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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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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 5:1-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1-3)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 독자를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구약 예언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 예수님이 세우실 왕국, 즉 천국을 강조합니다.  유대인들은 지상에 이루어질 유대인 왕국을 메시아 왕국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천국은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질 하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단 4회 사용한 반면, “천국”이란 단어는 33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왕국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지상 왕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늘나라(천국 : hJ basileiva tw'n oujranw'n., kingdom of heaven)입니다.  팔복은 바로 그 천국에서 성도들이 누릴 축복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다섯 가지 교훈집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산상수훈(5장-7장)입니다.  둘째는 제자 파송의 교훈(10장)입니다.  셋째는 천국 비유(13장)입니다.  넷째는 용서의 교훈(18장)입니다.  다섯째는 종말론적 교훈(23장-25장)입니다.  앞으로 여러 주간에 걸쳐서 이러한 특별한 주제들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부터는 그 첫 번째인 산상수훈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수훈, 혹은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말은 산인데 실제는 가버나움 근처의 언덕입니다.  갈릴리 호수 부근은 해수면 아래로 400미터나 되는 낮은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이 호수 주변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청중들을 앉혀 놓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산상수훈 내용이 한 번에 하신 설교인지, 여러 차례 하신 설교를 모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후 공생애 초기에 하신 설교로 봅니다.  
  
산상수훈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인간 윤리의 최고봉”, “천국의 대헌장”과 같은 수사(修辭)를 붙입니다.  내용을 보면 천국 시민의 복, 천국 시민의 계명 실행, 기도, 구제, 물질생활, 관용, 진실, 분별력, 실천과 같은 주제들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핵심은 결코 윤리적 내용이 아닙니다.  신앙과 복음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대인관계가 주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입니다.  
  
산상수훈은 팔복으로 시작합니다.  팔복이란 여덟 가지 복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목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 자녀, 천국 백성이라면 당연히 누릴 가장 큰 복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이 복을 충만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듣는 사람들에게 별 반응이나 감동이 없습니다.  어!  이게 무슨 복이야?  복이라고 하면 五福 아닙니까?  壽富康寧攸好德考終命(수 부 강령 유호덕 고종명)이 아닌가?  장수하고, 부자 되고, 평안하고, 도덕을 낙으로 삼고, 명대로 살고 죽는 것!  제법 그럴싸하지만 오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오복은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오복과 팔복은 전혀 방향이 다릅니다.  오복은 육체 위주인데, 팔복은 영혼이 위주입니다.  오복은 물질이 위주인데, 팔복은 영적 은사가 위주입니다.  오복은 현세 위주인데, 팔복은 내세가 위주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오복은 구원 없는 복인데, 팔복은 구원을 필수로 하는 복입니다.  오복은 세상 사람들이 간혹 누리는 복인데, 팔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 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복입니다.  오복 좋아하지 마시고, 팔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팔복에 대한 구원론적 해석

팔복은 산상수훈의 핵심이요 으뜸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해석하면서 윤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윤리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요, 행위적인 규범입니다.  즉, 대인 관계를 맺는 규칙입니다.  산상수훈은 결코 대인관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즉 신앙이 근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의 핵심이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에는 구원의 복음이 없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의 시작, 팔복 자체가 벌써 복음을 근거로 합니다.  팔복은 하나님 자녀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 자녀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주석가 박윤선 박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석합니다.  팔복의 전반부 네 가지를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도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이것은 구원을 갈망하는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심령 가난이란,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보여드릴 것이 없는 빈곤 상태를 말합니다.  빈 깡통 같은 내 자신입니다.  

애통하는 것은 억울해서 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감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사람 앞에 온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정의란 무엇이냐고 묻는 마이클 샌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어디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는지 갈망하는 모습입니다.  
  
팔복의 후반부 네 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란,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을 받은 것에 감격하여,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예수님을 믿고 속죄를 받아, 깨끗하게 된 사람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사람이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으로, 타인을 그 화목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란,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주를 위해 죄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팔복은 인간적인 윤리로 얻는 복이 아닙니다.  복음에 기초한 구원 받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복 된 사람도 구원 받은 사람의 복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잠깐의 복과 영원한 복, 사라질 복과 지속되는 복, 육체적 감각적인 복과 영혼 내면의 복, 마약과 같은 마취성의 복과 끝없이 솟아나는 기쁨의 복, 임시적 가치의 복와 영원 가치의 복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복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윤리의 실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는다고 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내게 진노하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채로, 잘 되겠다고 발버둥치는 윤리가 과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팔복은 진정한 행복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해결하세요.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으세요.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로움을 얻으려고 애통하고 목말라 하세요.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찾으세요.  그래서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첫 번째 복은 심령 가난의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  “Makavrioi oiJ ptwcoi; tw'/ pneuvmati o{ti aujtw'n ejstin hJ basileiva tw'n oujranw'n”
  
첫 번째로 강조할 것은 심령입니다.  심령(tw'/ pneuvmati)!  마음, 영혼!  복을 누리는 주체는 심령입니다.  육체가 아닙니다.  복을 느끼고, 깨닫고,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장본인은 육체가 아니라 심령입니다.  
  
