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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 광야학교에 재입학하다 (시 6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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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광야학교에 재입학하다 (시 63:1-11)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벤 버냉키(Ben Shalom Bernanke)가 지난 5월 프린스턴 대학의 졸업식에 초빙되어 ‘10가지 제안(The Ten Suggestions)’이란 제목의 축사를 했습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인생이란 경이로울 정도로 예측할 수 없다. 인생이란 여러 개가 들어있는 초콜릿 상자를 여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도 인생에서 실패를 원치 않지만 실패는 인생과 배움에 있어서 필수 부분이다. 만약 유니폼이 더럽혀지지 않다면 인생이란 경기에 있었던 것이 아닌 셈이다”라는 것입니다.

금년도에 대학의 문을 나서는 졸업생들은 가장 불운한 세대로 꼽힙니다. 비좁아진 취업 문턱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상아탑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는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광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런 저들이기에 명사(名士)들은 한결같이 광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상아탑을 나서는 저들만 광야로 내몰리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어떠합니까? 나는 지금 어떤 유(類)의 광야에 내던져지고 있습니까? 

시편 63편 표제를 보면, 다윗이 유다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입니다(시 63:1). 

죄를 전가시킨 염소를 끌고 가 죽게 만드는 곳입니다(레 16:21-22). 다윗의 생애를 추적하면 대략 세 번 정도 이 유다광야를 경험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목동시절, 사울 왕에게 미움을 받아 도망쳤을 때, 왕이 된 후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피신하였을 때입니다. 

이 중에서 시편 63편은 몇 번째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까요? 목동시절은 분명 아닙니다(시 63:9-10). ‘왕’(11절)이란 호칭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에 지은 시라고 생각하여 압살롬의 반란으로 유다광야로 몸을 피했을 때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세 가지 이유로 선뜻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첫째, 11절의 ‘왕’이라는 호칭 때문입니다. 다윗은 평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왕’이라고 지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기에 하나님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시 145:1, 68:24). 더군다나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이 범죄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인데 다윗이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왕’으로 지칭했을 리 만무합니다. 

둘째, 9절과 10절 때문입니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시 63:9-10).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할 때 시므이가 저주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선으로 자신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삼하 16:12). 그러므로 압살롬의 반란 때문은 아닙니다.

셋째, 역시 11절 때문입니다. 원문에는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하나님을 기뻐하며’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윗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63편은 다윗이 지은 시가 과연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 시편전체가 처음부터 완벽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시’라고 하는 경우에도 다윗이 시 전체를 완벽하게 쓰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시편 6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10절까지는 분명 다윗의 작품이지만, 11절은 누군가에 의해 덧붙여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1절 때문에 시편 63편은 다윗의 작품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의 칼날을 피하여 유다광야에 숨어 있을 때, 바로 그 때 지어진 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그 황폐한 죽음의 광야학교에 두 번째 재입학을 한 셈입니다. 언제가 제일 힘들었을까요? 첫 번째는 처음입니다. 세 번째는 죄를 지은 결과로 유다광야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전혀 없었습니다(시 59:3).

믿음으로 사는데도 기막힌 일이 반복되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다윗은 예외였을까요?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시편 63편의 구조와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봅니다. 헤르만 궁켈은 63편이 1,2,6,7,8,4,5,3,9,10,11절로 재배열되어야 문맥의 흐름이 자연스럽다고 보았습니다. 슈미트, 쉐퍼같은 학자들도 시편 63편은 뭔가 문장 흐름이 어색해도 너무 어색하다고 하면서, 저들도 역시 이 시의 배열을 새롭게 재배치합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무엇을 시사합니까? 급박한 상황에서 기승전결이 떠오릅니까? 당시 다윗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온 신경을 집중하여 붙잡는 분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하나님이란 말이 무려 여섯 번 등장합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 ‘주님’에 집중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주님을 찾고, 자신을 광야로 내모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어떤 방법으로 안깁니까? 찬양하고, 송축합니다. ‘기쁜 입술로’(5절), ‘즐겁게’(7절)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임금님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11절)고 곁에서 다른 사람이 볼 때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다윗의 찬양 속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녹아있습니다(시 63:3). 하나님의 승리를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욥 23:10, 롬 8:28).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양했을 때 그 현장에 기적이 나타났듯이 다윗도 그 광야에서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 63:7-8). 시제가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이 그 현장에 나타나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극과 극은 언제나 통합니다. 사람이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처할 때 이를 견딜 수 있도록 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최고의 진통제가 있습니다. 바로 엔돌핀입니다. 이 엔돌핀 분비량이 최고조에 달할 때는 죽는 순간과 출산 때입니다. 목숨을 걸고 자식을 낳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엔돌핀은 극적인 순간에 생겨납니다. 

다윗이 지금 죽음과 맞닥뜨려 있습니다. 그것도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입니다. 물론 마음이 흔들렸고,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붙잡고, 그분의 품에 파고드는 마음으로 그가 찬양하는 순간 하나님이 영적 엔돌핀을 다윗에게 풍성히 공급해주셨습니다. 기적을 맛보며, 기쁨을 만끽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광야에 머물고 계십니까? 광야 가운데서도 유다광야입니까? 승냥이가 쫓아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확신하며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찬송을 부르세요.”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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