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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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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마 5:17-20) 

예수님은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 아들로써의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처음 하신 일은 갈릴리에 거하셔서 갈릴리 사람들의 약한 것과 병든 것을 치료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먼저 하심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구약 역사에서 이방인에게 가장 먼저 수치를 당한 갈릴리 지역을 천국의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중에 가장 먼저 슬픔을 당했던 갈릴리 지방을 돌아보신 일이 예수님의 첫 사역이었습니다. 이방의 갈릴리가 흑암에 앉은 백성이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는데 큰 빛이 비치신 것입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치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왔습니다. 이렇게 따라나온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사 그의 앞으로 나아온 제자들에게 천국의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구약의 남은 자들에게 약속했던 천국이 임하였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제자들에게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이라 한 것은 소금의 짠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심으로 소금으로써 고유성을 잃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새롭게 지으시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것은 빛이 숨기우지 않고 모든 사람 앞에 비치는 것이라고 해서, 착한 행실로 사람 앞에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착한 행실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로써 갈릴리에 빛을 비치신 것을 생각하면 착한 행실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시는 사역이 빛을 비치는 것입니다. 

천국의 제자들이 빛을 비치는 것은 바로 천국의 왕이 행하신 바를 따라 행하면 그것이 착한 행실이요 사람 앞에 빛을 비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제 그리스도의 일로 나타내실 것이요, 그것은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만민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천국의 제자들은 이 주님을 따라 행함으로 만민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사명입니다. 

이러한 일은 마태복음 결론인 28장에서 잘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으셔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어떻게 제자를 삼는 것입니까?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소금으로 천국의 제자들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는 일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빛으로 천국의 제자들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주님께서 분부한 가르침과 지켜 행할 일은 모두 주님의 그리스도로써의 사역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행함으로 사망의 권세 아래 사로잡힌 자들을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구약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된 백성으로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방 땅에 사로잡혀가 이방인들에게 밟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비참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제자들이 만약 그 하나님 아들됨을 잃는다면 구약 백성들보다 더 큰 비참함을 당할 것입니다. 이방 땅에 사로잡히는 비참함이 아니라 천국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천국의 제자들이 행할 사명을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러면 천국 제자들의 사명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입니다. 천국 제자로써의 사명을 끝까지 의롭게 지켜내는 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본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5:16절에 말한 ‘착한 행실’은 오늘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와 연결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5:21-48절에 나오는 일정한 형식인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너희는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를 통해 이것을 더 자세히 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을 말한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천국 율법의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18절은 ‘완전하게 하려 함’, ‘이루리라’는 말씀을 보면 성취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고, 19-20절은 그에 따른 결과로써 판단과 심판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셔서 그것을 다 이루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율법 중 작은 계명 하나라도 준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천국 사명을 가진 제자들이 어떤 의로움을 가질 것인가를 말해 주고, 그 의로움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고 온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약에 대하여 교회사 가운데 폐하려고 했던 자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 무용론자와 율법 폐지론자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세계 2차 대전은 구약 무용론이 가져온 잘못된 신학해석 때문에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취했고 어마어마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큰 일이기는 하지만 아주 교묘하게 구약 무용론이 들어와 있는 것들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성서유니온에서 숙박업소마다 비치를 한 신약성경과 시편입니다. 그 성경책에는 구약이 없어요. 물론 좋은 뜻에서 한 일인 줄 알지만 사실 엄연한 의미에서 구약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매우 경계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여기의 ‘완전하게 하려 함’은 무엇인가 꽉꽉 눌러 담아 가득 채운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으로 사셨고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교리적 해석이 먼저 깔려 있습니다. 

‘완전하게 하려 함‘이란 단어의 뜻에는 순종이라는 의미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예수님만이 홀로 다 지켜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그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적 가르침이 먼저 깔려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이 빗나갔습니다.  

‘완전하게 하려 함’은 성취의 뜻을 가집니다. 그럼 이 성취는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중학교 3학년 졸업은 중학 생활을 가득 채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학 생활이 가득 차게 되면 그 다음에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될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중학 생활을 버리고 고등학생으로써 새로운 삶이 시작이 될 것입니다.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4학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학교를 끝내고 이제 새롭게 고등학교로 들어가게 된 것이 바로 완전케 됨의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의미로 성취를 말씀합니다.  

