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 (마 2:13-23)

첨부 1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 (마 2:13-23)

시각장애의 아픔을 딛고 일어난 피아니스트

‘남 앞에선 절대 울지 않을 것이고‘식구들이나 보러 한국에 돌아오진 않겠다.’10년 전 비행기 안에서 이런 결심을 하며 미국으로 건너간 한 맹인 소녀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1959년 충북 청주의 한 마을에서 어머니 김강숙 씨의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시력 장애아로 세상에 온 한 아기.그가 바로 오은경 씨입니다.열 살이 되어 피아노를 만지기 시작할 때까지도 어머니 김강숙 씨의 한(恨)이 되었던 아이.

하지만 이런 그녀에겐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좀 별난 재주가 있었습니다.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의 음을 따라 흥얼거리곤 했고 어머니는 흔히 보아 넘길 수 있는 이 재주를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았습니다.음감이 뛰어난 딸에게 열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한 것입니다.

당시 청주맹아학교에 다니고 있던 그녀가 피아노 건반을 신기한 듯 짚어 보는 모습을 보고 나서였습니다.도레미파솔라시도,보이지 않을 텐데 용케도 그녀는 한 번도 틀리지 않고 건반을 짚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순전히 귀와 기억력, 손의 감각에 의해 배우기 시작한 그녀.녹음기나 점자 악보도 없던 시절이라 그녀는 나중에 연습하기 위해선 빠르게 머릿속에 그 악보를 통째로 암기해야 했지만, 너무도 행복했다고 회고합니다.피아노를 배우기 1년만에 충북예술제에서 정상인들을 제치고 특상을 받은 것을 비롯.청주맹아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각종 대회에서 열세 번이나 수상했고, 그중 여섯 차례 특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피아노를 잘 쳐도 맹인이 공부하기엔 역부족인 우리나라 여건에서 그녀의 음악 수업은 고등학교 졸업으로 끝을 맺어야 했습니다. 활짝 꽃피워 보지도 못하고 그 재능이 꺾일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정주여사대 주최 콩쿨에서 입상,예비고사 면제 혜택을 받긴 했지만 앞을 못 보는 그녀를 보곤 모두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고 받아주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뜻밖의 전기(轉機)가 그녀에게 다가왔습니다. 뜻을 가진 이에겐 길이 열리는 법이라던가.유학을 가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치 않아 마음을 끓이고 있던 그 앞에 국제선교회 고원용 목사가 나타난 것입니다.청주맹아학교의 교장으로부터 그녀의 얘기를 건네들은 고원용 목사가 그의 집을 찾아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그후 캘리포니아 노스리지 음대에서 2년을 공부하고 아틀란타의 에모리 음대로 전학해 그곳에서 수석 졸업을 하게 됩니다.영어를 배우는 과정도 그랬지만 미국 대학에서 시력을 요구하는 과목 외에는 보통 사람과 똑같은 학점을 이수해야 했던 그녀의 피나는 노력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영어를 배울 때 점자 교과서가 없어서 칠판에 선생님이 어떤 단어를 쓰면 옆의 학생더러 스펠링을 불러달라고 해 나중에 점자 영어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고달팠던 작업들이었고남들보다 10배의 시간이 족히 걸렸습니다.

미국에서도 그는 ‘88년 지미 카터 전(前)대통령의 초청 연주회를 비롯,독일 6개 도시 순회 연주회 및 각종 초청 연주회를 갖고, 우수한 성적과 예술적 자질을 인정받아 각종 장학금 혜택을 받았습니다.특히 영광스런 것은 그가 애머리대 최초의 캔들러 예술 장학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지도 교수인 윌리엄 랜슨교수는 자신의 제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그녀의 연주는 우아하고 표현이 풍부하며 유달리 맑습니다.그녀는 매우 뛰어난 음악가지요.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면 그녀가 맹인이라는 걸 자주 잊곤 합니다.아무리 복잡한 곡도 그녀 손에서는 너무나 쉽게 제 모양을 갖춰 빠져 나오지요.

