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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맥추절의 의미 (살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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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절의 의미 (살전 5:18)


어느 시골에 있는 교회에서 추수감사주일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해 추수를 마치고 모든 교인들이 함께 감사예배를 드릴 때에, 바로 한 주일 전에 그 동네로 이사를 온 한 여 성도님이 많은 양의 맏물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렇게 넉넉하게 보이지 않는 그분이 많은 맏물을 바친 데 대하여 목사님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성도님, 올해는 특별히 감사 할 일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네, 목사님, 사실은 제게는 열 살 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해 그 아이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저는 이렇게 기도하였지요. ‘하나님, 이 아이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 많은 감사의 예물을 드리겠다.’고 말입니다.”목사님은 그 소리를 듣고는 이렇게 웃으면서 재차 물어보았습니다. “아, 그러면 아드님이 이제 회복되었나 보군요?”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목사님의 생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닙니다. 그 아이는 일년 가량을 병과 싸우다가 결국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하나님과의 약속이 무효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야말로 주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는 정말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한 살 되었을 때, 남편이 먼저 갔습니다. 그 때 저는 정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그 절망 속에서 건져준 것이 바로 그 아이의 미소였습니다. 제가 외로움으로 눈물지을 때, 그 아이의 웃음소리는 저를 다정하게 위로 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되어 다가왔고, 제가 삶의 시련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할 때, 제 뺨을 만져주던 그 아이의 작은 손은 나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정말 제게 주어진 최대의 축복이요,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제 아들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셨고, 지금은 그 품안에 안고 계십니다. 목사님, 저는 그 아이를 제게 선물로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때가 되어 그 아이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그 귀한 선물을 주셔서 저를 지금까지 위로해 주시고 인도 해 주신 하나님께, 귀한 맏물로 감사를 드려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에 의한 맥추 감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맥추 감사주일이란 곧 보리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주일을 말함인데, 오늘날 우리 한국에 있어서 보리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교계의 일각에서는 가끔 맥추 감사절에 대한 이견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삼대 절기를 지켰지만, 오늘 우리들이 삼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유월절도 지키지 않는 마당에 굳이 맥추절을 지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출 23:14-17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그리고 신명기 16:1-17에도 이와 거의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두 곳의 말씀을 종합하여 보면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세 번 곧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하여 지키라는 절기이고, 맥추절이란 밀이나 보리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라는 절기이며, 수장절이란 가을에 거두어들인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라는 절기입니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가을의 추수감사절은 별 이의가 없는 것 같은데, 맥추감사절과 유월절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인데,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이 어떻게 유래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애굽 땅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지만, 마음이 완악한 애굽 왕은 한 숨 돌릴만하면 변덕을 부리기를 아홉 번이나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좀처럼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열 번째는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이는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애굽의 전역에 걸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는데, 그 피가 표적이 되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고 넘어가시므로 아무런 재앙을 당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가 Passover 곧 유월절인 것입니다. 물론 이 때의 양과 양의 피는 장차 오실 예수님과 주님께서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완악한 애굽 왕 바로도 자기의 왕자를 비롯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가 다 죽는데 항복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유월절 사건 때문에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게 되고, 그래서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일이요 구원의 날인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을 지키는 규례에는 꼭 한 가지 따르는 것이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칠일 동안 무교병 곧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입니다. 출 12:19-20에 “이레 동안은 누룩이 너희 집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지리니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룩 없는 떡을 먹도록 하신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급히 탈출을 하느라 아직 부풀어 오르지 못한 반죽으로 만든 무교병을 먹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유월을 기점으로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음도 애굽에서의 해방 곧 유월절을 잊지 말고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유월절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고전 5:7-8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시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되시는 예수님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는데, 이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닌, 실로 기이하고 놀라운 진리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집에 양의 피만 발라져 있으면 죽음이 지나갔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사망이 우리를 넘어 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러므로 이 시간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의 심령의 문설주에 예수님의 보혈이 적셔있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신약 시대에 구원받은 우리들도 유월절 명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양을 잡고 무교병을 먹고 하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누룩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할 때의 누룩은 복음의 영향력과 하나님 나라의 확산을 뜻합니다. 또 주님께서 “너희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은 바리새인의 잘못된 교훈을 의미하는데, 이때의 누룩은 곧 죄악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월절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명절을 지키되 누룩이 뜻하는 죄악 된 생활을 버리고, 무교병이 뜻하는 순전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무교병은 칠일 동안 먹어야 했는데, 성경에서 칠이란 숫자는 완전수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는 그 순간부터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모든 삶에 있어서 죄악을 멀리하며 사는 것,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신약 시대의 신령한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유월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맥추감사절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맥추절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이름은 ‘맥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기도 하고,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기도 하셨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보리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보리를 수확해서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맥추절입니다. 두 번째 이름은 ‘칠칠절’입니다. 보리를 추수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7주 동안 추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이날을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순’자는 ‘열흘 순旬’자입니다. 오순절은 50일 째 지키는 절기라는 말입니다. 초실절 다음 날로부터 계산을 해서 50일 째 되는 날이 칠칠절이요, 맥추절이기 때문에 이 날을 다른 이름으로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지금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구약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맥추절의 의미를 계승해서 지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1년에 두 번 특별감사예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한 번은 ‘맥추감사절’이고, 다른 하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맥추감사절은 보리 추수가 완성되는 7월에 드리는 것이고, 추수감사절은 쌀 추수가 완성되는 11월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이라고 하는 것은 1년 12개월 중에 6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복주신 것을 감사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나머지 6개월을 복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맥추감사절은 단순히 보리를 추수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나는 보리와 아무 상관없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맥추감사절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받았습니다. 이때가 애굽에서 나온 지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그저 노예 집단에 불과했습니다. 이 집단이 율법을 받게 됨으로써 국가로서의 법률과 조직을 갖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보리를 추수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서의 형태를 갖춘 ‘이스라엘 건국 기념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요? 맥추절, 칠칠절, 혹은 오순절에 이르러서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성령이 기도하고 있는 120문도에게 강림하셨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이르러서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성령을 받게 됨으로 완전한 교회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맥추절은 ‘교회의 탄생일,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은 11월에 있는 추수감사절보다도 의미가 훨씬 큰 것입니다. 

