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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인 위기를 맞을 때 필요한 신앙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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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위기를 맞을 때 필요한 신앙 (왕상 19:1-8) 
 
 
❚영적인 위기의 시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주전 8세기경, 남 왕국 드고아 출신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 가서 예언을 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일성(一聲)입니다. 이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로 정치를 아주 잘 해서 이스라엘은 어느 때보다 부강하고 평안한 세월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평화를 말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남 왕국 출신의 아모스라는 한 촌뜨기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너희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특히 여로보암 왕과 정치 지도자들, 그중에서도 제사장과 거짓을 말하는 예언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외쳤으니 참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모스가 이렇게 나름 잘 나가는 시대에 위기와 심판을 선언한 것은 바로 방금 읽은 아모스 8:11 말씀에 이유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땅에 큰 기근과 기갈이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근은 먹을 게 없어 굶주리는 기근이 아닙니다. 마실 물이 없어 목마름이 아닙니다. 먹을 게 없는 기근과 마실 게 없는 목마름보다 훨씬 심각하고 무서운 기근과 기갈,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영적 기근과 기갈 때문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긴 왜 없어요?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무수한 제물을 드렸는데, 그 예배를 통해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혹시 홍수가 나면 가장 부족한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물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홍수가 나면 가장 부족한 이 물입니다. 사방에 물 천지인데 정작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모스 시대에 수많은 제사와 예배가 드려졌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 제사는 어디에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은 엄청나게 선포되었는데 정작 진정한 말씀, 살아있는 말씀은 찾아볼 수 없는 심각한 상황, 심각한 영적 위기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심각한 영적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잘 믿고 잘 섬기는데?” 하며 안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너희가 지금 얼마나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한 줄 아느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당하기 전에 제발 정신 차리고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물론 북 왕국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이런 아모스의 외침에 귀를 막고 “이렇게 좋은 세상에 뭔 헛소리냐” 하다가 그만 나라가 멸망하는 큰 심판을 당하게 되고 맙니다.

오늘은 <위기 신앙>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영적인 위기를 맞을 때 필요한 신앙>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시대처럼 옛날보다 훨씬 배부르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먹을 게 없어서, 돈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리고 있는 이 시대, 바로 우리 시대입니다. 또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라 기도가 없어 영혼이 목마르고 영적인 능력을 상실해 가는 이 영적인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으로 무장해야 할 것인지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 가기 싫어

그런데 도대체 제가 무슨 이유, 무슨 근거로 자꾸 이 시대가 영적 위기다, 영적 위기다 하는 것일까요? 제가 무슨 아모스 선지자도 아닌데 이렇게 교회도 많고, 성도도 많고, 기독교의 힘이 얼마나 강해졌는데 이렇게 잘 나가는 시대에 왜 자꾸 영적인 위기가 심각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요즘 우리의 영적 위기를 보여주는 아주 단적인 예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나안 교인’들입니다. 여러분 ‘가나안 교인’이 누군지 아세요? 가나안에서 온 교인들이 아닙니다. 가나안을 한 전 거꾸로 읽어보세요. ‘안 나가’ 예, 예수는 믿는데, 기독교인이긴 한데 교회에 안 나가는 교인들을 뜻하는 신조어입니다. 예수는 믿는데 왜 교회를 안 나가요? 한 마디로 교회에 실망하고 상처 받아서 교회를 안 나가는 교인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안 나가도 “당신 종교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주저하지 않고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교회에 실망해서 교회는 안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이유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원해서”가 30.1%로 가장 많았으며, “목회자에 대한 불만”(24.3%), “교인들에 대한 불만”(19.1%), “신앙에 대한 회의”(13.7%), “시간이 없어서”(6.8%), “개인적인 이유”(5.7%)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분석해 보면 목회자에 대한 불만과 교인들에 대한 불만이 전체의 43.4%로 거의 절반 수준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전에 다니던 교회에 대한 평가를 보면 “교인들의 삶이 매우 신앙인답지 못했다”(30.6%), “교회에서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했다”(30.0%), “담임목회자가 독단적이었다”(26.5%), “교회 내부에 분란과 갈등이 심했다”(21.8%), “교회 내 파벌 다툼이 심했다”(21.7%), “교회 건축과 관련해 큰 어려움이 있었다”(16.2%) 등의 불만사항이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 계시는 여러분은 모두 교회에 나온 분들이니까 이 ‘가나안 교인’ ‘교회 안 나가 교인’과는 거리가 먼 분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혹시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아, 교회 가기 싫다” 혹은 “다른 교회 가고 싶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습니까? 없어요? 여러분은 정말 믿음이 좋은 분들이라 없는지 모르지만 저는 있어요. 저는 목사지만 교회에서 너무 힘들고 실망할 때 이런 생각 해 본 적 있습니다. 우리 좀 솔직해 지자구요. 아마 여러분 모두가 단 한 번이라도 “교회 가기 싫다” 내지는 “다른 교회 가고 싶다” 심지어 “다른 종교로 가고 싶다, 아예 교회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위기도 없는 것처럼 지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여러분, 아프면 병원 가야 합니다. 아픈데도 꾹 참고 병원 안 가면 병이 더 커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좀 힘들고 돈 들고 잠시 아프더라도 병원 가서 진단 받고, 치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좀 아픕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고, 성도가 이렇게 많고, 기독교의 힘이 이렇게 강해 보이지만 마치 아모스 시대처럼 잘 나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자존심 상하고 아프더라도 빨리 진단 받고 고쳐야 합니다. 