현대인들은 심령은 약하고 육체는 강합니다.  요즘 강력 범죄가 빈번합니다.  살인, 강도, 강간.  이런 범죄자들을 보면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입니다.  겉보기에는 강한 것 같지만, 유혹에 약하고, 결심이 약하고, 의지가 약합니다.  오래 전 일인데, 개를 좋아하는 집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사님은 개를 잘 길러서 전국투견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집사님 집을 방문했을 때, 개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진돗개이고, 한 마리는 똥개라고 합니다.  한 놈은 내가 집에 들어갈 때부터 숨이 넘어갈 듯이 짖어댑니다.  한 놈은 힐끗 쳐다보고 잠잠합니다.  아하, 저 짖어대는 놈이 진돗개구나!  나중에 보니 잠잠한 놈이 진돗개입니다.  겁이 많은 개일수록 짖는다고 합니다.  강한 놈은 짖지 않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영혼이 강한 사람은 겉으로 요란을 떨지 않습니다.  치장하지 않고, 가진 것 자랑하지 않고, 힘 자랑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심령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오늘 정말 복된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삶의 환경이나 조건을 따지지 말고, 우선 심령부터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 심령은 어떻습니까?  심령이 건강하십니까?  심령에서 행복을 느낍니까?  만족합니까?  내 심령이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떤 것을 갖춘다 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심령의 복은 심령 가난에서 시작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심령 가난이란 게 도대체 뭡니까?  어떤 사람들은 심령 가난을 겸손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무소유자, 낮추는 자, 겸허한 자 등등.  그러나 심령 가난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심령 가난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말 거지 신세임을 통렬히 깨닫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서 거지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로움이 없는 의의 빈곤자, 의의 거지입니다.  선행과 의로움보다 죄와 불의와 악행이 더 많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사랑의 극빈자입니다.  사랑하고 관용하기보다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정죄에 빠져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거지입니다.  생명의 희열보다는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죽음, 영혼의 죽음이 나를 지배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믿음의 거지입니다.  신뢰와 확신보다는 의심과 불신앙이 지배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지혜의 거지입니다.  아는 것은 극히 작고 모르는 것은 지천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능력의 빈곤자입니다.  마귀에게 약하고, 죄에 약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영적 지식의 거지입니다.  도대체 영적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심령 가난을 통렬하게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신앙에 대한 갈망을 나타냅니다.  의의 갈망, 사랑의 갈망, 생명의 갈망, 믿음의 갈망, 지혜의 갈망, 능력의 갈망, 영적 지식의 갈망.  도대체 이 갈망을 무엇으로 채운단 말인가?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채울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찾습니다.  죄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됩니다.  구원을 갈망합니다.  마침내 속죄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심령 가난 자체가 천국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심령 가난으로 인해 구원을 갈망하고, 구원을 갈망하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에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결국 심령 가난이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 자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 가난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심령 부자가 아닌 심령 거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마침내 천국 백성이 되고, 천국의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복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했습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복,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복도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똑같은 천국이지만, 그 천국의 내용은 좀 다릅니다.  
  
본래 천국이란 크게 둘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미래적 천국이고 둘째는 현세적 천국입니다.  미래적 천국이란 장차 이 세상을 떠나서 들어갈 천국입니다.  그 실상은 요한계시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죄가 없는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는 곳,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기쁨과 생명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미래형 천국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줍니다.  현재 형편이 어려워도 견디게 합니다.  죄와 싸우게 합니다.  본향에 대한 소망 때문에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강력한 소망이 현재를 강하게 만듭니다.  
  
현세적 천국이란, 미래적 천국과 달리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누리는 천국의 축복입니다.  물론 이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래도 천국에서나 누릴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성도들은 이 땅에서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현세적 축복입니다.  
  
앞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천국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받는 천국을 말씀드렸습니다.  같은 천국이지만 그 뉘앙스가 다릅니다.  박해를 받는 자들이 받을 천국은 그들이 얻게 될 미래적이고 종말적인 천국에 방점이 있습니다.  현세에서는 박해와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축복은 현세적입니다.  그것은 주로 가난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어떤 종류의 풍성함과 풍족함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일까요?  그들은 심령이 가난합니다.  영혼 속에 빈곤이 가득합니다.  사랑의 빈곤, 기쁨의 빈곤, 소망의 빈곤, 의로움의 빈곤, 선함의 빈곤, 평안의 빈곤, 생명력의 빈곤 등등.  그러므로 그들이 받을 천국은 바로 그런 영적 빈곤함을 채워주는 영적인 풍족함 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겉으로는 달라진 게 없습니다.  외모가 그대로입니다.  가정 형편이 그대로입니다.  세상 지위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심령에는 뭔가 채워져 있습니다.  전에 없던 것들!  기쁨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삶의 의욕이 있습니다.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에 천국의 선물들이 가득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얻은 심령 천국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0)   

한 마디로 “뭔가 있는 사람!” 입니다.  보배를 가진 사람, 절대로 포위당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넘어지거나 거꾸러지지 않는 사람, 절대로 망하지 않는 사람, 생명이 넘치는 사람!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기에 정말 심령에 천국이 가득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애용어(愛用語) 가운데 하나는 “충만”입니다.  무엇이든지 차고 넘칩니다.  사랑이 충만합니다.  지혜가 충만합니다.  능력이 충만합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위로가 충만합니다.  평강이 충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뭔가 눈에 보이는 것만 구합니다.  돈이 충만하고, 재산이 충만하고, 지위가 충만하고, 명성이 충만해야만 뭔가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심령의 충만한 것들을 누립니다.  제아무리 물질이 풍요로워도, 심령에 천국 선물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그것을 얻는 길이 뭡니까?  바로 심령 가난입니다.  오늘 내 영혼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철저히 깨닫고, 주님이 주시는 천국의 것들을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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