맥추절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밀이나 보리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도록 한 절기입니다. 우리나라도 3. 40년 전으로 올라가면 보리농사를 참 많이 지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밭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논에도 보리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보리는 쌀과 함께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먹던 주식이었습니다. 더구나 가난한 사람들은 쌀밥이라고는 설이나 추석 때 맛을 보고나면 일년 내내 보리밥을 먹고 지냈습니다. 그 보리밥마저 먹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졌던 시기를 춘궁기라고도 하고 보릿고개라고도 합니다. 

가을에 두세 마지기 지은 쌀농사는 10여 명씩 되는 식구가 몇 달을 먹고 나면 다 떨어지고, 이듬해 4. 5월 소위 보릿고개가 되면 많은 농가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서 하루 한 끼나 두 끼로 겨우 연명을 해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보리 수확을 6월쯤에 하게 되면 긴긴 봄날 허기졌던 배를 잠시라도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의 보리 수확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보리농사를 짓지 않으니 맥추감사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추수감사절은 어떻습니까? 옛날에는 농촌 인구가 70%이고 도시 인구는 30%에 불과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20% 미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도시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추수감사절도 지키지 말아야 합니까? 
어느 날 임금님은 맛이 기막히게 좋은 요리를 잡수신 후 감탄했습니다. ‘이제껏 먹어 본 요리 중에서 이것이 제일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만든 요리사는 세계 제일의 요리사임에 틀림없다. 많은 상을 주어야겠다.’ 그러면서 요리사를 불러들였습니다. 