한국교회 전체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아프고 힘든 교회 얼마나 많습니까? 병든 교회, 문제 있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그 안에는 병든 성도, 아픈 성도,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며 위기를 맞고 있는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아닌 척, 아무 일 없는 척 하면 병을 더 키우는 것입니다. 빨리 고쳐야 합니다.

병을 고치려면 병의 원인부터 진단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리고 우리 교회들과 성도들이 영적 위기를 겪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이 몇 가지 있습니다. 세 가지만 생각해 보지요.

첫째, 무엇보다도 우리 개인의 신앙에 가장 큰 위기가 되는 것은 신앙의 습관화, 신앙의 화석화(化石化)입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이 지치고 지겹다는 것입니다. 너무 교회 오래 다녔더니 덤덤하고 아무 감격도 기쁨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신앙생의 습관화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물론 신앙은 우리의 좋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당연히 교회 가서 예배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 등 말입니다. 하지만 이게 습관화가 되어서 어떻게 하다 보니 매일 시계추처럼 교회 왔다 갔다 하고, 예배도 봉사도 습관처럼 하게 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 너무 습관적으로 오래 되다보니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신앙의 화석화입니다.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녔는데 신앙생활에 갱신과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 주님 만났을 때의 그 기쁨과 처음 신앙생활 하던 때의 감격은 어느새 다 사라져버리고 습관과 형식만 남은, 직분만 남은 것입니다. 저 자신의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 개인적인 고통이나 시련 때문에 신앙의 위기가 닥쳐옵니다. 지난주까지 살펴본 위기가 다 여기 해당됩니다. 가정의 위기, 부부의 위기, 자녀의 위기, 재정적 위기, 건강의 위기 등 내 삶에 찾아오는 개인적인 시련이나 위기 때문에 영적으로 위기가 닥쳐오는 것이지요. “예수 믿는데 왜 이런 시련이 나한테 닥쳐 오냐?” 처음에는 기도로 믿음으로 이겨내 보려 애쓰지만 그 시련이 길어지고 점점 더 커지면 어느새 “하나님이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나 보다”를 거쳐 자칫 “예수 믿는 거 다 소용없다”는 생각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앞서 설명 드린 ‘가나안 교인’처럼 교회에 대한 실망이나 목회자, 성도에 대한 실망과 상처가 우리에게 커다란 신앙적 위기를 맞게 합니다. 이런 실망이 점점 나를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고, 급기야 교회를 옮기거나 떠나게 하기도 합니다. 의외로 이런 분들 각 교회마다 참 많습니다.

지금까지 대표적인 신앙의 위기의 원인을 살펴보았지만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이밖에도 수없이 많은 원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원인들을 다 모아보면 거의 이 세 가지 이유로 종합이 됩니다. 어떻게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가 좀 끄떡여집니까? 모르긴 몰라도 여러분 중 대부분이 이 세 가지 중에 한두 가지는 다 겪어보았을 걸요? 그래서 실망도 많이 하고, “내가 이 교회를 떠나야 되나? 이런 식으로 계속 교회 다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고민도 많이 하고, 그러다가 아예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 자체를 떠나는 사람들도 나오는 것입니다.