”미국에서 ‘영혼의 음악을 빚어내는 동양의 작은 손’이라는 극찬을 듣고 있는 오은경씨.그녀는 10년만에 장애자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 이 땅을 밟았습니다.정다운 고국 땅에 입맞추며 그녀가 한 첫 번째 귀국 소감은 간단했다.“제 존재가 다른 맹인들에게 작은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맹인들이 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쟤는 특수한 재능이 있으니까 합니다’고 생각치 말고 ‘오은경이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희망을 갖게 되길 바래요.제가 잘 치면 얼마나 잘 치겠어요.”

삶의 시각을 바꾸라

신발을 만드는 회사에서 두 직원을 아프리카로 시장 조사차 파견했는데 가서 보니 원주민은 모두가 맨발이었고 두 사람은 나름대로 시장 개척 여부를 판단해서 본사로 전보를 쳤습니다.한 사람의 전보는 이러했습니다.이곳에서는 신발을 신은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음.그들은 신발이 무엇인지조차 모름. 따라서 시장 개척의 여지는 전혀 없음."또 한 사람의 전보는 달랐습니다."아프리카에서는 신발을 신은 사람이 아직 한 사람도 없음.그러므로 신발을 팔 수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함."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가능성을 발견하고 일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사람이 언제나 최종 승리자가 됩니다.우리의 시선을 부정적인 방향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 봅시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많은 일들이그 앞에 놓여질 것입니다.그러나 할 수 없다고,나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의 두 사람 중에서어떤 사람의 시각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세 종류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신체적인 결함 때문에 앞을 못보는 사람으로 우리는 그들을 시각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는 지식의 결핍 상태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예를 들어 음악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악보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또 영어권에 사는 사람이 불어는 모르는 것도 이 경우에 속합니다.세 번째는 영적인 눈이 어두운 사람을 말합니다.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거듭나야 합니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그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어떻게 이 나이에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니고데모는 어린 아기로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는 개념으로 이해한 것입니다.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너는 유대인의 선생으로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영적인 소경입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희비의 쌍곡선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은 유대인을 역시 영적인 소경이라는 사실을 통렬히 비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의 참뜻과 영적인 세계를 모른다고 지적했습니다.우리는 영적인 시각을 갖고 오늘 본문을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선 본문 말씀을 자세히 관찰해 봅시다.13절 첫 부분은 "저희가 떠난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저희는` 동방박사를 가리킵니다. 곧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서 떠나기 전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떠나기 전과 떠난 후의 분위기는 매우 다릅니다.

10절을 보면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요셉, 마리아가 출현하는데 그들은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고 보물을 바치는 정경이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슬픔이나 좌절,갈등 따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 탄생의 기쁨이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의 이러한 분위기와 `떠난 후`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다릅니다.떠난 후에 나타난 사건을 살펴봅시다. 우선 나열된 단어들만 보더라도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죽이려 하니,죽이니,죽었느니라,애통, 슬픔,애곡"등의 표현이 계속 나옵니다.그들이 떠난 후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분위기가 반전되고 말았습니다.마태복음은 사건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고 있습니다.이것은 마태복음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마다 분위기가 교차됩니다.슬픈 분위기와 기쁜 분위기가 계속 교차가 되는 것이지요.마치 우리 인생살이가 희비의 쌍곡선인 것처럼 말입니다.

1장 18절에 보면 "예수님의 나심은 이러하니라"고 시작하면서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요셉은 자기와 결혼한 여자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매우 당황하며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그런데 헤롯 왕 때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경배를 했을 때는 아주 기뻐하고 있습니다(2장1절).그러나 곧 헤롯 왕 이후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는 아주 슬퍼합니다.그러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는 분위기가 또 바뀌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2장19절).

