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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 이야기(2) : 꿈 꿀 수 없는 ‘꿈꾸는 자’ (창 37: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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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이야기(2) : 꿈 꿀 수 없는 ‘꿈꾸는 자’ (창 37:18-28)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여러 해 전 성도님들과 함께 몽골의 선교현장을 방문하던 중, 하루는 한적한 광야에서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밤하늘에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끝없는 광야를 비추고 있는지, 마치 엄청난 수의 별들이 땅으로 쏟아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주 감동적이었고,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콘크리트 벽 속에 갇혀 이 별들을 보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밤거리의 네온사인에 묻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표징을 늘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실 때도 이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아, 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좀 보아라. 너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있겠느냐? 내가 네게 약속하는데, 네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만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밤마다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그 약속을 기다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군요. 이것이 제 꿈이군요.’ 

지난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지금은 희미하게 남아있거나 혹은 잊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던 그 약속들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셔야 우리 신앙은 앞을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매일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셨던 약속을 잊지 않으려 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에 그의 꿈이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꿈은 무슨 꿈이요, 별로 꿈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당신은 인생에 불평이나 불만도 없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어떻게 인생에 불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불평이란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불만이 있다는 것은 바꿔보기를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불평과 불만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꿀 수 있는 기초가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불평과 불만을 하나님께서 주신 꿈으로 승화할 수는 없을까요? 이것을 위해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꿈을 다시금 하나님 앞에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확인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꿈을 가진 자는 삶이 기대됩니다. 삶이 즐겁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하지만 꿈이 없는 자는 삶이 지루합니다.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도 그저 쳇바퀴처럼 흘러가겠지 생각하며 체념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꿈을 꾸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꿈을 꾼다고 해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가진 꿈과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의 현실은 격차가 크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꿈을 실현해야 될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꿈이 그저 일장춘몽처럼 사라져 버릴 꿈은 아닐지 마음속에 괴로움이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꾸는 꿈이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아니면 내가 가진 욕망과 야망에 불과한 것인지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것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다를 수도 있고, 일치할 수도 있습니다. 꿈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늠해보는 시간이 바로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내 삶에서 어떻게 이루어질지 기대하며 살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소원이 있다는 것이고 바라볼 방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만약 내가 지금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일종의 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원이 없고,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의미이며, 바라볼 목표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래도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가르치시며, 꿈을 허락해 주십니다. 큰 꿈도 있을 것이고 작은 꿈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작은 꿈도 소중히 생각하며 주님과 함께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형들에게 분노를 심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아주 미워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아버지가 요셉만을 편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들의 마음이 거슬렸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요셉이 꾼 꿈입니다. 요셉이 꾼 꿈을 듣자마자 형들에게는 더 큰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꾼 꿈의 내용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삶의 소재들을 담아 놓은 꿈이었습니다. 첫 번째 꿈은, 형들로 상징되는 형들이 모아둔 곡식의 단들이 요셉이 모아놓은 단 앞에 나와 머리를 숙이고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상징되는 해와 달, 형들로 상징되는 별들이 요셉을 향해서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둘 다 해몽이 필요 없는 꿈으로, 언젠가는 요셉이 형들을 다스리게 되고, 그들 앞에서 큰 소리를 치게 된다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두 꿈을 꾸고 나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뽐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와서 자신이 꾼 꿈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잘 안 나와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힌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지시사로, ‘좀 들어보아요.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이 표현을 여러 번 반복하며 이야기합니다. 

형들이 화를 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모든 사람들이 내 앞에 나와서 절을 했다’고 말했다면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저, 미친놈 봐라. 허깨비 같은 꿈을 꾸었네, 별 소리를 다하는군.’ 하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닌 형들이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향해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셉은 비슷한 내용의 꿈을 두 번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꿈의 내용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41장 32절을 보면 바로가 연속해서 두 번의 꿈을 꾸었을 때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마찬가지로 요셉의 꿈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형들은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감정이 흥분된 상태였기에 두 꿈의 차이를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첫 번째 꿈과 두 번째 꿈이 다릅니다. 두 번째 꿈은 아버지, 어머니, 형들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처럼 높은 곳에서 영광스럽게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지위가 높아지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에게는 그것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동생인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것 때문에 다른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의 꿈을 듣고 나서 그를 꾸짖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창세기 37:11) 

아들이 잘난 것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뿐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형제들은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잘났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아버지들은 화가 나십니까? 만약 화를 내는 아버지라면, 무언가 정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야곱도 아들의 꿈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들 요셉을 움직이고 계신다는 기대를 갖게 된 것입니다. 

