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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사 65:23-25, 고전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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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사 65:23-25, 고전 1:14-17)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3년, 정전된 지 60년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종전이 되지 않고 대치 상태에서 남북의 대결이 완화될 분위기가 아닙니다. 더구나 남남의 이념갈등으로 여야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결구도로 치닫는 것을 보니 참 안타깝습니다. 속히 남북이 통일되어 우리끼리 대결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시대는 다른 나라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세계화의 무한경쟁 구도에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밖에 있는데 안에서 싸우니 마음이 씁쓸합니다. 
  
여러해 전에 웨일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영국이 한국전쟁 참전국이었는데 웨일즈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정전기념일인 7월 27일에 기념행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도 그 때는 정전기념일이 7월 27일인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6월 25일은 기억하지만 7월 27일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참전용사들은 군복을 입고 예배당에 모여 함께 기념행사를 한 다음, 운동장에 나가서 열병 분열행사를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그들 앞에서 축사하는 순서를 맡았습니다. 영국군(UK)은 한국전쟁에서 전사자가 1,109명이며 실종자가 1,263명이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고귀한 생명이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한 것입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유엔 참전국은 전투지원국이 16개국이었고, 의료지원국이 5개국이었습니다. 참전용사 가운데 67,794명이 사망실종이었습니다. 한국군은 570,947명이 전사하였고, 460,428명이 실종하였습니다. 103만 명 이상이 사망실종이 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정전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천만에 가까운 이산가족과 청춘을 보훈병원에서 보낸 상이용사도 있습니다. 호국보훈의 달이 다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그들의 희생을 기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우리나라를 지켰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헛되지 않는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민주주의, 평화를 잘 지켜야 앞으로도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의 생명이 절대로 헛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된 죽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상징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고기, 별, 알파와 오메가, 십자가 등이 모두 의미를 가진 상징들입니다. 상징이란 신앙의 표현이며 중요한 기호입니다. 그러나 상징이나 부호만 있고 의미가 사라졌다면 이런 상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십자가는 그 의미는 온 데 간 데 없이 표시만 가지고 있기가 쉽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는 있는데 십자가의 의미나 감동이 없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잘 하는데 마음에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없습니다. ‘주여’라고 부르짖는데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데 마음에 우러나는 신앙고백이 없습니다. 주기도문으로 잘도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삶이 없습니다. 이런 표면적 신앙이 참 신앙을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무력하거나 효력이 없는 상태가 되면 십자가는 헛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하는 말은 십자가가 헛되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삶, 십자가 없는 복음,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헛되지’라는 말은 헬라어 ‘케노데’의 번역입니다. 이 말은 이름과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만일에 바울의 설교가 십자가의 도 대신 인간의 지혜나 인본적인 철학으로 대치되었다면 그의 설교는 미천한 인간의 지혜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설교에서 십자가를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십자가 외에 어떤 것도 그의 설교에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굳게 믿고 전하므로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음만을 전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7 상반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합니다. 복음은 전도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전도의 핵심내용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사변적, 이론적 신앙이 아니라 경험적, 실제적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그의 신앙의 시작이고,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복음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11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빼면 히브리서에 2번, 베드로전서에 4번, 요한계시록에 2번 나옵니다. 그 외에는 모두 바울서신에 이 단어가 나옵니다. 특히 로마서에 14번, 갈라디아서에 11번 나옵니다. 바울의 신학적 이론서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복음이란 말이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바울신학의 핵심이 복음인 것을 증명합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구원받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이야기의 절정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빠진 복음은 거짓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빠진 복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7에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면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단호함은 다음 절에 분명이 드러납니다. 복음을 변질하거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8에는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사도의 저주권은 무서운 권리입니다. 사도가 저주하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변질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 저주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9에도 다시 말합니다.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로마서 12:14에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도 저주하지 말라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합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 제일주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휴 매킨토시는 “복음이 역사적 존재와 단절되고 복잡한 형이상학적 이념과 동일시될 때 그것은 토의할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분명히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변질된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설교는 윤리강의가 아닙니다. 건강식품을 소개하고 건강강좌를 한다면 설교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사라졌다면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회개와 십자가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과 같은 복음의 핵심이 없으면 아무리 재미있어도, 아무리 유익해도 복음은 아닙니다. 강단에서 외치지 않아도 되는 헛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계시록을 풀어주며, 천당지옥을 가르치는 계시록도 십자가 없이 아무개 목사나 자기 교회만 가르치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려”라는 말은 “유앙겔리제스다이”라는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현재진행을 포함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행위는 계속적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아닌 죽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빛을 밝히지 않는 어둠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고통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게일선교사의 선교편지’에 보면 1891년 11월 25일에 게일목사님이 마펫선교사를 송도에서 만났습니다. 그날 마펫이 게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게일, 한국 땅 방방곡곡에 소중한 것(treasures)을 전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이야”. 복음은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합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밤마다 붉은 십자가 네온사인이 동네를 뒤덮습니다. 십자가가 헛되지 않은 것은 복음 덕분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마을이 없게 된 것입니다. 

