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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계명 (요 1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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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계명 (요 15:9-17)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국의 ‘런던 타임즈’가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상위에 뽑힌 네 사람은 유명 인사나 재산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 뜻밖에도 소박한 서민들이었습니다.
1위는 바닷가에서 멋진 모래성을 완성한 어린이, 2위는 아기를 목욕시킨 후 아기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어머니, 3위는 멋진 공예품을 완성하고 손을 터는 예술가, 4위는 죽어 가는 생명을 수술로 살려 낸 의사였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중에 재벌이나 귀족, 정치인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행복은 보람 있는 일을 성취한 사람에게 오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행복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역전을 노리고 로또복권이나 주택복권, 경마 등에 매달려 보지만 그것은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구경만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가족을 위해 사랑의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행복의 재료가 됩니다. 윗사람을 따뜻하게 섬기는 마음이나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마음이 행복의 재로가 됩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부모님을 찾아뵙거나 처가를 찾는 것도 행복을 저축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장래의 행복을 위해 씨를 뿌리지 않으면서 행복을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울러 행복한 사람들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사랑이 메마르지 않고 인정이 살아 있는 것은, 사회의 구석진 음지에서 행복의 꽃을 피우기 위해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커다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소박한 사람들이 따뜻한 삶,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인생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보람과 기쁨을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그 사랑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현대과학은 사랑을 만들어내는 신비의 물질이 두뇌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세로토닌’ ‘엔도르핀’ ‘도파민’ 같은 호르몬입니다. 그 중에서 세로토닌은 사랑과 평안을 처음 알려주는 전령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마치 펌프질을 할 때 처음 붓는 마중물과 같은 것입니다. 
행복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젠 타인을 향한 사랑의 펌프질을 계속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경험한 사람이 사랑과 선행을 게을리 하면 결국 마중물까지도 말라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의 행복도 사라지고 공허함과 우울증만 남게 됩니다. 타인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나와 이웃을 행복하게 만드는 최선의 비결인 셈입니다.
모 일간지에 재미있는 기사가 적혀 간단하게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뇌에는 기분과 관련된 세 가지 신경전달 물질이 나온다고 합니다. 바로 노르아드레날린, 도파민, 세로토닌입니다.

이중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은 분노를 느낄 때, 도파민은 흥분하거나 쾌감을 느낄 대 주로 분비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노르아드레날린은 충동 폭력을, 도파민은 강한 의존성 중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뇌가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폭주”할 때 통제하는 물질이 세로토닌입니다. 이 세로토닌은 혈액에서 분리한 활성물질이란 뜻입니다. 또한 “행복 물질” “공부 물질” “조절 물질” 이란 별칭이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생활에서 오는 무한 경쟁과 대립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현대인에게 행복감을 주고 학습 능력을 올려주는 또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뇌에서 세로토닌이 결핍되면 남성은 충동성, 여성은 우울증이 증가합니다.
그럼 우리 뇌에 없어서는 안 될 세로토닌을 증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눈물이 나도록 감동하라. 
삶에 대한 환희, 낭만, 보람 등 잔잔한 감동을 느껴라.
2. 일단 시작해 보는 거다. 
우리 뇌는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적극적 의지를 준다.
3. 아침 한 시간이 운명을 가른다.
성공한 정신노동자는 예외 없이 아침형 인간이다. 1시간만 일찍 일어나도 생활의 질이 달라진다. 4. 책과 함께 있으면 행운이 따라온다. 
잔잔한 뇌에 지적 자극과 쾌감이 가해지면 그 파장이 조용히 온 뇌로 번져 나간다. 그리고 수많은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5. ‘당사자 의식’을 가져라. 
창조성 함양은 주인의식에서 비롯된다. 이 집, 이 회사. 이 사회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강력한 인식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6. 함께 어울리되 혼자서도 행복하라.
이게 고독력이며, 모든 창조는 고독력이 만든다.
7. 물고기 한 마리에도 고래를 잡은 듯 기뻐하라. 
자존심도 계급도 따질 일이 없던 순수하고 평화롭던 시절, 동물 뇌의 변연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순간 세로토닌이 쏟아진다.

