습니다.  십자가가 무서워서 멀찍이 도망쳤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그를 사도로 신임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간단합니다.  누구를 세워도 약점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마찬가집니다.  여전히 부족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가 완벽하리라는 기대를 갖지 말아야합니다.  오히려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사람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지도자 만나기를 원합니다.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것은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앙 지도자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삶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떤 지도자를 세우시고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과거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사도직을 통하여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에게 양을 맡기시면서 오직 한 가지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절)  
  
목자의 최대 조건은 사랑입니다.  요즘은 목자를 선택할 때에 많은 구비조건들을 봅니다.  얼마나 똑똑한가?  박사학위가 있는가?  지도력이 탁월한가?  경력이 얼마나 되는가?  여러분!  베드로가 대학원에 다닌 적 있습니까?  학위 받은 적 있어요?  

예수님 당시의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회당에서 지도자 노릇 한 적 없습니다.  랍비 교육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공인받은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식쟁이라는 사실입니다.(행4:13)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를 교회 지도자로 주저하지 않고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목자라고 양을 잘 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똑똑해도 사랑이 없으면 양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런 탄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 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34:2-5) 

예레미야도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렘23:1)  참된 목자는 유식하거나 유능하기에 앞서 사랑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질문에는 두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랑의 대상입니다.  주님은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절)고 물으셨습니다.  양을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목자가 사랑해야 될 첫 번째 대상은 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이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첫 번째 질문을 보면 “이들보다 더”(more than these)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 사람들보다 더”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어떤 사본에는 “이들보다 더”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란 말은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로는 우리 성경에 있듯이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뜻입니다.  
둘째로는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뜻입니다. 
셋째로는 “네가 이러한 것들(어부란 직업, 혹은 그 일들, 배나 魚具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뜻입니다.  

이 질문은 한마디로 사랑의 초점이 어디에 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참 목자는 그 사랑의 초점이 예수님께 가 있습니다.  양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양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의 목자는 자기 양을 돌보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양을 잠시 위임받은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양 자체에 애정을 가지기에 앞서서 양 떼를 맡기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주님에게 대한 애정 없이는 주님의 양을 중심에서 사랑하며 돌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는 양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양을 함부로 대합니다.  마음 내키면 기르고 싫으면 버립니다.  이익이 있으면 돌아보고, 이익이 없으면 팔아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양을 기르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양을 기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양이 좋아하는 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 결과는 파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목자가 참 목자입니다.  시대사조보다도, 양 무리의 기호보다도, 자신의 모든 조건보다도 먼저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목자가 참 목자입니다.  
  
둘째로, 사랑의 부족에 대한 자각입니다.  주님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질문은 비교급입니다.  베드로가 남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가를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일찍이 사랑의 자만심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막14:29)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자기의 사랑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자기의 사랑이 남들보다는 항상 크다고 느껴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새삼스럽게 이 사랑의 비교의식(比較意識)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사랑의 부족을 자각해야 됩니다.  내 사랑이 결코 남의 사랑보다 많지 못함을 아는 자만이 남을 더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아무리 남을 열렬히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은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일찍이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는 사랑의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해버렸습니다.  내 사랑은 항상 부족합니다.  저는 그것을 날마다 체험합니다.  나는 한 남편으로서 세상 모든 남편들보다 아내를 더 사랑한다고 자부했습니다.  나는 세상 모든 부모들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음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주는 자로서가 아니라, 받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내 사랑이 충분한지?  스스로 좋은 남편이요, 좋은 아내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부모요, 좋은 자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사랑은 제한이 없습니다.  사랑은 비교의식을 거부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13:4,5)
  
참 목자가 되려면 사랑의 비교의식이 없어야합니다.  남보다 내가 양을 더 사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그의 사랑은 이미 제한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사랑을 넓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랑의 부족을 느끼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의 부족을 자각하고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별 볼일 없는 분량인지 늘 느끼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남을 더욱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과 관련하여 옛날부터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아가페(ajgapavw)라는 말과, 필레오(filevw)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이 물으신 세 번의 질문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아가페로, 세 번째는 필레오로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 번 다 필레오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의 사용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해석하는 사람들과 별 의미를 두지 않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첫째로,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의미상 차이가 없다는 견해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신 아가페나, 베드로가 대답한 필레오나 다 같은 정도의 사랑을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아가페나 필레오를 구별하지 않고 같은 뜻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3:16에서는 아가페로 표현했고, 16:27에서는 필레오로 표현했습니다.  성부가 성자를 사랑한 것도 3:35에서는 아가페로, 5:20에서는 필레오로 표현했습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한다는 말도 13:34에서는 아가페로, 15:19에서는 필레오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물으신 사랑의 정도나, 베드로가 답변한 사랑의 정도는 같은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또 다른 증거는 “그러하외다!” 라고 하는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주님이 아가페로 물었는데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만일 아가페나 필레오가 다른 뜻이었다면 “그러하외다!” 라는 대답을 못했을 것이란 말입니다.   또 어떤 학자는 이 당시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나눈 실제적인 언어는 아람어였다는 사실을 내세웁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베드로는 같은 아람어로 사랑의 질의응답을 했는데, 후일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임의로 아가페와 필레오를 구별 없이 썼다는 뜻입니다.
  
