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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날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 (벧전 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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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 (벧전 2:9-12)


세계는 지금 기독교의 신앙과 갈수록 갈등을 빚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어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점점 이상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선진국이라고 하던 전통적인 기독교국가들일수록 더 앞장서서 반기독교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동성애에 대한 입장의 변화입니다.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어긋나는 일인 동성애를 용납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수년 전부터 벌써 목사가 예배 중에 동성애를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설교했다고 고소를 당하는가 하면 그 때문에 그의 소속 교단으로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만난 어느 재미 신학교수로부터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미국의 어느 좋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교수로 봉직하는 한국인 목사님이 학장에게 불려가서 추궁을 당했는데 그 내용은 그 교수의 연구실에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교수들의 연구실에는 다 칠색 깃발을 내걸었는데 왜 혼자 안 달고 있느냐, 차별주의자냐 하는 추궁이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두루 신망이 있었기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서 연봉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영국의 다른 학교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일찍이 성교육을 실시하는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의 한 교사는 동성애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는데 성교육을 하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동성애자들이 하는 성행위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들을 차별했다고 고소를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세상이 이 모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차별을 못하도록 법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가 기독교계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고는 일단 철회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 시도는 언젠가 또 있을 것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 가서 무엇을 강제로 배우고 올지 모릅니다. 

이렇게 장래가 암울한 세상을 바라보며 답답하던 마음에 큰 위로를 얻게 된 지난 두 주간이었습니다. 지지난 주에는 인도 뱅갈로어(Bangalore)에서, 지난 주에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였습니다. 인도 뱅갈로어에서는 세계 <로잔 운동>(The Lausanne Movement) 주최로 <세계 지도자 포럼>(Global Leadership Forum)이 열려 90개국 가까운 나라에서 400명이 모였고,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는 <아시아 로잔위원회>(Asia Lausanne Committee)가 주최하는 <아시아 교회지도자 포럼>(Asian Church Leaders Forum)이 열려 아시아의 교회 지도자들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300명 가까이 다시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공부하고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신앙을 지켜갈 것과 순수하고 온전한 복음을 힘껏 전 세계에 전할 것을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잔 운동>이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고 튼튼히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의장으로 선임된 이후 <한국 로잔위원회>는 <로잔 운동>이 무엇인지를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서 이 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이 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하여 시작한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각 신학대학에 <로잔 연구회>를 만들어서 젊은 신학생들로 하여금 <로잔 운동>의 정신과 그 신학을 배우게 하는 일입니다. 현재 15개 신학대학교에 그 연구회가 생겼고 곧 한 군데 또 생길 것입니다. 

각 학교에는 한 명 이상의 지도교수가 자원하여 열심히 지도에 임하고 있으며 그 모든 연구회가 연합하여 1년에 한 번 <로잔 신학 캠프>를 열어 공동연구와 친교를 갖기도 하는데 <한국 로잔위원회>가 그 활동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로잔 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시작한 다른 한 가지 일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교회들을 방문하여 정규예배시간을 통해 <로잔 순회예배>를 드리며 일반 교인들에게 <로잔운동>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순회예배를 우리 교회에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명성교회에서 이번 <아시아 교회지도자 포럼> 참석자들과 함께 순회예배를 드리며 <로잔운동>을 소개했습니다. 

<로잔 운동>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모인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로잔 운동>은 지난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가장 의미 있는 교회사적 사건입니다. 지난 20세기에 기독교 세계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며 그 향방을 좌우한 대표적 현상 두 가지를 꼽는다면 하나는 과학의 가속적인 발전에 편승한 합리주의의 확산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의 종식입니다. 많은 교회와 신학이 합리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울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와 그 계시의 진리성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국주의 종식은 곧 과거 서구 제국의 식민지들의 독립이었습니다. 신생독립국가들은 자기들을 지배했던 서구 국가들에 대해 반감을 분출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전해준 기독교와 그들이 세운 교회까지도 함께 배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구 기독교 전통의 국가들은 더 이상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 결과 선교의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신학의 합리주의에 대한 굴복과 교회의 선교포기라는 이 두 현상을 단호히 거부하며 일어난 것이 바로 <로잔 운동>입니다. 

