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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리꽃처럼 피다 (호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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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꽃처럼 피다 (호 14:1-9)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네가 지은 죄가 너를 걸어 거꾸러뜨렸지만, 너희는 말씀을 받들고 주님께로 돌아와서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수송아지를 드리는 대신에 우리가 입술을 열어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다시는 앗시리아에게 우리를 살려 달라고 호소하지 않겠습니다. 군마를 의지하지도 않겠습니다. 다시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고백하지도 않겠습니다.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들의 반역하는 병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겠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이제는 다 풀렸다.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릴 것이니, 이스라엘이 나리꽃처럼 피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 나무에서 가지들이 새로 뻗고, 올리브 나무처럼 아름다워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향기롭게 될 것이다. 그들이 다시 내 그늘 밑에 살면서,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거둘 것이다. 포도나무처럼 꽃이 피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유명해질 것이다. 에브라임이 고백할 것이다. ‘나는 이제 우상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응답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 주마.’ 나는 무성한 잣나무와 같으니, 너는 필요한 생명의 열매를 나에게서 언제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여기에 쓴 것을 깨달아라. 총명한 사람은 이것을 마음에 새겨라. 주님의 길은 올바르다. 의로운 백성은 그 길을 따라 살아가지만 죄인은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이다.]

• 돌아오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7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많은 교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일종의 초여름에 지키는 추수감사절기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간 어느 분이 ‘맥추감사주일’이라는 말을 듣고 혼자 웃더랍니다. 맥추라는 말을 그분은 맥주로 들었고, 교회가 맥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를 다 지키는구나 싶었던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익숙한 대로 보고, 듣고, 느끼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맥추감사주일을 지키지는 않습니다만, 한 해의 절반을 감사의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감사 절기는 지난 날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 동안 함께 해주실 하나님의 은혜에 미리 감사하는 데 그 뜻이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호세아를 통해 전해진 ‘돌아오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물론 그 부름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돌아오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 앞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로 숨은 이래,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는 인간과 그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사이의 숨바꼭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달아나기에 급급한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돌아오라’고 권고하십니다.

신학교 시절 여주에 있는 한 교회의 여름성경학교를 돕기 위해 간 적이 있습니다. 동기생의 아버님이 시무하시던 교회였습니다. 친구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가족은 모이기만 하면 풍금을 치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거의 날마다 부른 찬송가는 ‘돌아와 돌아와 집을 나간 이여’, ‘어서 돌아오소, 어서 돌아만 오오’였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불러 짐짓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너희 가족들이 즐겨 부르는 저 찬송가는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 너를 위한 간구임이 분명하니, 이제는 돌이킬 때가 된 것 같다". 친구는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깔깔 거리며 웃었습니다.

타락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이라면 회개란 하나님을 향한 돌아섬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던 백성들의 처지를 죄에 의해 거꾸러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삶이 곤핍해진다는 것입니다. 낭패狼狽라는 단어를 아시지요? ‘일이 실패로 돌아가 매우 딱하게 됨’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전을 찾아보면 낭과 패가 모두 이리를 일컫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낭과 패는 꼬리가 길어서 내달리다가 제 꼬리를 밟고 넘어지는 짐승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등진 사람이야말로 ‘낭’과 ‘패’가 아닌가 싶습니다.

• 그릇된 의존에서 벗어나기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호세아는 말씀을 받드는 것이야말로 돌아감의 첫 단계라고 말합니다. 타락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욕망을 거스를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듣는 순간 더 이상 ‘나 좋을 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가끔 부모의 쓴 소리에 귀를 막는 것도 모자라 도리질해 떨쳐버리려 합니다. 이게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맞추어 우리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과의 관계를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결決’은 정한다는 뜻도 있고 끊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단斷’도 끊는다는 뜻입니다. 매섭게 끊지 않고는 하나님의 마음에 잇댈 수 없습니다. 호세아는 그 백성이 끊어야 할 것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앗시리아라는 외세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군마’로 상징되는 힘의 숭상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군마’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힘 있는 사람 혹은 나라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힘이 곧 정의라는 말을 마음으로는 부인하면서도 삶으로는 인정합니다. 미국이 우리 공관에 도청장치를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도 우리는 항의하지도 않습니다. 국가 기관이 불법을 저지르고, 정파적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해도 별로 분노하지 않습니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 너머에 있다고 믿거나, 아무리 소리 질러 보아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비관주의 때문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백성들이 버려야 할 두 번째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셔야 할 자리에 대신 들어앉은 일체의 것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상은 사람들에게 풍요와 평안을 약속합니다. 우상은 하나님처럼 ‘과도한 욕망을 내려놓고 이웃들과 공생하는 삶을 추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윤리적 삶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상은 어느 시대이든 인기가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현대 사회의 우상은 출세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에는 하나님이 머무실 자리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설 자리는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우상 앞에 절을 하는 까닭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내면에 찾아드는 불안을 지우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것들에 집착합니다. 돈, 술, 섹스, 게임, 명품….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에 중독中毒된 채 살아갑니다. 모든 중독은 영적으로 뒤틀린 상태이고, 작은 우상 숭배입니다. 참 평화는 외세에 의존하거나 우상을 숭배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이 참 평화의 시작입니다.

