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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인자하심이 영원한 주께 감사하라! (시 136: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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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하심이 영원한 주께 감사하라! (시 136:21-26)


옛날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편작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의사가 있었는데 그가 얼마나 유명한지 죽은 사람도 살렸다고 합니다.  흔히 인도의 기파라는 사람과 함께 명의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에게는 못 고칠 질병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에 관한 소문은 소문으로 자자하게 전국으로 퍼지는 가운데 드디어 왕이 그 사람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두 분의 형님이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가 유명한 의사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난히 세 번째인 이 편작이라는 사람이 더 유명하게 소문이 났습니다.

왕이 신하를 시켜서 그 셋째 막내를 불렀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자네가 편작인가?"  "예, 임금님, 그렇습니다."
"자네가 죽은 자도 살린다는 그 유명한 의사인가?  이리 가까이 오게!  그래, 자네 형제들도 다 의사라면서?"
"예 그렇습니다.  큰 형님도 작은 형님도 다 의사인데 사실은 그분들이 아주 훌륭한 분들입니다."

편작의 이 말에 임금님이 깜짝 놀라며 손을 꽉 잡더니 "아니, 내가 듣기에는 자네가 제일 훌륭하다던데 어떻게 된 것인가?  그러면  자네 형제들 중에서 자네가 보기에는 어느 형제가 제일 유명한 의사인가?"
왕의 이 물음에 편작이 대답하기를 "임금님, 정말 알고 싶으신가요?"  "그럼, 알고 싶지."
"사람들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믿지 않는데, 임금님만은 믿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편작은 왕 앞에서 정성 되게 진실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임금님, 우리 큰 형님은 이런 분입니다."
"그래, 이야기해 보게."

"큰 형님은 사람이 이렇게 들어오면 얼굴만 턱 보고도 그분이 앞으로 무슨 병이 날지, 어디가 고장이 날지를 다 알아서 그분이 고통과 고난을 당하기 전에 미리 다 고쳐줍니다.  우리 형님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아프기 전에 미리 고쳐 버리기 때문에,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 형님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감사함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형님은 별로 이름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랬구만!"

"그런데 우리 둘째 형님은 병이 미미할 때 알아봅니다.  벌써 '아! 이것이 탈이 날 것 같구나' 하면 미리 알아 가지고 고쳐줍니다.  그래서 조금 아플 때 고치기 때문에 우리 큰 형님보다는 조금 고마워 하지만 그러나 둘째 형님에게도 별로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프기도 전에, 수술하기 전에 이미 다 고쳤기 때문에 고마움도 모르고 감사함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가?"

"저는 사실은 그 경지에는 못 갑니다.  사람들이 병들고 누워있고 이미 거동을 못할 때 그때 찾아내고서 수술도 해주고, 아주 독한 약도 쓰고, 아주 힘든 때 고쳐 놓습니다.  그랬더니 미련한 사람들이 아프고 고통을 당하고 쓰러지고 난 다음에 다 망가진 후에서야 고친 사람인 내가 최고인 줄 아는데, 사실은 저는 정말 의사라면 그분들이 고통을 당하기 전에, 쓰러지기 전에, 넘어지기 전에 미리 고쳐야 진짜 명의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서 무슨 메시지를 듣습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꼭 죽다가 살아야 감사한 것입니까?  꼭 기적을 봐야만 감사합니까?
때마다 일마다 지켜 주시고 지나온 시간 동안 나의 삶의 구석구석에서 내가 미쳐 깨닫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크고 작은 은총의 손길이 움직인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을 모르십니까?  그렇게 미련합니까?  그렇게 답답합니까?

인간의 속성이 아무리 잘못 되었다고 하지만, 일이 크게 터지고 난 후 겨우 수습되고 한 고비를 넘어야 감사할 줄을 압니다.  터지지 않게 감싸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영의 눈이 왜 열리지 않으십니까?