`피하라`,`거기 있으라`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기쁨의 절정에서는 흥분하고 즐거워하지만 그것도 잠깐,곧 나태해지고 맙니다.또 위기의 순간이 오면 다시 긴장하고 심사숙고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맛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슬픈 일을 당했을 때는 하나님의 참 뜻을 제대로 알고 깨닫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그 슬픔의 고난 속에는 분명 원인이 있습니다.하나님께서 그 원인을 제거해 주시면 쉽게 헤쳐 나갈 수 있는데,하나님은 묵묵무답이십니다.하나님께서 환경을 바꿔 주시기만 하면 되는데 도리어 그 속으로 더 빠져들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 헤쳐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를 지나가실 때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배가 흔들렸습니다.그때 예수께서 바람을 향해 "잠잠하라"고 하셨고,곧 바람이 사라졌습니다.예수께서 원인을 제거하신 것입니다.본문에서 문제의 원인은 헤롯 왕에게 있습니다.하나님께서 헤롯 왕을 죽이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헤롯을 죽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요셉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네가 일어나서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원인을 제거하시기는커녕 요셉에게 피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13절에 보면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하라"는 말도 나오고 "거기 있으라"는 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우리에게 피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어디론가 움직이기를 바라시지요.그러나 또 어떤 경우에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십니다.요셉은 밤중에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납니다. 주의 사자의 말에 요셉은 순종했습니다."피하여 거기 있으라"는 말에 온전히 순종한 것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요셉의 의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헤롯이 죽기까지 거기에 있었으니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15절)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마태는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첫 번째 사건은 애굽으로 피신한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헤롯이 어린 아기를 죽이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나사렛에 오시는 사건입니다.두 번째 사건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16절에 보면"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헤롯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바로 동방박사들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7절에 보면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그리고 8절에서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그런데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12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그로 인해 헤롯 왕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헤롯 왕은 모든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이 너무도 화가 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로운 태도가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슬픈 일을 당할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마태는 역시 17-18절에서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어졌느니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세 번째 사건은 19절 이후로 헤롯이 죽은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헤롯이 죽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입니다.요셉은 이제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헤롯이 죽은 것이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고 따르는 것이 안심인 것입니다.영적인 눈으로 보면 슬픔도 기쁨으로 변화됩니다.많은 사람들이 환경의 변화를요구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우리의 시각이 변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몇 차례에 걸친 반복되는 말씀을 봅니다.즉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입니다.이 말씀에서 메시아 탄생의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그리스도는 곧 왕이시며 구세주시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지상 최대의 사건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보다 더 큰 사건은 없을 것입니다.이큰 사건을 둘러싼 몇 가지 사건,헤롯의 분노와 어린아이들이 생명을 잃게 되는 비극의 살인극,또 피하는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의 모습을 마태는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장면들이 메시야 탄생과 어우러져 있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마태는 거듭,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탄생을 둘러싼 이 어두운 사건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그 사건들은 슬픈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르다고 할수 있습니다.영적인 시각을 갖지 않고 보면 비극적인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그 속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과 역사의 흐름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려운 현실 앞에서 쉽게 낙담합니다.그러나 영적인 눈을 갖고 그 세계에 접근해 보면 기쁜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 슬픔과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우리인간들이 처한 환경은 어떤 의미에서 다 똑같습니다.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어떠한 환경이 변화가 있느냐 하는 것보다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갸 중요하다는 것을 이 본문은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른 시각을 가지라/

하나님은"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우리가 "네,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기회를 많이 주십니다.우리 내면의 진리에 대하여"네,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기회,이것이 바로 영적인 삶입니다.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영적인삶이 모든 것을 철저히 변화시킵니다.태어나고 자라는 것,집을떠나 직장을 찾는 것,칭찬 받거나 거절당하는 것,걷는 것과 쉬는 것,기도하는 것과노는 것,아픈것과 치료받는것,그리고 사는것과 죽는 것,이모든 것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표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 여정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네,그렇습니다"라고할 수도,"아니오,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할수도 있습니다.이러한 영적 시각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되면,우리의 일상에서 아주 중요한 구분들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기쁨과 고통이 둘 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인정하는 기회가 된다면,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슷한 것입니다. 
(서정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