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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혼자 만들 수 없는 단어, 있다 (시 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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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만들 수 없는 단어, 있다 (시 133:1-3)  

■ 시편 133편 1절 ~ 3절
(1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절)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과 관련한 노무현, 김정일 두 정상 간의 대화록 전문이 최근 전격적으로 공개되면서 정국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전문을 쭉 살펴보니 한쪽은 너무 고자세이인 반면, 한쪽은 그 반대였습니다. 지난 70여 년간 남북 사이에 얼굴을 맞대고 풀어야 할 일들이 많았음에도 그동안 마치 아무 문제도, 볼일도 없었기에 만나지 않았고, 서울에 오지 않았을 뿐이라는 억지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형제’, 혹은 ‘한 민족’이라고 자처하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중국은 머리위의 몽골과, 미국은 코밑의 쿠바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도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한, 일본과 껄끄러운 관계입니다.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은 모든 사람, 모든 국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을 열면 제일 가까운 사이부터 문제가 불거져 점점 ‘관계 뒤틀림’이 확산되어 갑니다. 부부사이(창 3장), 형제사이(창 4장), 부모와 자식사이(창 9장), 삼촌과 조카사이(창 13장)의 갈등 말입니다. 그러더니 오늘에 이르러는 한 때 형제였던 이스라엘과 아랍이 극한 대립구도를 보이면서 중동은 화약고로 변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의 관계가 제일 힘듭니까? 누구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고 있습니까? 상담을 청해 오는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힘들어할까요? 내 곁의 배우자, 형제, 자녀, 이웃, 나아가 성도 상호간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지금 나에게 절실한 것은 과연 무엇이며, 오늘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다윗의 시편 133편을 펼쳤습니다. 어떤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까요? 지난 시간, 시편 63편을 통해 사울의 칼날을 피해 광야로 도망치는 다윗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곳도 안전하지 못해 다윗은 급히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달려갔습니다(삼상 20:1). 

그때 요나단은 중심으로 다윗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살의가 여전함을 확인하자마자 다윗에게 빨리 멀리 도망치라는 메시지를 보냅니다(삼상 20:37). 그래서 다윗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실 왕의 자리에 앉을 서열 0순위였습니다. 그에게 다윗은 강력한 경쟁자, 라이벌, 정적(政敵)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합니다(삼상 18:1). 겉옷과 군복, 칼과 활과 띠까지 다윗에게 주었습니다(삼상 18:4). 사울은 요나단을 윽박질렀지만 요나단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다윗은 애가를 부르며 안타까워했습니다(삼하 1:26).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다리를 저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왕궁에 거하게 하면서 매일 함께 식사하도록 했습니다(삼하 9장). 시편 133편, 여기 ‘형제’라는 단어를 보면, 다윗이 요나단을 떠올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시인은 ‘보라’(hinne)로 시선을 끌면서 ‘형제, 연합, 동거’라는 단어를 제시하는데, 이 세 단어는 혼자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단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 ‘형제’라는 단어로 시작하여 ‘영생’이란 단어로 끝나는데 두 단어의 발음이 ‘ahim’, ‘hahim’ 거의 같습니다. 

‘기름’(shemen), ‘이슬’(tal) 역시 짝을 이루고, 3절의 ‘거기서’(shama),‘기름’(shemen)이 음성학적으로 짝을 이룹니다. 1절의 ‘선하다’, ‘아름답다’가 한 쌍을 이루고, 2절에서 ‘수염’이 두 번 반복됩니다. 3절에서는 ‘시온’(tsiyon)과 ‘명하다’(tswa)가 음성학적인 평행을 이루고, ‘복’과 ‘생명’ 한 쌍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시편 133편은 그야말로 ‘혼자 만들 수 없는 단어’의 집합체입니다. 형제, 연합, 동거란 단어로 시작하여, 문장, 행간, 문맥, 반복, 발음, 의미, 심지어 워드플레이(wordplay)까지 총동원합니다. ‘혼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웅변입니다. 폴 트루니에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결혼하는 것과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기뻐하시는데 기뻐하시는 것으로 그치십니까?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거기’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현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허락해주신 그 사람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일찍부터 터득했던 다윗은 일생동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을 살기를 힘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사울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삼상 24:5-7). 또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를 용서합니다(삼하 19:23). 이런 다윗 곁에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삼상 22:1-2). 다윗이 어떻게 왕이 되었습니까? 소년 중 한 사람이 다윗을 사울 왕에게 천거하여(삼상 16:18) 이를 계기로 왕의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요나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왕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 곁에 어떤 사람을 두셨을 때에는 그 사람을 나를 위한 ‘축복의 통로’로 두셨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힘쓰십시오. 특별히 내 곁에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나와 연결되었을 때 그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약한 자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 25:40). 

내 곁의 약한 자와 함께 하는 것은 곧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므로 주님께서 그러한 자를 도와주십니다. 주님의 은총을 입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문제로 힘들어 하십니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나아만은 곁에 있는 조그마한 계집종을 통하여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셔서 오늘도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목자로 삼으셔서 그를 통하여 인도하시고, 복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형제와의 관계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관계가 뒤틀리는 것은 혈관이 막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의 통로로 그 사람을 내 곁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 내 곁에 그 사람을 붙여 주셨다고 믿으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의 현장을 만들고, 하나님께서 거기에 내려주시는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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