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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가 제자입니다 (눅 9: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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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자입니다 (눅 9:51-62)
    
오늘은 “제가 제자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며 신약학자요, 저술가이시고, 개신교회의 교황이라고 까지 부르는 존 스토트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쓰신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존 스토트목사는 1921년 4월 27일 영국에서 태어나 2011년 7월 27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2009년에 부활절에 제자도라는 책을 쓰셨으니 88세 때에 쓰신 마지막 책입니다. 

존 스토트목사님은 그의 제자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간직해야 하는 변함 없는 핵심자질 8가지를 말하였습니다. 제목만 열거해봅니다. 불순응, 닮음, 성숙, 창조세계를 돌봄, 단순한 삶, 균형, 의존, 죽음 이렇게 8가지는 제자가 지녀야 하는 변함없는 핵심자질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의 첫 번째 특성은 불순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에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는 세상에 오염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 해서는 안 되고,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시켜도 안 됩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강조하기를 도피주의와 순응주의 둘 다 피하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도피주의자로 살지 말아야 하고, 세상에 순응주의자로 살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한 백성을 불러내셔서 우리로 세상 모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거듭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도의 두 번째 특성이 닮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갈대나 죽은 물고기나 카멜레온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소극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상 풍조의 영향을 피하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적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그리스도처럼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유명한 문답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존 스토트 목사님을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보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롬8:29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다른 특성들은 언제 기회를 보아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본문에는 우리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육적인 삶을 접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워지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마음을 굳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 중에 몇 사람을 앞서 보내시면서 사마리아의 한 마을로 가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명을 받아 앞서 마을로 들어갔던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되돌아왔습니다. 

지금 유대인의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왜 사마리아를 지나가느냐고 동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주장하였고, 사마리아 인들은 그리심 산에 세운 성전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로 유대인들을 사마리아인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 때 야고보와 요한이 이런 광경을 보고 말했습니다. 두 사도는 이런 사마리아 사람들을 혼내주고 저주해야만 한다고 보복을 주장하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우리 주님이 두 제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니 지금 우리가 모시고 가는 예수님이 누구인줄도 모르고, 감히 영접하지도 않고 마을로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가, 하늘에게 불이 떨어져 다 태워버리라고 명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1.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그들 두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마을로 가시고 있습니다. 본서를 기록하는 저자 누가는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꾸짖었는지 내용을 생략하였습니다. 고대의 사본에는 이런 말씀이 55절에 이어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 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라고 들어 있습니다. 다만 참고할 뿐이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불벼락 요청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정신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삼년이나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돌을 던진다고 이쪽에서도 돌을 던지면 돌 던지는 저 사람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희생과 섬김으로 사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회는 사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기독교회를 향하여 개독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보복하고 더 저주를 퍼붓겠다고 할 때에 예수님은 다만 제자들의 하는 말을 꾸짖으셨습니다. 어떠한 비난이나 고난이라고 달게 감수하면서 다른 마을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섬김으로, 기다리고 용납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욕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믿지 못하였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당신들을 통하여 우리를 깨닫게 해주신다고 감사해야 합니다. 

심판이란 하나님의 권한인데, 우리가 하나님에게 심판해달라고 하는 것도 월권이요,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 갚는 것도 하나님에게 맡깁시다. 우리를 반대하는 저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래도 예수 믿는 이들이 달라도 정말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제자도는 물욕보다 앞선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이 말은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 예수님이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푸념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청빈, 물질에 대한 초월, 가난도 기쁘게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허리 띠를 졸라매는 아픔이 있어야 예수 믿는데,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을 먹고 버티는 것을 경험해야, 어떠한 어려운 일에도 능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서게 됩니다. 