8. 웃자. 마음과 몸, 심신 회로는 양방향성이다.
힘든 일도, 돈들 일도 아닌 웃음 한 번에 내 운명이 밝아진다.
9. 감사가 가장 강력한 치유제다 하루 한 가지 감사할 테마를 정해보자.
꽃, 하늘, 물 등등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다보면 당신의 뇌 속은 밝고 긍정적인 무드로 넘쳐난다.
10.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라. 
감정은 이성에 의해 억압받는 단순하고 원시적인 충동이 아니라 창조적인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이 들어도 늙지 않는 비결은 뇌의 청춘을 유지하는 것이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악인 엄홍길은 얼음절벽 로체샤르를 등반해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산을 생각할 때마다 두렵고 떨린다고 합니다. 엄홍길은 지난 2003년 로체샤르 2차 도전을 하다 눈사태로 숨진 박주훈, 황선덕 두 동료의 사진을 배낭에 넣고 등반해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일까요, 아니 두 동료에 대한 무언의 죄책감일까요? 그는 가슴에 묻은 두 동료를 생각하며 절대고도,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영국 최고의 산악인 조지 말로니는 “왜 산을 오르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산악인 엄홍길도 “내가 산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산이 나를 허락한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은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서만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오르다보면 어느새 구름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느낍니다. 그 가슴 뭉클한 감격과 희열은 산을 올라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굳이 정상만을 고집하지 않고 뒤쳐져 있는 동료가 있으면 기다려주고, 부축해 주면서 함께 산을 오릅니다. 우리는 산에 오르는 동안 동료의 땀 냄새와 거친 호흡, 고난과 환희의 순간들 속에서 하나의 실타래로 묶여 진한 동료애를 느낍니다. 그 안에서 진정한 산행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는 목표 중심적이거나 목적지에 먼저 도달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 세계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거나, 그 분의 존재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목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동행하며 올곧게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세상의 최정상에 우뚝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 생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서로 정상만을 차지하기 위해 기득권, 헤게모니만을 주장하며 다투고 분열하면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도중하차를 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모두 먼저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고 기다려주며 함께 더불어 가는 성숙한 신앙을 가집시다. 그럴 때 모두가 함께 정상에 서서 영광을 누리는 공동체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의 낮고 천한 자리에 오실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보세요. 우리 주위에 보면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라고 하면서 쉽게 업신여기지만 사실 알고 보면 결코 우리가 그들을 업신여겨도 좋을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너무 가난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의 나라에서는 먹고 살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코리아 드림 한국의 꿈을 안고 이 땅을 찾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아주학력이 높은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소위 무식쟁이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한 때 너무도 먹고 살기가 힘든 시절 독일에 광부로 그리고 간호사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중동 그 무더운 사막에서 건설현자의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처음 그들이 얼마나 무시를 당하고 얼마나 힘들게 살았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내준 달러를 가지고 힘겹게 오늘 이만큼 우리가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무식쟁이가 광부로 건설 노동자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로서는 꽤 앞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아주 노랗게 생긴 형편없는 그런 사람들로만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시를 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이제는 거꾸로 우리가 우리나라에 온 이주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기 싫다고 모두가 외면하는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그 일을 위해 그들이 이 나라에 와서 땀을 흘리고 있단 말입니다. 다문화 가정도 그래서 생기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결혼하려고 하지를 않아요. 없는 사람이라고 또는 힘든 일을 하는 농사꾼이라고 해서 누구도 거들떠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 생각다 못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배우자로 택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을 누구라서 손가락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그들 마음대로 된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들이 피부색이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그들의 용모가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들이 무시당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존귀함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길을 우리 예수님이 걸으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내려놓고 이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시를 했습니다. 아니 핍박을 했습니다. 외면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악 가운데서 건지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만 하는데 그런데도 예수님은 바보처럼 밤낮 우리들에게 이용만 당하시고 우리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신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힘들고 어려우면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했는데 정말 감사하십니까?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원망하고 시비하며 기도하고 있지 않나요?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몸부림을 치며 따지고 들고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이냐고 하며 울부짖고 있지를 않습니까? 

