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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앞에 선 나의 자리는 (요 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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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앞에 선 나의 자리는 (요 3:31-36)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여리고 성에는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름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바’은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나면서 소경인 사람은 자신이 이름이 없을 만큼 존재감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존재감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바디매오에 대한 사건이 나오는데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말할 때 ‘나사렛 예수’ 라고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출신지를 붙여 그 사람을 낮추거나 높이거나 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열악한 갈릴리 지역에서도 가장 낙후된 마을로서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던 마을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을 경시 하고 있었음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을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성경에 보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의 사람 예수라고 말하며 경시여길 때 바대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외침에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시’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무시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당신 앞으로 오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네게 무엇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선포했고 바디매오는 눈을 뜨고 곧 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디매오의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왜냐하면 사건의 배경은 다르지만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바디매오와 세례 요한의 자리가 생각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그에게로 몰려들었다가 예수님이 등장하자 예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님,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예수에게로 몰려가니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전혀 요동하지 않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고 말하며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그리고 36, 37절에 ‘아들’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땅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부분적으로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직접 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 직접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36절에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디매오의 사건에서 여리고 성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평가한 것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로 사람들이 몰려가니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땅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보고 따른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와 세례 요한은 땅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시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바디매오와 세례 요한은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그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그들의 삶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서느냐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에 서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그 분으로 인해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그 분은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삶의 자리 중에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목적이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님 앞에 서는 사람들을 세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첫 번째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욕망을 따라 행동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조금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 교회 안에 이런 육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교회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판단했습니다. 세상과 같은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며 평가하고 판단했습니다. 교회의 분열과 아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도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말을 알아듣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압니다. 그러나 행동은 자신의 욕구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매우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지가 약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도 세상의 것에 젖어 있어 하나님의 영을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말은 옳은 것을 말하지만 행동은 따르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 술을 좋아하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술을 먹어도 너무 먹는데 술을 먹으면 실수를 하니까 술을 끊어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끊지를 못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잘 드리고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출출한 겁니다. 집에서 나와 자주 가는 술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00인데 가고 있으니 술상을 차려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술집에 전화를 한다는 것이 잘못해서 교회로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목사님이 받았습니다. 집사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목사님은 집사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습니다. 아는 척을 하면 민망해 할까 봐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목소리를 알아들은 집사가 아는 말이 ‘아니 목사님 이 시간에 어떻게 술집에 계셔요?’ 

육신에 속한 사람은 신앙은 가지고 있으면서 항상 육체의 욕구에 쩔쩔매며 끌려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과 세상의 즐거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만 삶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신령한 사람입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교회발전위원들에게 ‘세이비어 교회’라는 책을 나눠드렸습니다. 앞으로 우리 행복한 교회가 비전을 더 확대하고 사역을 구체적으로 만들어갈 때에 모델이 될 수 있는 교회라 생각이 되어 읽어 보라고 나눠드렸습니다. 함께 읽으며 귀한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1947년에 세워진 교회인데 교인이150명이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 년에 약 200억의 헌금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섬깁니다. 어느 사람은 노숙자의 거처를 위해 아파트 80채를 헌물로 드리기도 합니다. 

75개의 사역 장을 교인들이 헌신적으로 섬겨 나갑니다. 작지만 미국 사회에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적은 교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봉사하며 헌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목적과 방향 온전히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대충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무늬만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삶이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보고, 가정을 보고, 교회를 보고, 이웃을 보고, 나라와 세계를 봅니다. 다른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 가치인 정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복음송 가운데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처음 이 복음송을 부르며 가사가 은혜가 되어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복음송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에 나도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아파하는 일에 나도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삶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는 것은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온 몸으로 바르게 서서 하나님을 향하며 그 분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신령한 삶입니다. 그 분을 향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은 성실합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르게 세우려면 영적으로 성실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게으르고, 요령을 피우는 사람은 신령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신령한 삶은 성실한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삶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할 일이 없을 때 성경을 읽은 것도 좋지만 바쁜 가운데서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바쁘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쁘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의 큐티와 기도는 성실한 신앙 생활을 세워가는 두 기둥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성실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성실한 신앙이 아닌 사람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가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은혜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공동체에 덕을 끼치지 못합니다. 쉽게 뜨거워지는 사람은 쉽게 식습니다. 우리 주변에 믿음의 영향력을 선하게 끼치는 분들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성실함이 뒷받침 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성실한 믿음을 가지고 임했던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소중한 일꾼을 어느 한 순간 큰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가장 힘이 되고 소중한 일꾼은 힘이 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신실하게 지키는 일꾼입니다. 가정과 직장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충성스럽게 지키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36절에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에게는’과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서서 순종하는 자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삶이 될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은혜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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