요리사는 임금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겸손해했습니다. ‘임금님, 칭찬해 주시니 대단히 기쁩니다만 이 요리는 제 기술이 좋아서 만이 아닙니다. 만약 좋은 야채를 파는 사람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칭찬해 주시려거든 좋은 야채를 파는 채소 장수를 칭찬해 주십시오.’ 임금은 그렇다고 생각되어 채소 장수를 불렀습니다. 왕궁으로 불려간 채소 장수는 칭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하였습니다. ‘임금님,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야채를 팔았을 뿐이며 칭찬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 야채를 키운 농사꾼이겠지요.’ 이번에는 농사꾼이 불려갔습니다. 

농사꾼은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임금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농사한 야채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얘기를 듣자 깜짝 놀랐습니다. ‘임금님, 그것은 틀립니다. 제가 땅을 갈아 씨를 심어도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시는 분이 없으면 저는 잎사귀 하나, 열매 하나 만들지 못하지요. 단지 저는 대대로 농사꾼이었기에 씨 뿌리면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것뿐입지요. 감사의 인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요.’ 

그래서 농촌에 살건 도시에 살건 우리가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드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보리밥도 그렇게 귀했습니다만, 이제는 보리밥이 별미가 되었을 만큼 우리가 잘 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쌀 소비를 촉진하고 신세대들의 입맛을 맞추어주기 위해 우리나라 군대에서도 보리쌀을 하나도 섞지 않은 100% 쌀밥을 제공한다고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예전만큼 쌀을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산하는 쌀이 남아서 양곡 창고마다 가득 차 있어 그것도 골치 덩어리가 되고 있으니 어찌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적인 상황에서의 맥추감사절은 보리 수확에 대한 감사보다, 오히려 보리농사가 필요 없을 만큼 잘 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드리는 절기가 되어도 무리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더 나아가 맥추감사절은 한 해의 절반을 살고 나서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는 절기로 삼아도 전혀 비판할 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대 절기를 지키도록 하신 이유가 감사의 정신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란 결코 쉽지가 않는 일임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1988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라는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그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사회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 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듀카키스는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수천만 명의 시청자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처럼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사람의 입에서 과연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장애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가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지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골 3:17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예수님 때문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한 번 여러분 마음에 되새겨 보십시오. 그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 만에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좋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나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하찮은 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인 자녀를 둔 어떤 성도의 고백입니다. “목사님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 애 때문에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 모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 아빠가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애가 저러지 않았으면 아빠는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애 때문에 세상에서 천대 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이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범진이라는 사람은 교통사고로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 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브루클린 검찰청의 부장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단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 것이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 2시간 동안 사투를 벌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고위 공직자는 감옥에 들어가 호송차에 실려 가던 중 종종걸음을 치면서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평소에 불쌍해 보이던 그 서민들이 갑자기 그렇게 행복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제 발로 길을 가는 행인들이 호송차에 실려 가는 죄수인 그의 마음을 엿볼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행복에 얼마나 가슴이 뛰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탄광의 막장에서 하루 종일 석탄 가루를 마셔가며 일하는 광부들의 한 가지 소원은 땅위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직업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 70억 인구 가운데서 1/10에 해당하는 7억 인구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가 없는 사람들의 수가 20억이 넘습니다. 식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아무데서나 퍼 마시는 사람들의 수는 10억이 넘습니다. 인간다운 삶은커녕 이렇게 끔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한반도에서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히 여겨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감사를 영어로 thank라고 하는데 이 말은 think란 말과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란 생각하는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서 받은 복을 생각하고 또 앞으로 주실 것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의 사랑을 깨달아 보답할 마음이 생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최고의 미덕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베풀어준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 고마움을 표현할 때 이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표현이 없는 감사는 참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는 먼저 입으로 표현하고, 다음은 행동으로 표현하고, 물질로 표현하고, 섬김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준비한 맥추감사 예물은 바로 감사의 표현입니다. 빈손으로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펄존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별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하면 달빛을 주실 것이요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하면 햇빛을 주실 것이요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하면 햇빛이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실 것이다”라고. 