이 해석을 따른다면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인정하고 물으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비록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는 했지만 베드로는 주님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실제로 겟세마네에서 주님을 붙잡으려는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기도 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느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단숨에 옷을 걸치고 물로 뛰어들어 주께로 온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이 정도의 사랑을 가진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누가 베드로처럼 모든 일을 버리고 사도로 따르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응답하겠습니까?  오늘 누가 감히 주의 말씀에 의지하며 바다 위를 걷겠습니까?  누가 베드로처럼 빈들에 따라다니며, 산상 기도를 하며, 사마리아로 베뢰아로 예루살렘으로 따라 다니겠습니까?  누가 겟세마네에 따라 가고, 말고의 귀를 베고, 멀찍이라도 십자가를 따라 가겠습니까?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아가페와 필레오의 의미를 구별하는 입장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언제나 필레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문은 다릅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아가페로 물으셨고, 세 번째는 필레오로 물으셨습니다.  트렌취 같은 학자들은 여기에 상당한 의미를 둡니다.  주님은 아가페로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코 아가페란 말을 사용치 못했습니다.  아가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흉내 내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결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매번 주께서 아신다는 말을 했습니다.  주님이 세 번째 질문을 하실 때에 베드로는 근심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eijdw')...주께서 아시나이다(ginwvskw)!”(17) 했습니다.  자기의 사랑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이 다 아시며, 베드로의 생애를 지켜보신 주님이 경험적으로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주님이 자꾸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니 베드로는 근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실 겁니다.  아무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주여 다 아시지 않습니까?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낙심할 것 없습니다.  역사는 바로 거기서부터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이 부족한 우리를 통하여 일을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의 분량이 얼마나 됐든지 좋습니다.  있는 그대로 고백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다음 단계의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

주님이 베드로에게 맡기신 일은 목양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내 양을 치라”(16)  
“내 양을 먹이라”(17)  

교회는 양떼를 돌보는 목장입니다.  오늘날 어떤 교인들은 교회 조직을 부정하고 교회 정치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 직분자를 임명하셨습니다.(고전12:28, 엡4:11-12, 행6:1-6 등.)  

하나님은 구약 창세기에 가정을 설립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시면서 남기신 최대 유산은 바로 교회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주님의 목장 주인은 목자장이신 주님이십니다.(벧전5:4)  거기에는 목자가 있고 양떼가 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 사도에게 명령하신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목양의 요점들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 목장에서 목자의 책무는 목양입니다.  주님의 명령 속에는 중요한 두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양을 먹이라(bovskw)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양을 치라는(poimaivnw)는 단어입니다.  양을 먹이고 치는 것이 목양입니다.  
  
우선 양을 치라는 말씀부터 생각해봅시다.  양을 친다(poimaivnw, shepherd)는 말은 양을 돌아본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을 사사로운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불가분리(不可分離)적인 공동체입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목회자의 직책을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주일에 예배 집례를 하고 설교를 하는 것이 전부인 줄로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사생활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목사는 직업적인 일에는 문외한입니다.  사업가도 아니요, 기술자도 아닙니다.  가정생활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건축 전문가도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는 모든 삶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목양입니다.  만일 목자가 양의 삶에 관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목양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의 삶에 관여하지 못하는 교회 역시 목장이 아닙니다.  양이 목자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 양은 목장 밖의 양입니다.  
  
목자가 양의 삶을 간섭한다는 것은 양의 모든 삶을 따라다니며 감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목자는 양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관찰하고 지도합니다.  목사는 인생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에 비춰서 성도들이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지 영적 진단은 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든지, 가정생활을 하든지, 사회생활을 하든지,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언제나 백성들의 신앙을 관찰하고, 경고하고, 책망하고, 바른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세상 삶의 전문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성경의 전문가요 영적 진단의 전문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느 때에든지 목사가 전하는 메시지를 소홀히 여기지 마세요.  그 판단을 중히 여기세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양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양을 돌보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양식을 먹이는 일입니다.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bovskw, feed)하셨습니다.  양에게 먹일 양식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목자는 매 순간 필요하고 적절한 말씀을 양들에게 먹여야 합니다.  또한, 양들은 그 말씀을 받아먹어야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양들에게 주식입니다.  먹어야만 생존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선한 목자는 언제나 양들을 위하여 좋은 꼴을 준비합니다.  그 좋은 꼴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8:3)  
  
목자는 말씀을 충실히 전달해야 하고, 양들은 말씀을 충실히 받아 먹어야 합니다.  이 상호 관계가 바로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마13:23)  

푸른 초장의 배부른 인생, 물가의 안식이 있는 인생, 평강의 인생이 어디서 옵니까?  바로 하나님 말씀의 양식에서 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둘째로, 목장 안에 있는 양의 다양성입니다.  주님은 “내 어린 양(ajrnivon, lambs)을 먹이라” 하셨고, 또한 “내 양(provbaton, sheep)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ajrnivon)이 있는가 하면 성장한 양(provbaton)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성숙하면 목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오늘날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독립선언을 합니다.  나는 목자가 필요 없어!  나는 신앙을 자립할 만큼 성숙했으니까!  교회 공동체 밖으로 나가서 나 홀로 신앙생활에 들어갑니다.  인간은 백년 묵어도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양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지는 못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모세를 따랐더니 다 목자가 필요 없어졌습니까?  경험 많고 말씀 많이 들었다고 다 목자가 됩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모세나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백성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목사를 세우셔서 성도를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목사 역시 주님께 종속된 양입니다.  다만 그 목사를 통해서 양들을 인도하시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주님 목장의 양들입니다.  목장 안에 머무는 것이 양들의 축복입니다.  언제까지나 목자의 음성을 귀히 여기며 따르는 양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신 목표는 하나님 나라 건설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면서 남기신 유산은 교회 설립입니다.  교회는 목자장 되신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 안에는 목자들이 있고, 양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목장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리에게 물려가지 않습니다.  시의 적절하게 양식을 공급 받습니다.  주님의 목장에서 주님이 주신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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