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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마음에 닿기까지 (막 9: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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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에 닿기까지 (막 9:30-37)   

『엔드 말라리아』라는 책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I know 와 I do 사이의 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알고는 있지만, 행동하지는 못하는 것을 탓하면서, 지식에서 실천까지의 거리가 가장 멀다고 지적합니다. 

그런가 하면 시인 <류시화>씨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리시케시의 강가에서 한 수행자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남인도에서 왔으며, 기차로 100 시간 이상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렇게 먼 데서 왔느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것보다 더 먼 거리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3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하는데 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머리로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만, 마음으로 사랑하기까지 평생이 걸리는 사람도 있고, 평생을 다 보내도 결국 사랑하지 못한 채로 삶을 끝내는 사람도 있음을 생각할 때, 동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평생을 다 보내도 한 사람을 가슴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임을 생각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정말 먼 거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은 그 거리를 <나와 너 사이의 거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약 3년 동안 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우리는 이를 두 가지 차원에서 달리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마음에서 제자들의 마음까지의 거리>입니다. 이 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1밀리미터도 간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의 마음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제자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마음까지의 거리>는 어떠했을까요?  제자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마음까지는 너무도 멀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에 닿지 못하고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우리의 마음을 잡아 당겨서 예수님의 마음에 닿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 우리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점점 더 가까워져서 하나처럼 되는 게 우리의 영적 목표입니다. 오늘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지방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예수님께서는 평소와는 달리 당신들의 행적을 아무도 모르게 하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요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라고 되어 있지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3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아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시간이 다가왔을 때였으므로, 방해받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십자가와 그 후에 있을 부활에 대해 말씀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는 것이었으므로, 이 중요한 문제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이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32절을 보세요.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여러분, 왜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묻지도 못했을까요? 누가복음 9장 43절을 참조해 보면 제자들의 태도가 이해가 됩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기에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했을까요? 누가복음 9장에 두 가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변화산에서 그 모습이 변화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그 모습이 변화되셨는데, 그 영광스런 모습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해 마가복음 9장 2-3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아멘. 본래 예수님의 입으신 옷은 초라한 의복이었는데, 산에서 예수님의 옷은 광채가 났습니다. 옷이 광채가 났다기보다 그 분이 광채가 난 것입니다. 이는 그 분이 빛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빛은 사람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는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는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이것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에게서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감히 묻는 것도 두려워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로서는 하나님의 위엄을 보이시는 이 위대한 분께서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을 당하신다는 것을 들었을 때 너무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 분이 어떻게 미천하고 더러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수 있는가? 영원하신 분이 어떻게 죽음을 당할 수 있는가?>, 이게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렇다보니 묻기도 두려웠습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서도, 아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냥 모르는 채로 덮어두고 지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문제를 모르는 채로 덮어두고 지나가도 되는 것일까요? 그냥 못 들은 척 해 두면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이 주제의 의미를 알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제자 학교의 마지막 관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아무리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하더라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키가 작아 담장 너머를 볼 수 없고, 담장 안의 좁은 뜰이 세상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다 보니 뜰 안의 열매를 서로 차지하려고 아웅다웅합니다. 그러나 키가 커서 담장 너머의 넓은 세상을 보는 사람은 담장 안의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큰 생각과 큰 뜻을 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빨리 자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담장 너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문제는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복음 안에 구원이 있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사람임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알아야 했습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계속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늘 예수님과 동문서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늘 예수님과 딴 생각을 하게 되고, 이것은 예수님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된 동문서답 같은 언행의 예를 보여줍니다.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33절을 보세요.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운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34절을 보세요.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게 바로 제자들의 동문서답식 언행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가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고 있으니, 그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다릅니까? 그들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의 답답한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너무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마음의 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의 마음이 그러하였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35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아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 가운데 세우시고 가르치셨습니다. 

36-37절을 읽어봅시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아멘.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너희는 서로 큰 자가 되고 싶어 하는구나! 그러나 잘 들어라! 첫째가 되고자 하면 끝이 된다. 여기 어린 아이를 보아라! 너희는 어린 아이를 무시하기 쉽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보잘것없는 어린 아이 하나라도 무시하지 않고 영접하고 사랑하면 그게 바로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정말 큰 자가 되고 싶다면 어린 아이까지도 영접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큰 자가 되고 싶으면 오히려 작은 사람이 되라! 너희가 정말 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나를 본받아라!>, 이게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오히려 끝이 되어 남을 섬기게 되지만, 반대로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남을 섬기면 존귀하게 되는 원리>를 직접 실천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발을 씻기는 것은 한 집의 여러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씻김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오히려 씻기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그 분이 씻기고 계신 발들은 어떤 발들입니까? 잠시 후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발이었습니다. 검과 몽치를 든 군인들을 데리고 와 선생님을 잡아 가게 할 배신자의 발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전혀 모른다고 부인할 바로 그 제자의 발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발을 씻기실 때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씻고자 하실 때 거부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6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다음 7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아멘!  

여러분,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선생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시는 이유를 몰랐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자신의 발만은 씻기지 못하시게 하려 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베드로만의 생각이 아니고 모든 제자들의 동일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어떨 결에 예수님께 발을 내맡기기는 했지만, 너무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 때는 그들 모두 예수님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어떻게 되었나요? 나중엔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기신 것인지, 왜 하늘 보좌에 계셔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그 분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져 오신 것인지, 왜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인지, 그 낮아짐과 죽음을 통해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총을 얻는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그 분의 제자답게 되는 것인지, 자신들도 복음을 전도할 때 어떻게 겸손하게 낮아져서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하는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이 신비스런 비밀을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은 어떻게 했나요? 그들은 예수님께 배운 대로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7-8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아멘. 

요한은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 배운 대로 행하였습니다.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과 달랐습니다. 이제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러 앉아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서 말했을 것입니다. 

<그 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하실 때, 우리가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었는가? 그 때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지. 또 그 분이 왜 우리 발을 씻기시는지, 그 때 정말 놀라지 않았나?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네. 왜 구원을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죽으셔야 하는지....우리도 남은 생애 동안 그렇게 하세......>라고 서로 격려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제자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마음까지의 거리가 좁혀져서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닿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닿기를 원합니다. 억지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맞추시도록 요구하는 일은 포기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에 닿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현재의 우리 모습을 보시고, 어떤 안타까움을 가지고 계실까에 대해 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를 향한 뜻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왜 저를 꾸짖으셨는지, 왜 제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왜 제게 이런 환경을 주시는 것인지, 제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늘 제 마음을 주님의 마음에 닿도록 힘쓰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반기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닿는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으로 살길 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우리의 매일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성찬 예식 가운데 이러한 은혜가 임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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