꿈은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꿈을 꾼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합니다. 꿈을 꾸는 자에게는 어려움이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꿈이란 삶을 역전시키는 강력한 힘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기존 질서를 깨뜨리겠다는 강력한 결심이자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꿈을 꾸게 되면 지금의 삶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만약 꿈을 꾸면서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한다면, 꿈을 꾸면서 대가를 치루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가짜 꿈입니다. 헛된 꿈입니다. 꿈을 간직하는 한, 지금 있는 자리에서부터 무엇인가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꿈이란 그런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변화시키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가슴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을 꾸기 시작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삶이 변화되는 힘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고 변화시키는 꿈을 꾼 요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자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세기 37:19) 

‘꿈꾸는 자’라고 멋있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꿈쟁이’라는 의미입니다. 형들은 지금, ‘꿈만 꾸지 현실은 빈 깡통’이라고 요셉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저 형편없는 꿈, 내가 짓밟아 버리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저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요셉이 형이 되고, 자신들이 동생이 되는 것이니 그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현재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받아줄 수 없다는 형들의 마음이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자기들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마음을 정했습니까?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세기 37:20) 

요셉을 죽이면 그가 꾼 꿈도 같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넣자고 작정을 하게 됩니다. 

꿈을 꾸면 때로는 반대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꿈이 크면 클수록, 높으면 높을수록 반대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꿈이란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그렇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고 있는데, 형들은 꿈이 없습니다. 그러니 꿈꾸는 자를 그대로 놔둘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진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꿈을 좌절시키는 사람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가까이에 있는 어머니나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시샘하는 친구나 형제일 수 있습니다. 가깝게 여겼던 사람들이 꿈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그를 훈련시키십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마저 요셉이 꾼 꿈을 포기하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시기 때문입니다. 구덩이에 빠졌다가 애굽의 종으로 끌려 갈 때까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 37장은 첫 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하나님이란 표현이 없습니다. 그저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덩이란, 20m 이상 되는 깊이의 물 없는 우물이었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선지자 요나가 바다에 빠져 큰 물고기의 배 속에 들어간 것과도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다가 무덤 속에 갇힌 것과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요셉이 하게 된 것입니다. 

형제들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손으로 죽이지는 말자. 피를 흘리지는 말자.”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애굽에 종으로 파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은 20을 받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넘기게 됩니다. 이렇게 요셉은 자유가 상실된 노예의 자리, 인간의 꿈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곳, 바로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바닥을 내려치면 탄력과 탄성에 의해서 다시 솟구쳐야 되는데, 요셉에게 그 바닥은 끝이 없는 바닥이었습니다. 심연의 바닥이었습니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바닥이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본문을 하나하나 읽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꿈꾸는 자’ 요셉을 광야 학교에서 훈련시키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혹독하고 잔인한 훈련으로 보이지만, 이 훈련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는 무슨 훈련을 받았을까요? 첫 번째 훈련은, 이별 훈련이었습니다. 그동안 안전판으로 여겼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뿌리째 흔드셨습니다. 자신을 그렇게도 사랑하는 아버지와 갑작스런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든든하던 후원자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랑도, 배려도, 따뜻한 말 한 마디도, 심지어 자유도 없는 종의 자리에 내려가서야 그는 배우기 시작합니다. ‘아, 인생이란 헛된 안전판을 의지해서는 안 되는구나. 인생이란 홀로 가는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성숙된 신앙의 자리에 들어설 때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옆에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 있어도, 내 모든 것을 쏟아놓을 수 있는 자식이 있어도 결국 인생은 홀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부모보다, 남편이나 아내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된 남자들에게 언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물으면 대답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 시험을 꼭 합격해야 했는데, 불합격했습니다. 그로 인해 인생의 모든 것이 다 깨졌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망해서 아무것도 붙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 군대를 간 청년들은 엄한 훈련을 받으면서 그 동안에 감춰졌던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 이것을 잘 이겨나가게 하옵소서.!” 

이처럼 철저히 혼자되는 것, 이것이 요셉이 받은 두 번째 훈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별 훈련을 하며 홀로 있는 그 자리에 요셉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요셉이 깨달은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야곱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내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일 뿐이지 자신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3인칭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별 훈련을 통해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순간, 2인칭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1인칭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의 모든 것이 단절되어 오직 하나님만 붙잡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때,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앙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불평과 원망을 모두 내려놓게 만들었습니다. 꿈보다 그 꿈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구덩이는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축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이 없는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좋은 선물을 받았을 때, “아빠, 사랑해요. 엄마 좋아요!”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선물이 없는 자리에서도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면서 “아빠, 엄마 사랑해요.” 라고 할 때, 부모인 우리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저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는 분들이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모릅니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축복을 받았는데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 부복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 저들을 더 축복해 주세요. 저들에게 더 큰 은사와 선물을 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요셉은 이 홀로 된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꿈의 내용보다 더 큰 꿈을 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요셉을 이 자리에 내려놓으신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지도자로 키우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교만 덩어리였습니다. 남이 힘든 것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얘야, 이웃이 고통 받는 것, 이웃이 슬퍼하고 탄식하는 것을 배워라. 그래서 이웃이 힘들 때 네가 어떻게 다가가야 되는지 깨달아라.’ 하나님은 요셉이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덩이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어떤 아픔이 있을까요? 우리의 미래가 무엇으로 막혀 있을까요?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안전판을 놓으십시오. 내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요셉은 이 놀라운 사실을 구덩이에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에서 구덩이를 경험하게 되면, 바로 지금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실 때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내게 주시는 은사와 축복이 많다고 여겨진다면,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용기를 얻으시고, 오직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한걸음씩 앞을 향해 내딛는 믿음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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