이러한 완전케 됨에 대하여 다시 한 번 18절에 강조하면서 반복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의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이란 말에 대하여 양용의 교수는 유대인들의 상투적인 어법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절대로 지켜져야 할 어떤 일에 대하여 맹세적인 어법을 상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 같으면 ‘천지가 개벽을 한다 해도 내가 여기서 꼼짝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보다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시내산에 자기를 계시하셨을 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말씀하신 것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심으로 땅에서 그의 나라를 처음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 그의 나라를 예루살렘 도성을 짓고 가나안 땅에서 경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지가 없어진다 하는 것은 곧 율법의 통치도 없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율법이 없으면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도 없어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고려 왕조가 없어지면 그 도성인 송도도 불타 없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와 율법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반드시 이룰 것임을 강조합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한다고 하며 모두 다 완전히 이룰 것임을 말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말씀은 역사적 성취를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통해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경영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강력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완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일에 얼마나 신실하신가를 알게 합니다. 

구약의 경륜의 완성이 없이 신약의 나라가 도래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의 통치도 구약의 완성이 없이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해석에서 이러한 역사적 성취를 나타내야만 온전한 해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약만 가지고 풀거나, 구약만 가지고 푼다면 온전한 해석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성취를 강조한 후에 20절에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앞과 뒤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연결해주는 접속사입니다. 따라서 이제 역사적 성취의 결과를 20절에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20절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인가,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의 문제를 말합니다. 이러한 판단의 기준은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행하며 가르치는 자에 달렸습니다. 곧 천국 율법을 준수하는 자가 큰 자라고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나 선지자를 완전케 하면 그것을 천국의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와 작은 자로 판단이 되니까요. 천국에서 큰 자는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준수하며 가르치는 자입니다. 

요즘 어떤 교회에 대하여 알게 되었는데 그 교회는 목회자는 성경 66권 중 40권을 알고 그것을 전달하도록 교육하고, 일반 성도들에게는 10권을 알고 전달하도록 교육합니다. 그 정도도 사실 일반 교회와 비교하면 대단한 교육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성경 66권 중 어느 한 권도 빼놓지 않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핵심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성경 66권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성경 중에 크고 작은 차이가 없습니다. 성도들의 일차적 관심은 성경을 모두 다 아는 데에 있어야 합니다. 그냥 교리적으로 구원론에 관한 것만 알면 마치 다 아는 것으로 행세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해서 자신의 신앙적 삶을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을 얻어 천당을 가는 요령만 습득을 했지, 여러 가지 상황과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가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모든 성경이 전부 여러분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전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에는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처럼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임하여 그들의 판단을 듣고 사는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각 성경의 말씀에 통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 강의에 성경해석원리나 하나님 나라의 기본에 대하여 가르친 후에 일부러 디모데서를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서신이라고 하여 제가 이 디모데서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목회서신보다 구속사의 기본 원리들을 빨리 익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또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와 같은 성경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서를 먼저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제 목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먼저 가르쳤습니다.  

즉 성경은 이처럼 각 교회의 상황과 문제에 대하여 복음의 원리를 통해 접근하고 권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과 여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야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잘 대응하고 풀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에 대한 전체적 이해가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에 대하여 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혹 어떤 성도들은 그 많은 말씀 다 배워 무엇하느냐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말씀도 다 지키기 어려운데 새로운 말씀을 배울 때마다 짐을 하나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4:20절입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히브리서 6:1-2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저는 이 일을 끝까지 감당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만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경을 남김이 없이 제가 죽을 때까지 다 교회를 위하여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수요기도회 시간에 성경 66권에 대한 개요를 전체 다 강론한 적이 있습니다. 