만약 그런 소리를 우리가 들었다면 어떻게 할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런 소리를 듣자마자 우리들은 씩씩거릴 것입니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들으려고 그들을 사랑했던가? 내가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주었건만 해도 너무한다고 하지를 않았겠냐고요. 그런데도 주님은 정말 바보처럼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런 온갖 투정에 불평에 시비를 하는데도 계속해서 삐딱하게 곁길로만 나가고 있는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의 손을 잡아 주시고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며 우리를 다독거려 주십니다. 나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만 해드리고 있는데 주님은 그런 나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단다.”
“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단다.” 
“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 손길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그 손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손입니다. 사랑의 손입니다. 피 묻은 오른 손으로 주님은 우리를 잡아주시고자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셨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손을 잡으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손을 잡기만 하면 아니 내가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기만 하면 주님은 내 손을 꼭 잡아 주십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을 흘려주십니다. 내 마음 안에 사랑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왜 주님은 나를 외면하시냐고 하지 마세요. 

주님이 나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딴 데로 눈길을 돌렸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내민 손을 한 번도 거두어들인 적이 없으십니다. 이 시간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그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까? 
“내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거야.”
그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이런 말씀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제 우리 모두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심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쌍둥이의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쌍둥이 중 한 아이가 심장에 큰 결함을 안고 태어났는데,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 아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 아기는 병세가 계속 악화되어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쌍둥이를 하나의 인큐베이터에 함께 넣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병원의 방침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담당 의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엄마 자궁에서처럼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나란히 눕히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쌍둥이는 한 인큐베이터 안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가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았습니다.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체온이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은 조금씩 나아졌고, 현재 두 아이는 완전히 정상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 우리의 포옹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사랑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두 가지 노력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일하고 배우며,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이 두 가지를 위할 때 그 사람은 한없이 높아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겸손과 희망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자신을 알아 갈수록 겸손해지고 한편으로 자신이 소중해지기 때문입니다.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과 지혜의 지름길입니다. 남을 이해할수록 사랑이 많아지고 지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이 두 가지의 노력을 계속하는 삶이 아닐까요?
자식을 볼 때 아버지는 ‘내 자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핏덩어리’라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아프면 어머니도 아픈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가 자식 대하듯 하는 사랑을 ‘컴패션(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성경의 히브리어 개념으로는 어머니 자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긍휼’ ‘불쌍히 여김’ ‘자비’로 번역됩니다.

컴패션은 높은 위치의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자식을 아끼듯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컴패션의 가슴으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추방하시고, 가르치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웃을 건성으로 사랑하지 말고 우리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까?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한 노인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노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일생 동안 사귀어 왔던 훌륭한 친구들이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영어에서 친구(Friend)라는 단어는 자유(Freedom)라는 단어와 어원을 같이 합니다. 진실한 친구 관계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편안함과 휴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으며, 생애의 여러 가지 기쁨과 슬픈 일들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서로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윌리엄 글래스턴에 대해,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때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라고 말했고, 벤자민 디스렐리에 대해서는, “그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것처럼 느끼게 해줍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진실하고 소중한 친구를 두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대방에게 먼저 그런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큰 가족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을 사귀고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 쉬운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잘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중에 한 가족처럼 평안함이 느껴져서 알고 보니 우리와 그 사람 모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진실한 친구입니다.
우리의 참된 친구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도록 도와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먼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감히 함께 할 수조차 없는 존재였습니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사망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 친히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친히 친구라 불러주십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그런 친구로 삼아주시고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바로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머리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이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마음에 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람을 내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듯이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먼저 생각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랑은 먼저 베풀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나를 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주고 내 삶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까지도 줄 수 있다고 할 때 내가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 목숨보다도 귀한 친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 친구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나를 위해 목숨까지 주신 분이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건 주고 또 주시는 사랑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나를 이렇게 그냥 내버려 주시냐고 하십니까?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그냥 내버려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항상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지켜주셨습니다. 나와 함께 아파하셨고 나와 함께 우셨고 나와 함께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내게 강요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계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안타까운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냥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고 계셨단 말입니다. 내가 손을 보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아십니까? 그냥 손을 내밀어 나를 덥석 잡으시면 됐을 거 아니냐고 하겠습니까? 그랬다면 나는 그 손길을 뿌리쳤을 것입니다. 이게 아니라고 오히려 더 악에 받혀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서도 주님은 오히려 목숨을 주셨습니다. 거기에 대고 무슨 사랑이 그러냐고 하겠습니까? 마지막 죽음의 자리까지 지켜보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기까지 모른 척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자리엔 주님이 대신 나가셨단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를 향해 내민 주님의 손에 그 못 박힌 자국이 보이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그 사랑의 흔적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까?

