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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고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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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고전 5:1-8) 

지난 번 대통령을 모시고 방미한 청와대 대변인이 미국 대사관의 인턴에게 가한 추악한 행위에 온 국민이 분노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모시고 외교적인 첨예한 사안을 다루는 그 중요한 시기에 고위 공직자가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고 벌인 추태는 세계적인 토픽감이었습니다. 

국가의 입이나 다름이 없는 대변인의 스캔들을 접하고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지도급 인사들의 도덕성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씁한 마음을 감출길이 없었습니다.

불괴옥루(不愧屋漏)라는 말이 있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사는 것이 진정한 군자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퇴계 선생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성리학자인 장횡거의 서명을 강의하는 대목에서 불괴옥루(不愧屋漏)란 의미를 거듭 새기고 있습니다.

서명(西銘)이란 자신의 자리 서쪽에 써서 붙여 두는 글이라는 뜻인데, 집이 주로 남향이니 서쪽은 자신이 앉는 자리의 오른쪽입니다. 요즘 말하는 좌우명(座右銘)이 바로 서명입니다. 

장횡거는 서명을 ‘불괴옥루’라 삼았습니다. 이는 ‘남들이 안 보는 은밀한 곳에서 행동을 조심하여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옥루란 방 안 서북쪽 구석의 햇빛이 가장 먼저 새어드는 곳입니다. 퇴계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동남쪽으로 보통 출입을 하니 서북쪽은 은밀한 곳이고, 그 서북쪽에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곳에서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퇴계 선생은 이 내용을 왕에게 강의하면서 왕도정치의 시작은 떳떳한 지도자의 자세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참으로 행동 하나, 말 한마디 조심하지 않으면 지도자의 자격조차 얻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또한 불괴옥루란 말을 되새겨 ‘코람데오’ 신앙으로, 즉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교회 또한 도덕성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이렇게 도덕성이 말이 아닌 것은 고린도시의 타락이 모르는 사이에 고린도 교회까지 침투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시에는 신전이 많아 그 결과로 우상숭배가 극심했습니다. 각종 신을 섬기는 신전들이 즐비하였습니다. 

그 중 고린도 광장 남쪽에 있는 아크로고린도 언덕(해발 5650m 높이의 암반)에서 고린도시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진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유명했습니다.

그 신전에는 약 천여 명의 여사제가 있어서 신전예식 때마다 각종 음란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음란하고 방탕한 것을 가리켜 ‘고린도인처럼 되다’고 표현하였고, 또 방탕한 사람을 가리켜 ‘고린도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로 이런 타락한 도시의 중심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세속적인 물결이 교회내에까지 파고 들어온 것입니다.

수 많은 타락 중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꾸짖은 것이 바로 ‘음행’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를 취한, 즉 근친상간한 교인이 있었습니다.
아직 어린 고린도교회일망정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사람이 버젓이 교회에 나와 활동하고 있었으니, 정말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준다는 말씀을 오해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자유를 얻었으니 이제부터는 어떤 행위를 해도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유를 방종으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유를 신앙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은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바로 책임,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영적인 책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책임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행한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이미 용서받았으니 무슨 짓을 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도덕폐지론자이며, 신앙에는 ‘성화’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화의 중요성을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제가 알고 있는 한 집사님이 서울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시골에 처음으로 주택을 샀습니다. 그래서 집을 산 직후에는 리모델링을 하느라 좋아하는 운동도 한 참 못하였습니다. 
요즘 그 집사님은 잔디 관리하느라 힘들어 하십니다. 주 중에는 저에게 잔디관리를 아예 사설업체에게 맡겨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잡초들이 계속 나오는데 뽑아도 또 나오고, 여러 약을 바꿔 써서 줘봐도 효과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잔디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다른 분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은 잔디관리를 사설업체에 맡겨도 결과는 같을 거라고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잔디관리는 여러 해를 걸쳐서 꾸준히 해야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잔디관리의 비법은 잡초 뽑기와 약주기를 계속해서 부지런히 하는 것이며 이것 외에는 다른 왕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몇 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잔디가 촘촘해지고, 왕성하고, 우세해져서 잡초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지 못하는 환경이 조성되고 잔디들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잔디관리를 하는 것이, 신앙생활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의 삶에는 잡초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생의 잡초는 쉽게 없어지질 않습니다. 