이단들과 성경에 대하여 싸움을 하게 될 때 우리들은 뒤로 물러서기 일쑤입니다. 그들은 여러 번 반복 훈련하고 접해본 말씀만을 제시하면서 달려들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 본문에 익숙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퇴각하고 맙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말씀 본문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능히 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으로 대하는 말씀에 대하여 혹 누군가 결석을 하게 된다면 이 말씀에 대하여 다시 알기를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장이나 지방 출타로 이 본문이 지나갔다면 돌아와서 이 말씀이 무엇인지 알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작은 본문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다 알려고 하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 ‘더 낫지 못하면’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이것이 양적인 문제인가, 질적인 문제인가로 논란이 있습니다. 이런 논란에 대하여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려 함은 중학교 4년으로 양적 증가를 의미하지 않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또 여러분에게 자주 비유를 들어 말씀드렸던 약혼과 결혼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약혼의 의와 결혼의 의는 단순히 의의 양적 팽창이 아닙니다. 약혼의 신실함과 결혼의 신실함은 차이가 큽니다. 그 차이는 양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문제에서 옵니다. 즉 약혼에다가 무엇인가 하나 플러스 시키면 결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약혼의 관계를 끝내고 결혼의 전혀 새로운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종의 의로움과 아들의 의로움을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종이 열 명에서 백 명으로 확장이 되면 아들이 되지 않습니다. 충성스러운 종을 수만 명 모아놓아도 아들 하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종을 양적으로 불려 놓는다고 하더라도 아들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열 배, 백 배로 불리더라도 천국의 율법의 의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종으로써의 의요, 천국의 율법의 의는 아들로써의 의입니다.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말씀하는 곳이 있습니다. 5:45-48절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처럼 행하는 의로운 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의 정수가 산상수훈에 있다고 말을 합니다. 천국의 완전한 율법이 산상수훈에 있다고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산상수훈은 이제 막 갈릴리의 산에서 천국을 시작하는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을 말씀하는 그 당시 최초의 역사적 배경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남은 자들이 갈릴리 사역을 통해 예수님께로 모인 무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제가 주장하는가 하면 바로 마태복음 16:21절 때문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쳤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6장 앞에서는 예수의 가르치심이 나오고 그 가르치심 끝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에게 이것을 알게 한 이는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후에 이제 그가 하실 일을 비로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 일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산상수훈에는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상수훈을 최고의 기독교적 가르침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아직 제자들에게 가르치시지 않은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 역사적 배경과 문맥에 한정시켜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도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신 것을 말씀하고 있지, 죄사함의 권세로 죽음에서 일으킨 새 생명, 부활의 생명을 주신 것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천국 사역의 시작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으로 산상수훈을 재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에 한정되었거나 제한되었던 부분들을 벗겨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산상수훈은 기독교의 최고의 가르침으로 자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하는 구체적 예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가복음을 강론하면서도 수차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예는 부자청년과 베드로의 경우에 잘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9:16-26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여기에 계명에 대하여 나오고, 무엇이 부족하며 온전한지에 대하여 나오며,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하여 나옵니다. 물론 마태복음 안에 여러 가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에 대하여 말을 합니다. 그 중에서도 부자청년에 대한 것이 제일 잘 알 수가 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온전하고자 할진대’라고 하시며 말씀하신 것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는 천국의 율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이 의를 행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의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도 마태복음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요한복음 3:4-5절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덧붙이시기를 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시며 전혀 새로운 출생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표현들이 성경에 나타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세례가 임했습니다. 교회에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28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서기관과 바리새임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세례를 교회는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로운 관계는 예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천국백성으로 사는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다 이루신 아들의 영이 우리 가운데 부어진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영의 출생을 입었습니다. 비로소 천국 율법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그럼 이 백성은 어떻게 의를 행할 수가 있습니까? 역시 마태복음 28장의 결론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한 의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모든 의를 이룸에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교회는 주님의 의를 따라 신실하게 지키고 이룰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계명도 버리지 않고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럼 지극히 작은 계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십계명 중에 열 번째 계명이 순위로 가장 뒤에 있으니 작은 계명인가? 저는 이 의를 행한 결과를 심판하는 본문에서 이를 말한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를 나눌 때에 판단의 결과가 이 의를 따름인가 아닌가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지극히 작은 자 중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과 지극히 작은 계명과 연결이 되는 말로 보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형제를 돌아보는 것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사역을 다 이루심은 바로 가장 비천하고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은 바로 이 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일에 끝까지 신뢰하고 지켜가는 것이 천국의 제자로써 천국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고 보잘 것이 없으며 이름이 나지 않는 모든 일에 우리는 충성하고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으로 사는 새 백성이 천국의 율법을 따라 사는 의로운 삶입니다. 이러한 신실한 백성들을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써 모세의 율법이 아닌 그 율법을 완성하신 천국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합당한 천국 백성의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면 이 의를 행하며 가르치는 온전한 삶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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