우리 주님을 따라가면 물질에 축복을 받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살고, 입신출세할 수 있다고 하면 따라나서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예수님을 따라 나와 입신양명하고 축복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대학원에 들어와 시험 치는 목사후보생들을 교수님들이 면접합니다. “왜 신학대학에 들어오고, 또 목사가 되려고 합니까?” 이 질문에 별의별 대답이 다 나옵니다. 그 학생의 철학, 그의 사상, 그의 신앙, 그의 사람 됨됨이가 다 묻어나옵니다. 

그런데 간혹 좋은 대학을 나온 학생들 중에는 ‘목사님은 정년이 70세라고 하는 말에 매력이 있었습니다. 사회 생활하다보면 40십 대에 퇴직을 걱정해야 하는데, 목사님은 그 때부터 전성시대를 이루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목사님을 보니 좋은 사택에, 좋은 승용차에, 높은 연봉에, 목사님들이 다 잘 사시는 것 같아서 지원하였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이들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목사가 되고보니 한국교회가 땅에 떨어져 밟히고 있습니다. 

세계 모든 교회들이 고학력의 목사님들이 들어설 때부터 교회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쇠퇴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우리 기독교회가 꼭 박사학위를 가져야만 복음을 가르칠 수 있고, 우리가 믿는 복음이 그렇게 어려운  복음입니까? 복음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쉬운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어렵게 학문적으로 말하니, 다 죽고, 시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고, 쉽게 말해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는데, 학위 논문을 강해하면 누가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제가 목회하는 중에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그 대학의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국가로부터 장학금을 받았고 방위산업체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탄탄대로가 열려 있고, 아버님은 장로님, 어머니는 권사님, 좋은 집안에서 참으로 멋지게 큰 청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 결단하고 신학대학원을 진학하고, 목사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것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책 두 권 빌려주면서 신대원에 가려면 이 책을 읽고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청년의 집안에서는 적지 않은 혼란이 왔습니다. 아들이 신대원에 가려고 하니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제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드님은 저보다 훨씬 크게 쓰임 받고, 잘 될 것입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그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보니 목사 되는 5년이 잠시 잠깐 지나가고 금방 목사가 됩니다. 좋은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신대원에 들어가서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로, 모교로 들어가서 교수로, 봉사하는 것을 봅니다. 그가 먹고 사는 것을 생각하였다고 하면 옛날 직장이 좋고, 그 직업이 좋았습니다. 그런 것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으로 충분하다고 하니, 예수님이 그의 앞길을 책임져주시고 있습니다. 


3. 제자도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선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우리 주님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60절입니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급진적이고 난해하여 해석하고 들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신이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주님을 위하여 나선 사람들은 가정에서 지켜야 하는 어떤 의무도 이행하지 말라는 것으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인데, 이 교훈을 보편적인 행위의 규범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쫓아가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일이 먼저냐, 가정의 일이 먼저냐, 하나님의 종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느냐, 아니면 가족에 대한 의무를 먼저 할 것이냐 하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 곧 장례를 모셔야 하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낸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으면 평생 주님의 종으로 나서지 못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는 죽음의 치다꺼리로 일생을 그렇게 보내고 말 사람입니다. 


4. 제자도는 전심을 요구합니다. 

또 어떤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옛날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는 집에 들어가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하고 따라나서게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집으로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엘리야의 요구보다 훨씬 더 엄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전심으로 하지 않는 봉사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고 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은 앞에 보이는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바라보면서 오직 한 길, 오로지 앞만 보면서 가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는 말은 유대인의 오래된 속담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는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과 같습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밭이랑을 제대로 일굴 수 없습니다. 잘 사는 친구들을 돌아보고, 옛날 잘 나가는 직장을 쳐다보면서 그 때를 동경하면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저와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영어를 잘 하여 여러 책을 번역하고 교회에서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 사모님은 정말 기울어 보였습니다. 인물도 약하고 키는 목사님의 가슴에 닿을 만큼 작으셨고, 함께 나서면 균형이 맞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성격이 못되었습니다. 부인을 무시하고 자꾸 싸우고 부인을 때렸습니다. 우리 집 사람이 여러 번 들어가서 싸움을 말려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권사님들이 목사님 댁에 찾아왔다가 싸움을 말려야 했습니다. 제가 4년간 시무하고 그 교회를 나와서 다른 대형교회의 부목사로 갔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그 교회에서 계속 있었습니다. 그 후에 몇 년이 지나고, 제가 본 교회 담임목사로 왔을 때에 그 목사님이 평양노회에 가입하겠다고 했습니다. 