❚영적 위기를 극복하는 신앙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런 원인들 때문에 발생하는 영적 위기, 신앙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처럼 <신앙의 위기를 맞을 때 필요한 신앙> 몇 가지를 성경을 통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첫째, 이런 위기는 나만 겪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해마다 대입수능을 보고 나면 수석을 차지한 학생이 인터뷰를 할 때 꼭 이런 말을 합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자기는 과외도 안 하고 학원도 다녀본 적이 없답니다. 그저 학교 수업에만 충실했을 뿐이랍니다. 너무 약 오릅니다. 어떻게 공부가 제일 쉬울 수 있어요? 잘 났어 정말... 우리는 이처럼 나와 너무 동떨어진 말을 들을 때 절망하게 됩니다. 너무 잘 난 사람 보면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기에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 때 인용한 야고보서 5:17에 엘리야 선지자가 간절히 기도하니까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고 다시 기도하니 비가 왔다고 했지요? 만약 이 말씀만 본다면 우리에게 전혀 소망이나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엘리야 참 잘났어, 도대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하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북 왕국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은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 후원하던 바알 선지자 450명이 엘리야에게 갈멜산에서 KO패하고 몰살당했다는 보고를 듣자 분노에 치를 떨며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 호언장담 합니다. 내일 이맘때까지 내가 반드시 엘리야를 네가 죽인 바알 선지자들처럼 죽이겠다고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엘리야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엘리야쯤 되면 이 정도 위협에 절대 굴하지 않을 것 같지요? 아닙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엘리야는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칩니다(3절). 이스르엘에서 220km정도나 떨어진 유다의 브엘세바까지 도망갑니다. 정말 실망입니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엘리야가 어떻게 합니까? 4절 읽읍시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자기 혼자 광야 깊숙이 이세벨이 못 따라올 곳까지 도망합니다. 도망가다 지쳐 광야의 로뎀 나무 그늘 아래 털썩 주저앉아 한다는 소리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입니다. ‘넉넉하다’는 말은 이만하면 됐다,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만큼 나를 괴롭혔으면 됐으니 이제 그만 나를 죽여 달라? 이게 어디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가 입에 담을 소리입니까? 도대체 왜 엘리야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을까요? 그것은 갈멜산에서 850:1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그토록 대단한 일, 큰일을 하고 나서 탈진한 데다, 이세벨 왕비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호언장담하니 지치고 실망해 일어난 일입니다. 보세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잘 기억하세요.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엘리야도 겪었던 위기입니다. 엘리야도, 이하준목사도, 세상 모든 사람도, 예수 그렇게 잘 믿는 분들도 다 위기가 있고, 아픔이 있고, 고민이 있어요. 그러니 나만 아프다고, 나만 힘들다고 좌절하지 말고, 반대로 아프고 힘든데 아무렇지 않은 첫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저 이렇게 못난 사람입니다. 저 이것밖에 안 됩니다. 도와주세요.” 하고 인정하세요. 그래서 엘리야가 죽여 달라고 할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지쳐 잠든 엘리야를 만져주십니다. 5절을 보세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우선 천사를 보내 지쳐 잠든 엘리야를 만져주신 후 잘 먹고 마시게 하고, 육신이 푹 쉬고 힘을 얻게 하십니다. 지친 몸과 마음, 영혼을 다 만져주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만지심은 우리를 위로하고 회복시키는 만지심입니다. 삶에 지쳐, 고통과 실패에 지쳐 낙망한 우리를 위로하고 힘주시는 만지심입니다. 특히 영적인, 신앙적인 위기의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만지심, touch를 통해 회복되고 위기를 극복할 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 하나님의 만지심을 꼭 체험하기 바랍니다.

둘째, 앞서 설명한 원인들 중에 신앙의 습관화, 신앙의 화석화가 원인이라면 처방은 이것입니다. 반드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윗은 엘리야처럼 영적으로 위기가 닥쳐오자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이 고백처럼 우리는 처음 예수 믿을 때의 기쁨과 감사, 처음 구원 받았을 때의 그 놀라운 감격을 잊고 살지 않았는지 돌아보며 그 감격과 기쁨과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감사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신앙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신앙과 영적 위기를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힘입니다. 이 주제는 다음 주일 맥추감사주일 설교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지요.

말씀 맺습니다. 지금 여러분 중에 어떤 이유로든 신앙의 위기, 영적 위기를 겪고 있는 분이 다면 꼭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신앙의 위기, 영적 위기는 지금까지 살펴본 그 어떤 위기보다 위험합니다. 가정의 위기, 물질적 위기, 건강의 위기, 그 어떤 위기보다 심각하고 위험합니다. 자칫 우리를 영원히 망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꼭 그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금 같이 단련되어 더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늘 말하지요? 우리 효자교회 오면 무조건 행복하셔야 한다고요. 여러분 모두가 예수 믿고 무조건 행복하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힘들어도 교회 오면 위로 받고 새 힘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 와서 더 상처 받고 신앙의 위기를 맞은 성도가 게십니까? 그렇다면 효자교회 와서 신앙생활 하며 세상의 모든 위기와 시련, 다른 교회에서 받은 상처와 고통까지 다 치유 받고 무조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영혼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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