미련한 우리 인간은 평안할 때는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다가 꼭 무슨 일이 터지고 죽음 직전에 갔다가 살아와야만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보호해주셔서 오늘 주 앞에서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도 본문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감사하며 기쁘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하며 기쁘게 사십시오.  감사하는 얼굴에는 적이 없습니다.  감사하는 인격에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적이 많은 사람을 보면 감사의 체질이 부족합니다.  원수가 많은 사람을 보면 감사의 성품이 부족합니다.  때문에 감사가 없는 인생은 언제나 그의 삶이 모질고 거칠게 살아갑니다.  감사가 없는 가정은 언제나 다툼과 파괴만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환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을 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자기 변명에 불과한 넋두리일 뿐입니다.  결코 환경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눈을 열어 세상을 보십시오.  부유한 환경에 살아도 인생을 모질고 거칠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힘든 환경 속에서도 부드럽고 어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감사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거친 사막에 오아시스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의 남은 생애를 즐겁게 사십시오.   기쁘게 사십시오.  인생을 모질고 거칠게 살지 말고 부드럽고 어질게 사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수 있습니까?  감사하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우리는 밝은 모습으로 기뻐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 땅에는 복이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이 따르는 가정도 있고,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복이 따라오는 사람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복이 따르는 사람은 그냥 그에게 복이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와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복이 따라옵니다.  왜 물건은 진짜를 찾고, 진짜를 귀하게 여기고, 진짜를 고르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 진작 사람은 왜 그렇지를 못합니까?  왜 진짜를 멀리합니까?  왜 진짜에 눈을 돌리려고 시간을 안 씁니까?  왜 자신을 진짜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왜 인생에서 진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두 번째, 인생을 가슴 설레며 사는 사람에게 복이 따라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일어난 것이 가슴 설레지 않습니까?  어느 날인가 저 흙에 들어가서 다 썩어져야 할 몸인데, 아침에 일어나 햇살을 받으며 은혜 가운데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살아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되는 데로 막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 좋게 살아야 됩니다.  기쁘게 살아야 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일은 그리 오래 설렘이 지속될 수 없지만, 진짜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가슴에 설렘이 있습니다.  그냥 기쁩니다.  그냥 감사합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바라보는 이 세상은 즐거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참된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알고 그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바라보시면서 하신 첫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가지셨던 첫 반응은 설렘이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그 심령 속에 가득한 자는 설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그 속에 흥분과 전율이 일어나면서 인생을 기쁨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속으로 대답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그 인생에 가슴이 설레 본적이 있습니까?  흥분과 전율이 일어나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자신을 정복하는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들을 보십시오.  저 새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새들은 짹짹짹! 그냥 노래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어나면서 왜 독을 쓰고 일어납니까?  왜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일어납니까?  이것은 참새만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매일 매 시간을 아무쪼록 가슴 설레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아무리 저 영원한 천국이 좋다고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한 번 밖에 살지 못합니다.  또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해서 일생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이 몸이 지난밤을 보내고 이 아침에 일어나 이렇게 숨을 쉬며 우주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감사할 일이 아닌가요?

세 번째, 복이 따르는 사람은 저들이 늘 밝은 인상으로 즐겁게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즐겁게 감사하며 사는 사람에게 하늘의 복이 따라옵니다.  여러분은 그냥 듣지만 이 세 가지 공식만 잘 갖고 있으면 틀림없이 복이 따라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사는 인생에 투자하십시오.  즐겁게 사는 인생에 투자하십시오.  감사하게 사는 인생에 투자하십시오.  이 말은 결국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늘 기쁘고 감사한 가운데 즐겁게 사는 인생이 되라는 말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 입에서 감사를 끝내지 말고, 어디 가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계속해서 감사의 기도를 많이 하면 하늘의 복이 따라올 것입니다.

무리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모입니다.  참새는 참새끼리 모입니다.  아이들도 가만히 보면 떠드는 아이들은 떠드는 아이들끼리 모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이기적인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속된 말로 놈팽이들은 놈팽이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신실한 사람은 신실한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이것이 소위 무리의 법칙, 떼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복이 따르지 않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복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끼리 다닙니다.  이들은 전부 불평과 원망 투성이인 그런 사람들끼리 몰려다닙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자기들도 알고 있습니다.  만나고 헤어지면서 내가 다시는 저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그 무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무리의 법칙입니다.