감사하면 가장 중요한 것이 기적이 일어납니다.
왜 감사할 때에 기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감사는 생명을 충만케 해주는 묘약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주고, 복을 받을 그릇을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에 보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이 나옵니다. 본문을 잘 읽어 보시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난 다음에 감사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나사로가 살아난다면 감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해 있을 때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1-43절에 보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놀라운 사실은 그 때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감사의 시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 해결된 다음에 감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낙담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가 풀린 다음에 감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절망하고 원망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망의 때에 감사했더니 그 감사가 기적을 일으켰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여러분, 절망의 때를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히려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크라는 분을 소개합니다. 그는 원래 플라스틱 제품으로 돔을 짓는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오일 쇼크로 인해 모든 것이 파산하고 부도가 났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추운 겨울 유리창이 깨진 차를 운전하며 뉴욕을 다녀야 했습니다. 깨진 유리창 틈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어 왔지만 유리창을 고칠 돈이 없었습니다. 
주유소에 들어갔습니다. 주유소 직원이 묻습니다. 

“가득 넣을까요(Filler up)?”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20센트 어치만 넣어주세요.” 
먹고 살려면 뭔가 해야 했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게 된 것이 화장실 청소원입니다. 과거에는 잘 나가는 사업가였지만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되자 곁에 있던 친구들도 모두 떠났습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습니다. 두려움이 몰려 왔습니다. 우울증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마크가 다른 사람과 달랐던 것은, 믿음으로 그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는 더 큰 사업체를 일구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패경험을 강연하는 유명한 강연자가 되었습니다. 또 실패를 통하여 자기에게 글 쓰는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고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믿음은 실패를 복으로 바꾸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저자 마크 빅터 한센입니다. 이 책은 무려 4천만부나 팔렸습니다. 거의 우리나라 인구 전체가 이 책을 봤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늘 제가 여기 설수 있게 된 것은 지난날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고난과 문제는 복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곧 절망의 때가 오히려 감사의 때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로빈슨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트레일러 운전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눈이 멀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절망의 때에도 자기 집 잔디밭에 앉아서 날마다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나의 목숨을 건져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눈이 이렇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 인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로빈슨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40일 동안 매일 저녁 감사의 기도를 드렸더니 그의 눈이 치료가 되어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감사가 기적을 낳은 것입니다. 바라기는 절망 중에도 감사함으로 기적을 낳는 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5, 60년 전에 텍사스에서 석유 재벌로 유명한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석유로 거대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뉴욕에 와서 앰버서더 호텔 29층에 들었습니다. 그 날도 뉴욕 시내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왔더니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부자가 되면 대개의 경우 살이 많아서 출렁 출렁합니다. 그래서 몇 계단 올라가서 쉬고 또 몇 계단 올라가다 쉬면서 올라갔습니다. 

땀이 비오듯하고 다리가 천근만근 되는 것 같았습니다. 죽어도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 할 정도가 되니까 29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머니를 보니 열쇠가 없었습니다. 다시 내려갔다 열쇠를 가지고 올라오는 일은 죽어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난감하지 않습니까? 해결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 쪽에서 청소하던 흑인 아주머니가 오더니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방문 열쇠를 못 가지고 올라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좀 내려가서 가져다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 때 흑인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습니다. 쉽게 잠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열쇠 하나만 가지면 호텔 방 전부를 다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소위 만능 열쇠 master key라고 합니다. 기도를 만능이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기도는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흑인 아주머니가 “예수님은 만능 열쇠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가 만능 열쇠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만능 열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제를 풀면 다 풀립니다. 주 앞에서 안 풀리는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안 열리는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하는 생활은 가장 복된 생활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하면, 보고 배우고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와 함께 모든 것을 얻고 누리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 생활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기도하시는 가운데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맥추감사 주일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지난 6개월 동안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 받으시는 중심에서 우러나온 감사한 마음과 예물을 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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