자식은 말합니다. 무슨 부모가 그러냐고요? 부모가 돼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요? 그런데 언제 그걸 압니까? 자기가 자식을 낳아보면 압니다. 자기가 자식을 키워 보면 압니다. 
며칠 전 정말 안타까운 소식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다섯 살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정신박약아입니다. 그 아이를 키우느라고 얼마나 힘들었겠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차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가다가 아이가 안전벨트를 풀고 마구 엄마에게 안겨드는 바람에 그만 핸들을 놓쳐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아이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습니다. 오죽 하면 그랬겠나 싶습니다. 엄마조차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신이 그 순간 나가버린 것입니다. 쉬운 말로 그 순간 미쳐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우리를 그냥 버려두신 적이 없습니다. 왜요?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니 친구 아이가!” 그것도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은 친구란 말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오늘을 맛깔스럽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이유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무엇을 구하든지라고 했습니다. 여기 우리가 구해야 할 무엇이 뭡니까? 아무거라도 다 그런 뜻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그것은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 우리를 통해서 맺혀야 할 열매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을 그러나 우리가 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도록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삶에 합당하도록 살아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바로 사랑의 열매를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도 바로 이 사랑의 열매를 위해서입이다. 이 열매가 없다면 그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고 맙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친구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이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요 열매가 항상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제하고 열매를 맺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더하여 주시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제하여 주시고 사랑을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로 내게 채워주시도록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건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속상한 것은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세상에 속상한 일이 어디 하나 둘입니까? 그런데 정말 친구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속상한 것조차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숨까지도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주는 것과 속상한 일을 견디는 것 어느 것이 더 어렵습니까? 목숨을 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도록 한다고 하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나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여기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 역시 그 기준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먼저 베푸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주고 또 주며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자기 사람을 한 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으신 사랑입니다. 끝까지 붙들어주시며 기다리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돌아와 친구의 자리를 지키도록 이끌어주신 사랑입니다. 

그 주님의 손길이 지금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손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돌아보십시오. 나는 누군가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게 맺어지는 사랑의 열매가 어떤 열매겠습니까? 반쪽짜리 열매 일그러진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좋은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돌아가십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존 엘리스라는 사람의 “어느 아버지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이들이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크고 좋은 집이 아이들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건 사랑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돈으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그 때문에 아이들은 사람보다 물건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를 들면 아이들이 강해져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저는 아이들을 훈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지 않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에게 간섭을 하지 않으면 독자적인 사람들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장남이 동생들의 아버지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가정의 모든 문제들을 가볍게 넘기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가정처럼 보이게 하면 존경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거짓말을 하며 비밀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돈을 벌고 가정을 유지하고 가족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에서야 제가 깨달은 것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진정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저 추측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이 기도문을 잘 읽으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제 눈물로 많은 글자가 번지고 말았군요.

이런 안타까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참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필요한 은혜와 능력을 더하여 달라고 우리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허락하시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천국을 경험하며 이루며 날마다 살아가심으로 날마다 행복한 나날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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