 
둘째,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아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7 하반절에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말의 지혜로 예수님을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말로 설득하고 나의 재주로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말의 지혜”란 헬라어 “소피아 로구”입니다. 이 말은 ‘말의 명석함’이란 뜻입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인간의 지혜와 달변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말을 잘 해서 전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쟁이들은 말은 잘한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에 듣던 말에는 “말 잘하면 공산당(빨갱이)”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로 사람을 현혹케 할 수 있습니다. 공산당의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단들이 말을 잘합니다. 아주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솔깃하게 하고, 넘어가게 하고, ‘이런 말씀도 있었네’라고 놀라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악한 영의 술수에 불과합니다. 
  
사기꾼을 보세요. 사기꾼은 한 결 같이 말을 너무 잘합니다. 말을 잘 못하면 사기도 못 칩니다. 사탕발린 말로 진실을 포장하는 것이 사기입니다. 요즘에는 TV 쇼핑채널을 보면 쇼 호스트들이 말을 아주 잘합니다. “이제 몇 개밖에 안 남았습니다”, “몇 분 후에 마감합니다” 라고 하니 집에서 부인들이 넘어가지 않습니까? 귀를 솔깃하게 만들어서 사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철학과 수사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말을 잘 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이 말을 잘 한다고 하여 웅변의 신, ‘헤르메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7:18에는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라고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말을 잘 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소중하므로 말을 잘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십자가가 드러나게 하려고 말을 잘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도 재주도 감추고 십자가와 복음만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찰스 뉴먼은 ‘말의 인플레이션’(Inflation of discourse)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말이 너무 풍성하게 되면 말의 과장법이 정교하게 개발되고 공중의 유익이나 그에 관련된 것과는 어떤 연계도 맺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아름답게 포장된 말이 난무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도 물속의 물고기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물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현대인은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불편하지 않고 홍수 속에 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탈무드에는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말하는 것의 두 배는 듣도록 하라”고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흠이지만 말을 많이 듣는 것은 지나쳐도 흠이 안 됩니다. 사람들의 노닥거리는 말, 험담, 잡담에는 전혀 호소하는 힘이 없습니다. 이런 말로는 복음의 능력이나 십자가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잠언 7장에는 말에 대한 잠언이 있습니다. “음녀와 말로 호리는 이방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잠언 7:21에는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라고 합니다. 꼬이는 말로 넘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항상 말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진실이 없는 말 즉 말재주나 말장난은 넘어지게 하는 독과 같습니다. 이런 말은 파멸하게 하는 쓴 잔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4:20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전해지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전해집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말의 지혜로 하면 실패합니다. 제일 큰 실패는 십자가의 공로가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진실해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해로울지라도 말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말에 꾀를 섞지 말고, 말재주로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지 말고, 언변은 없지만 우리 입을 통하여 십자가가 강하게 증거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결론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아니하면 그 이름이 길이 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삶을 헛되이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름 명(名)자는 저녁 석(夕)자와 입 구(口)자를 합한 자입니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서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이름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부르고, 이름으로 그 사람을 압니다. 또 사람들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이름도 이성희 외에 목사, 교수, 이사, 이사장, 아들, 아빠, 남편 등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헛되지 않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에 걸맞게 사셨습니다. 그 이름대로 구원자가 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그 이름도, 십자가도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으심이 헛되지 않게 되도록 구원받은 귀한 자로 십자가를 증거하며 십자가를 늘 묵상하며 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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