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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발치에 앉아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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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발치에 앉아 (눅 10:38-42)

예수님께서 지금 집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급히 방안을 쓸고 닦고 화장실을 청소할 것이요, 어떤 분은 빨리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것이요, 어떤 분은 잘 보이려고 화장을 할 것이요, 

어떤 분은 성경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겁니다. 사람들마다 하는 행동은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신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뛴다는 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주님의 심방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나요? 주님이 내 집에 오시는 것이 기쁩니까? 아니면 평소 한 행동 때문에 오시는 것이 부담스러우십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 제자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 하는 주제로 누가복음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바로 앞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말로만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돕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감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본문 다음에 있는 스토리에서는 제자들은 기도의 대상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소망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주님을 섬기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교제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심방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가는 도중에 예루살렘 변두리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가 사는 집에 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서자 마르다가 반가이 맞이합니다. 마르다는 오랜만에 들르신 예수님께 맛있는 저녁상을 대접하려고 부엌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집에 있는 재료를 총동원하여 씻고, 썰고, 지지고, 볶고, 끓이면서 정신없이 바빴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음식 준비 과정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향유 옥합을 깨뜨립니다. 거기서도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준비합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일하기를 좋아했던 여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에 의하면 마르다는 일만 잘하는 여인이 아니라 신앙적인 통찰력도 있었고 믿음도 좋았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과 주고받는 대화 내용을 보면 마르다는 부활 신앙이 있었고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던, 그리고 성경 지식과 믿음 면에서도 잘 준비된 여인이기도 했었습니다. 


불청객의 방문

마르다가 주님만을 생각하며 한창 음식을 준비하는데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하다고 누가는 적고 있습니다. “분주하다”는 표현은 마음이 나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많은 음식을 제 시간 안에 준비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생깁니다. 자기는 부엌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동생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납니다. 그런 마리아를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 같아 주님 또한 원망스럽습니다. 콧노래로 시작한 음식준비가 갑자기 짜증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신 방안에 들어갑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씩씩 대고 나타난 마르다를 주목했을 것입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말을 하는 마르다의 표정이 어떻겠습니까? 인상도 찡그리고 얼굴도 붉으락푸르락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시간, 은혜의 자리에서 흥분을 합니다.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자기를 부엌에 홀로 팽개친 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자기 생각에 동조할 것을 기대하며 던지는 질문입니다. 마르다가 불평을 할 뿐 아니라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예수님에게 지시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예수님에게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반응 

1) 마르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십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마르다가 준비하는 것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섬기는 과정 가운데 예수님께 초점이 온전히 맞추어져 하는 자세가 흐트러졌다고 하십니다. 
 

2) 마리아를 향하여

복음서에 보면 마리아가 세 번 언급됩니다. 요 11:32,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면서 오빠인 나사로를 잃은 안타까움을 주님께 고합니다. 

요 12:3 다시 살아난 오빠를 인하여 잔치를 베풀 때 언니 마르다는 음식준비를 하고, 마리아는 예수의 발밑에 와서 비싼 향유를 그의 발을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으며 최상의 헌신의 모습을 보입니다. 39절에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세 구절에 나타난 마리아의 공통된 부분은 예수님의 발 앞에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서 자기의 슬픔을 주님께 고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온전히 섬기고,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배우는 것을 예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발치에 앉아”라는 표현은 학생이 랍비에게 말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배우기 위해서 취하는 자세입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여자는 발치에 앉아 말씀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여자에게 말씀을 가르쳐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었는데, 예수님은 사회적인 제약을 깨뜨리시고 마리아가 말씀 듣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주의 깊게 들으며 주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좋은 편을 택하였기에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1) 주어진 상황에서 우선순위를 알았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저 밥 한 끼 들기 위하여 마르다의 집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천국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마르다의 집에서 모인 무리들에게 열심히 가르치십니다. 제대로 손님을 대접하려면 손님이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자기의 입장에서 주님을 이해하고 자기 식으로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가 전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덜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쓰고 도리어 분을 내다가 마르다는 이미 받은 은혜마저 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르다가 주님 섬기는 일에 열심인 것을 비난할 수는 없으나 초조해지다보니 마리아를 신랄하게 비난한 것은 책망 받을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 마르다가 주님조차 가르치려 한 것은 더욱 책망 받아 마땅합니다. 마르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혹시 우리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각자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보겠다는 것보다 주님과 더불어 무엇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관심을 주님으로부터 멀리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데에 신경을 쓰면서 가진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지는 않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어 우리 삶에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2) 섬김의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과 더불어 생명의 말씀으로 풍성한 교제를 나눕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가 하시는 사역을 보며 마르다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1-2에도 보면 마르다가 식사준비를 합니다. 죽었던 자기 오빠가 살아난 것을 인하여 잔치를 준비합니다. 예수님, 열두 제자, 자기 가족 적어도 열다섯 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는데 한마디 불평이 없었습니다. 수고가 수고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기쁨이 없습니다. 마르다가 나 혼자 “일하게” 할 때 사용된 diakoneo라는 단어에서 명사 deacon이 나왔습니다. 집사는 사도들을 도와 봉사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에베소서 4:12를 보면, 목회자의 임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diakonia)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엌일 하는데 봉사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만 하는 것이 봉사가 아닙니다. 가정, 직장, 학교 어느 삶의 현장이든 주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봉사에 해당합니다. 