돈암동에 있는 교회를 시무하다가 쫓겨나와서 교회를 분립하였고 새로 노회에 교회를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니 부인이 옛날 사모가 아니라, 다른 분이었습니다. 전에 시무하던 교회의 고등부 교사였던 제가 잘 아는 분이 목사부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에 고등부 지도하다가 고등부의 여자 선생님이랑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탈선하므로, 교회에서 시무를 못하고 떠나야 했고, 후에 부인과 이혼하고 고등부 교사와 살았습니다. 목사님이 평양노회의 북시찰 경내의 교회에 계셨는데, 가입은 하고 한 번에 제 얼굴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중랑천이 범람하고 서울 동부에 대홍수가 났을 때에 두 분이 새벽기도 나오다가 중랑천에서 나오지 못하고 승용차에 갇혀 떠내려가다가 한 날에 죽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보실 때에, 두 사람이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니 데려가시고 말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을 살아생전에 목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도 믿어야 하고, 부귀영화 누리고, 예쁘고 멋진 부인도 얻어야 하고, 그러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고, 교회를 가르던 사람을 그냥 하루아침에 데려갔습니다. 방송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아주 많은 목사님들이 놀랐습니다. 

미국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잘 감당하는 목회자로, 그레그 옥던박사가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풀러신학 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프로그램의 학사 책임자로 일한 바 있고, 전 세계에서 제자훈련 교재로 널리 사용되는 “제자도의 핵심”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레그 옥던 박사가 “세상을 잃은 제자도, 세상을 얻은 제자도”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는 우리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인격을 닮아가기 위하여 제자가 되려는 사람, 제자로 살려는 사람들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서로 격려하면서 제자로 성장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에 익숙하여 어제나 오늘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을 제자훈련하였지만,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 있어 제자훈련이란 교회생활을 하는데 거쳐지나가야 하는 과정이요, 조금 힘들지만 참여해볼만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삼인조 제자훈련을 제시합니다. 세 사람이 한 조를 이루면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견제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 제자로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세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서로 격려하고 서로에게 조언하고 좋은 영향을 주면서 삼총사가 되어서 변화를 이루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꿈꾸시고, 예수님이 기대하는 제자들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를 길러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레그 옥던이 제시하는 제자훈련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고 싶은 자신의 여정에 다른 사람 두 명을 초대하였습니다. 삼인조 그룹을 이루고 서로를 기뻐하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려고 하고, 헤어질 수 없는 좋은 동역자들이 되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레그 옥던은 전도양양한 젊은이 에릭을 불러들였고, 거기에 또 칼이라는 성도가 합류하여 세 사람이 종종 만나서 성경을 나누며, 또 함께 기도하며, 한 주간 깨달은 말씀을 서로 나누고 적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젊은이 에릭이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던 자리에서 선교여행을 다녀오고, 그가 고환암이라는 어려운 병마를 이겨내고 결혼하고,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살게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고 하셨습니다. 

전도서4:12에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혼자 개인적으로 아무리 잘 믿어보려고 하여도 패하게 됩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대적 마귀에게 맞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 겹 줄을 이루면 쉽게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회를 반대하고 대항하는 이들에게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로 그들을 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정받는 제자들입니다. 제자의 길, 제자도는 물욕보다 앞서야 합니다. 출세를 위하여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도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선입니다. 

제자도는 전심을 요구합니다. 예수 믿을 날이 많지 못합니다. 고난의 생활도 각오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우선하며, 오로지 부르신 그 부름을 받들기 위하여 앞만 보고 전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홍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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