신앙의 잡초를 근절하는 길은, 꾸준히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3절에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라 말씀하십니다. 

꾸준히 죄악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성도들의 삶에서 잡초들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잔디들이 가득한 삶의 정원을 가꾸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음행한 고린도교인들은 이 성화의 단계를 몰랐습니다. 음행을 하고서도 그것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믿었으니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만 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행함이 없는 이러한 믿음을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음행은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음행한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 쫒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로마의 정치가요 철학자인 키케로는 근친상간이라는 부도덕한 일을 가리켜 “이런 패역한 사건은 일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다”고까지 말하며 한탄했습니다.
세상의 학자도 이러한데 하물며 고린도교회를 세운 바울은 얼마나 고린도교인들의 음행을 안타까워했을까요?

그런 더러운 행위를 한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쫒으라고 명령하면서 얼마나 바울의 마음은 아팠겠습니까?
바울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잘 알았습니다. 또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받으셨듯이 온갖 해산의 수고를 통해 얻은 고린도교인들을 교회에서 쫒아내라고 한 사도 바을의 마음은 마치 수족을 잃은 듯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 부도덕한 자를 교회에서 내친 것은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5절).

사도 바울은 그 부도덕한 자를 육신적으로 벌하여 부패한 심령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주님이 재림 하시는 날에 주님 앞에서 구원을 얻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 부도덕한 자를 출교시킨 것은 주님 앞에서 최후에는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형편은 정말 타락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부도덕함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각종 매스컴은 사회를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락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영화감독 모씨가 자신의 동성애를 커밍아웃하면서 자신의 남자친구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동성끼리 결혼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라고 하신 가정은 신성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성끼리 결혼을 하면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겠습니까? 동성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습니다. 성이 서로 다른 이성이라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성끼리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아 번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가정을 아름답게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또 본문에서는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7절)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이란 죄와 타락과 부패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작은 양으로도 반죽 전체를 크게 부풀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죄 역시 그것이 아무리 적은 양일지라도 공동체 전체를 순식간에 범죄케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또한 죄라는 누룩은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그 삶을 악에 빠지게 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소한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겨 선악과를 따먹어 인류가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적은 누룩이 밀가루 반죽 덩어리 전체를 부풀게 하듯이 사소한 죄된 생각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타락한 자로 만들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진격을 명령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의 모든 것에 손대지 말하고 하셨습니다(수6:16-18).

여리고성 싸움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치른 첫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전쟁의 모든 전리품을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리고성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첫 열매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은 여리고 성의 물건 몇 개, 즉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수7:21)를 자신의 장막 흙 속에 숨겼습니다. 

아간은 이스라엘의 장자가 된 훌륭한 유다지파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아들들도 있었고 딸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과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주의 종 여호수아의 말을 그냥 만용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어찌하여 그런 비합리적인 명령을 내리느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귀한 것을 어째서 불태우느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간의 자식들도 같이 처단했는데, 아마 아간의 자식들도 그 물건을 훔칠 때에 함께 참여하였거나 아니면 그것을 모른체 했을 것입니다.

한 집안이 같이 범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론과 합리성으로 죄를 범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조금도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불신앙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묵은 누룩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묵은 누룩을 제거하려면 ‘순전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8절). 여기서 ‘순전함’이란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진실함’이란 ‘부정한 어떤 것으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죄성까지 제거된 순전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에 대한 무감각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무감각, 죄의 불감증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주님이 재림하실 때 순결한 신부 같이 주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묵은 누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묵은 누룩을 철저한 회개로서 제거하고 우리의 마음을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채워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 하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전병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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