봉사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러면 날마다 개인적으로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의 일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마음에 기쁨이 없고 도리어 씁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한다면서 불평하고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다면서 원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바로 알고 섬기지 못할 때, 주님과 교제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제대로 채워지지 못할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며 일은 하지만 기쁨이 없고 분주하지만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마르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각자의 믿음을 점검하고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고치려할 때 다른 사람의 허물은 덜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감격하며 계속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환경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위에 계신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채우며 섬기는 기쁨을 되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1) 섬기는 동기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께 맛있는 음식을 해 드림으로써 얼마든지 섬길 수 있었고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배울 수 있게 해주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 최선의 음식을 만들어서 주님께 드리고 마리아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주어야지”하며 땀을 흘렸다면 주님을 비롯한 모두 기뻐하며 식사를 하였을 겁니다. 

사탄은 많은 경우 목적은 양보하지만 동기를 불순하게 만들기도 하고 동기를 양보할 때는 목적을 이루어가는 우리의 자세를 망가뜨리고 술수를 쓰기도 합니다. 사탄은 교회에 가지 말라고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을지라도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설교자에 대한 섭섭한 생각을 갖게 하여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그 가사가 우리 마음을 담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합니다. 무슨 찬송을 4절까지 불러. 경배팀은 잘 알지도 못하는 곡을 선택했어 등등. 형제자매들을 열심히 섬기도록 하되,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많이 받겠다는 식으로 어떤 동기를 가지고 섬기게 만듭니다. ‘나보다 잘 섬기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 하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목사가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 목사 설교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준비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대가가 있어야만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숨은 동기를 아십니다.  

남을 섬기고 싶은 그 마음이 주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입니다. 주님은 음식이 맛이 없다고 투정하시고 일하는 능력이 좀 떨어진다고 결코 탓하실 분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말씀을 배우지 않고 부엌에 간데 있지 않습니다. 섬김의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문을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항상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만 배우고 섬김이 없으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누군가는 주님을 위해 부엌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본문은 열심히 일하는 마르다와 말씀을 사모하는 마리아를 비교 평가하지 않습니다. 마르다의 열성적인 봉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가 언니를 도와주지 않은 것을 두둔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과 봉사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예배, 교육, 선교, 봉사, 친교는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요한 부분. 예배드릴 때가 있고 섬길 때가 있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의 수고와 봉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고하고 봉사하는 열정적 섬김이 자칫 주님에 대한 관심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수고나 헌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하고 그 관계를 가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은 퍼모먼스나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지만 주님은 그 동기와 목적을 기준으로 섬김을 평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정확하게 아십니다. 우리의 헌신과 그 동기를 다 아십니다. 
 

2) 주님 발치에 앉아 배워야 합니다.

마르다는 단지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동기는 좋았지만 엉뚱한 것에 정신을 팔았기에 놓쳐서는 안 될 기회를 놓쳤습니다. 각자 자기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각이 자꾸 주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까? 애초에 우리 속에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였으며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자 했으며, 세상을 향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우리였습니다. 우리의 상식, 우리의 판단력,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자세에 문제가 있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척은 할 수 있지만 실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부족한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면 주님 발치에 앉아 배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아름답지 못한 것을 하나씩 제거하고 주님의 마음과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속을 채워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도 마르다의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언제나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찬송가 507장의 가사와 같이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내 영혼을 감싸고 들어와 내 영혼을 바로 세워 주시고 신선한 충격으로 빚어 가시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마르다가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처럼 오신 분이 전하는 하늘양식보다 자신이 마련할 음식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다 보니,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오히려 그 저녁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인생, 제한된 시간을 가장 값지게 활용하는 최선의 전략은 주님의 발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 어떤 일도 주님 말씀을 듣는 일보다 우선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너무 많은 봉사와 사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십니다. 너무 바빠 말씀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3) 다른 사람도 배려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바쁘게 일하던 마르다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예수님께 가서 마리아를 명하여 자신을 돕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하겠다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헌신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비록 예수님은 마리아의 선택이 더 좋은 것이라고 하셨지만, 마르다의 헌신도 또한 필요합니다. 마르다가 책망 받은 이유는 마리아의 헌신까지 자신의 뜻대로 주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접대가 중요한 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리아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와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르다고 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 참견하면서 다른 사람도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각자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며, 자기중심적으로 공동체를 움직이려 하다가 자칫하면 공동체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기울여서 투자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분주한 인생길에서 과연 보다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어린 양의 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셨으니 이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항상 교회에 와서 살라는 것이 아니요, 전부 신학교에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원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으며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일할 때가 있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주님을 찾을 때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발아래 앉아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가운데 주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바른 선택을 하게 하시고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하게 하십니다. 

교회 창립주일을 맞이하며 나와 내 가정과 사업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본 받아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고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나아가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에녹과 같이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과 같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어 하늘에 신령한 복과 이 땅에 기름진 복을 풍성히 누리고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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