지금 만일 하는 일이 안되고 복이 따르지 않고 내 인생이 평안하지 않거든 오늘 감사주일에 자기를 뜯어고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무리로부터 뛰쳐나오십시오.  감사하고 즐겁고 환하고 밝은 그런 인상을 가지고 인생을 기쁘게 사는 사람들과 빨리 합하십시오.  무리의 법칙을 따라가야 됩니다.  흙탕물에 들어가면 똑같이 흙탕물이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과 어울리면 있던 믿음도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이 있는 사람은 늘 진짜를 찾아 헤매고 자신을 진짜로 만들려고 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늘 삶에 가슴 설레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밝은 인상을 가지고 인생을 즐겁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옆에 있는 분들하고 이렇게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밝은 인상으로 감사하며 사십시다.  얼굴 펴고 즐겁게 사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옛 속담에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웃으면 봐 줄 수가 있지만, 아무리 기분 좋아도 찡그린 얼굴은 못 봐줍니다.  얼굴이 못 생겨도 봐 줄 수가 있지만 화난 얼굴은 못 봐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얼굴이 잘 생겼느냐 못 생겼느냐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이 밝으냐 어두우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을 밝게 하고 사십시오.  얼굴이 밝아지면 복이 옵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나도 누구처럼 저렇게 살면 얼굴도 밝아지고 기쁘게 살겠다"고 투정 아닌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소위 잘 사는 회장님, 사장님의 사모님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서 "사모님"이라고 부르지만 그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남편들이 검찰에 불려가고,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하고, 제비족보다 더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바라보는 소위 그 잘난 "사모님"들의 타 들어가는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환경이 어떠하면 나도 기쁘고 행복할 것이다!  그것은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에게 던지는 사단의 유혹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좋아서 기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예수를 모시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행복하고 기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더 기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히십시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부족하지만, 내 욕심에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감사가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감사가 행복을 낳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인품의 정상이 어디일까요?  감사의 체질입니다.  감사의 인품입니다.  감사의 인격입니다.  감사의 언어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감사하면 하나님 안에서 만사가 형통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 가운데에도 살아 계신 하나님만 붙들고 감사하는 분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고귀한 열매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감사하는 그 인품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기독교인들 가운데 제일 정상의 인품에 이르렀던 사람이라고 하면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냄새나는 그 캄캄한 옥중에서도 바깥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범사 에 감사하십시오!  다시 말하고 다시 말하노니 감사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이 이루어져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의 손길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감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제일 크고 정확한 명령이 무엇일까요?  너는 감사하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인격이 되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체질이 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라는 동네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열 명의 나병환자가 몰려왔습니다.  이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 사람들은 나병은 하늘이 내린 저주의 병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병은 그 병을 옮기는 전염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동네 밖으로 쫓겨났을 뿐 아니라 나병환자들끼리도 서로를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한 명도 아니고, 무려 열 명의 나병환자가 떼거지로 몰려왔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이 없는 사람들, 얼굴이 뭉개진 사람들, 손이 비틀어지고 코도 없는 사람들이 온 몸에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면서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모들이 버렸습니다.  형제들이 버렸습니다.  시대가 버렸고, 나라가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저들은 지금 탄식과 애원과 생명을 건 간청을 주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열 명의 나병환자를 보는 순간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아주 단순하게 처방을 합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이 한 말씀을 붙잡고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도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이 한 말씀을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예배를 드리고 가지 말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한 마디를 붙들고 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병에 걸린 저들의 행렬!  제대로 걸음을 걷지도 못하고, 어떤 사람은 몽땅 손으로 기기도 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절뚝거리며 갔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겨우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갔을 겁니다.  그러나 비록 정상적으로 가지는 못했지만 주님의 그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그 말씀에 마지막 소망을 걸고 가던 가운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예배를 드릴 때 늘 이런 믿음이 옵니다.  만일 이 주간에 우리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한 마디에 소망을 붙들고 세상을 향해 나간다면 우리에게도 분명히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내 말씀이다"라고 그 말씀을 붙들고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적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주님이 하신 그 한 마디의 말씀을 붙들고, 거기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소망 가운데 걸어갔습니다.  걸어갔더니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의 일입니다.  그들 열 명은 모두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감사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 상처 났던 몸을 숙여서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로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것은 기적의 주인공이 아니라 감사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아니, 기적의 주인공이 되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주인공은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만은 틀림없이 계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공식 자체를 부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일 섭섭해하시는 장면이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 감사하러 온 그 한 사람을 보면서 아홉을 찾고 있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것이 지금 주님의 심정입니다.  이 아홉이 바로 오늘 이 시대의 현대인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제일 답답한 실수, 감사를 모르는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감사라는 것을 잃어버린 병든 인격에 대한 무서운 고발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무서운 정신적 질환은 바로 감사가 없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깨닫고 나면 감사와 감격으로만 살아도 모자라는 세상입니다.  사실 무엇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대단한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오늘 이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일 아침을 맞이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영원한 시간이 아닙니다.  아주 지극히 짧은 시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즐거워하며 사십시오.  우리가 그렇게만 살아도 다 못 살고 갈 세상입니다.  모든 불행은 불평과 원망에서 시작됩니다.  반대로 모든 행복도 감사와 감격에서 시작됩니다.

지난 시간에 제 친구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카톡을 받았습니다.
남친과 남편의 차이!
남친일 땐 내 편만 들더니, 남편 되니 남의 편만 드네.
남친일 땐 자기 앞에서만 울라더니, 남편 되니 저 앞에서 질질 짜지 말라네.
남친일 땐 펜을 꾹꾹 눌러 손 편지도 잘 써주더니, 남편 되니 펜을 꾹꾹 눌러 카드 전표에 사인만 해대네.
남친일 땐 나 하나밖에 모르더니, 남편 되니 소파·리모컨·TV 3종 세트와 사랑에 빠졌네.

이 카톡을 울산의 어느 목사님께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 후에 이런 답신이 왔습니다.
"나쁜 남편일세....  그대는 영원한 남친되게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내 인격과 삶의 체질에서 불평과 원망을 뽑아 버리십시오.  그것은 탐욕에 눈먼 인간들에게 사탄의 주는 독버섯입니다.  나를 비천한 길에서 건지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일용할 식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불평하고 원망함으로써 사탄의 권세에 넘어가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기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내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무엇보다 내 옆에서 함께 살아준 내 남편, 내 아내에게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남친, 영원한 여친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가 영원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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