• 선재적 은총

호세아는 하나님을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이야기하는 일종의 제유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회의 주변인들, 그러니까 주류 사회에 의해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의 처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율법 전체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으로 요약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이들에게 무관심합니다. 

그들과 연루되기를 꺼립니다. 연루되는 순간 일상의 평온이 깨지고, 불편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공포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그런 이들 사이로 나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을 외면하면서 하나님께 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아무리 찬송을 불러 보아도, 철야기도와 금식기도에 열중해도 소용 없습니다. 어거스틴 성인은 ‘진리를 피하면서 찾았다’고 고백한 바 있는 데,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설 자리가 없는 사람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상황에 내몰린 이들의 기댈 언덕이 되어주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잠언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더해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잠14:31)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웃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 주려 노력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 내면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는 것, 곧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호10:12)은 그분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호세아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의 반역하는 병을 고쳐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겠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이제는 다 풀렸다."(4)

우리는 이 말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주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마9:12)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역하는 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들을 기꺼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쳤으면서도 우리가 희망을 갖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그 사랑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가 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누릴 큰 은혜입니다.

• 믿는 자의 삶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받게 될 은총을 시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릴 것이니, 이스라엘이 나리꽃처럼 피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 나무에서 가지들이 새로 뻗고, 올리브 나무처럼 아름다워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향기롭게 될 것이다. 그들이 다시 내 그늘 밑에 살면서,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거둘 것이다. 포도나무처럼 꽃이 피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유명해질 것이다."(5-7)

이 대목의 핵심어는 ‘이슬’과 ‘그늘’입니다. 소리 없이 내려 초목에 생명을 주는 이슬처럼 하나님은 생명의 보존자이십니다. 나리꽃과 레바논의 백향목, 올리브 나무 등은 이슬이 거느리고 있는 이미지들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폭양에 지친 나그네가 쉬어갈 수 있는 넉넉한 그늘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늘을 자처하는 것들이 꽤 많습니다. 돈이 그 대표라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강대국이 보장해주는 무기의 그늘 밑에서만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요담의 우화에 나오는 가시나무 그늘도 있습니다. 그 아래 거하려는 이들은 상처투성이가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늘과는 다르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가리켜 "폭풍우를 피할 피난처이시며, 뙤약볕을 막는 그늘"(사25:4)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면서 사는 너는,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를 것"(시91:1)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살다 보면 삶의 물기가 더 빠진 듯 지칠 때도 있고, 뙤약볕 아래를 걷는 것처럼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랑을 거두신 것은 아닙니다. 16세기의 스페인 성인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이가 자람에 따라 어머니는 응석을 받아주지 않고 부드러운 애정을 감춘다. 그녀는 자기의 달콤한 젖가슴에 쓰디쓴 노회즙을 바르고 어린이가 아이 버릇을 그만두고 더 크고 더 중요한 일에 습관을 들이도록 아이를 품에서 내려놓고 제 발로 걷도록 한다."(십자가의 성 요한, <어둔 밤> 제1권 1,2)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한 우리는 무너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이슬과 그늘로 우리를 돌보시지만, 다른 순간에는 젖가슴에 노회즙(蘆薈, 백합과의 상록 다년생 식물. 아프리카 원산)을 바르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성숙의 길로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드릴 때입니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 세상을 변혁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묵은 땅을 갈아엎으면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슴에 품고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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