전 세계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 모여 성경적, 복음적 신앙의 회복을 선언하고 선교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되어야 할 주님의 지상명령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두 번째로 모이고, 또 그로부터 21년 후인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Cape Town)에서 세 번째로 <로잔 운동>의 기치 아래 모인 이들은 로잔에서 선언하고 천명한 신앙과 확신을 재확인할 뿐 아니라 그 실천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3년 전 케이프타운에서의 제 3차 로잔대회(The Third Lausanne Congress)에는 198개국에서 4,200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대중 전도 집회가 아닌 기독 지도자대회로서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모인 회의는 2000년 기독교 역사에 그 전례가 없습니다. 세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것(the whole Church taking the whole gospel to the whole world)이 <로잔 운동>의 변함없는 비전이며 열망입니다. 저는 이 <로잔 운동>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바로 서고 건강해지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한국교회는 참으로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로 개신교 교회 설립 126년의 역사 속에서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하였고 전도도 열심히 했으며 해외선교에도 많은 힘을 쏟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교인 수는 증가를 멈추고 감소세로 돌아섰습니다. 우리 교단은 완만하지만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어도 전체적으로 개신교의 교세는 약해진 것입니다. 대 사회적 영향력도 약해졌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워졌으며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과 적대감이 더 거세졌습니다. 전도하기가 힘들어진 것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9-10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요약해 보면 “택하심을 받고 긍휼을 얻은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사람들이라고 이어지는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백성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지 말고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어서 사도 베드로는 12절에서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그가 이 편지를 써 보낼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그러한 비방에 대해서 변명하거나 반박을 하거나 논쟁을 벌이려 하지 않고 그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을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는 길이라고 권면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오늘날 그런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권면대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비판적이며 적대적인 세력들을 상대로 변명을 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싸우려 하기보다 우리가 더 잘 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더 고치고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부지런히 살피고 말없이 실천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밖으로는 선한 일을 열심히 행하고 안으로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는 거류민과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육체의 정욕에 굴복하면 세상으로부터 악행한다는 비방을 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인도 뱅갈로어에서 열린 <세계 지도자 포럼>에서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온 세상에 어떻게 복음을 전하며 선한 영향을 줄 것인가를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매일 매일의 주제가 <겸손한 백성으로서의 영향>(Influence in and through the local church as people of humility), <검소한 백성으로서의 영향>(Influence in and through the work place as people of simplicity), <정직한 백성으로서의 영향>(Influence through the cultural influencers as people of integrity), <성령의 역사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향>(Influence through the work of Holy Spirit as people of God)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성령의 역사 아래에서 되찾고 지켜가야 할 덕목들을 적시한 것입니다. 

이 덕목들 가운데 겸손함을 뜻하는 Humility의 H자와 정직함을 말하는 Integrity의 I자와 검소함을 가리키는 Simplicity의 S자를 나란히 놓으면 HIS가 됩니다. 우리는 HIS people이고 HIS people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백성은 겸손하고 정직하며 검소한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성령의 역사 아래에 사는 백성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로잔 운동>의 정신입니다. 

한국교회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그간의 놀라운 성장 때문에 교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지만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고,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함은 거짓과 불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는 하나님의 적입니다. 하나님의 적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극단의 자기모순이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정직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검소함의 덕을 지녀야 합니다. 검소함은 세상의 온갖 탐욕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물질욕, 명예욕,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세상과 구별될 수 없습니다. 세상과의 구별성이 없어지는 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힘을 잃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의하며 유혹이 심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겸손하고 정직하며 검소하게 살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힘이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역사 아래 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선한 일을 많이 행하면 다시금 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강하게 미칠 수 있을 것이고 사회로부터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잔 운동>의 정신을 따라 성경적 신앙을 확고히 하고, 그 신앙을 따라 행동하며 살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힘껏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로잔 운동>의 정신으로 한국교회 전체가 변화하고 세계교회가 더 강해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인도 방갈로어의 <세계 지도자 포럼>에서 <한국에서의 대형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발표해줄 것을 요청받고 우리나라에서 대형교회만이 할 수 있고 또 대형교회들이 현재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역들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저에 바로 앞서 <아시아 로잔위원회>(Asia Lausanne Committee) 의장이 한 멋진 말 한 마디가 귀에 남았습니다. 작은 교회와 큰 교회의 문제를 거론하며 “작은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큰 것은 유익하다”(Small may be beautiful, but big can be useful.) 한 것입니다. 

작은 교회와 큰 교회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들은 큰 교회들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유익함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 큰 교회들은 작은 교회들을 무시하지 말고 그 아름다움을 보며 인정하고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 큰 교회들은 자신들이 유익할지는 몰라도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아름다운 새 성전을 지을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만 아름답고 교회 자체가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크면서도 아름다운 교회의 비전과 소망을 가진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오늘날 힘 있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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