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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직분 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롬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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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 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롬 15:16)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미국의 대통령 선거 역사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일을 든다면 카터 대통령의 선거유세를 기억할 수 있다하기도 합니다. 투표일을 앞둔 마지막 일요일 저녁 미국 국민들은 저녁 TV 뉴스에 신경이 쓰였는데 대통령 후보의 그 열광적인 마지막 유세장면을 TV로 보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먼저 카터의 상대방 유세장은 열광하는 수만 인파와 후보자의 열변이 끝나고, 이어서 카터의 선거 유세장면을 기대했으나 엉뚱하게도 카터의 유세장은 멀리 그의 고향에 있는 교회가 나타났고, 그 교회 안에서 불과 몇 십명의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장면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TV를 지켜보던 카터의 지지자들은 TV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판가름 짓는 마지막 황금의 선거유세를 포기하고 수십 년간 맡아온 고향의 교회학교 교사직분을 수행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유세를 핑계로 그는 하루쯤은 교회학교 선생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달라고 담임목사에게 부탁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일을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상대 후보의 유세장은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수백만 표가 쏟아질 것 같은데 카터의 주일학교의 모습은 그 학생들의 사돈의 팔촌까지 다 동원해도 100표도 안 나올 것 같은 처량한 모습이었으나 하나님은 이 날밤 이 TV를 보는 미국의 수백만 유권자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분이 저렇게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보면 앞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면 그 직분을 충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수행할 분이다.'라는 것을 인식시켰다는 것입니다. 도덕과 여론의 정치를 지향하는 미국 국민들은 이 TV화면에서 카터를 밀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이렇게 승리합니다.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직도 잘 수행하였지만 퇴직 후 그의 삶이 더욱 아름다워서 노벨 평화상을 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각자의 할 일을 걸머지고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더욱 실감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신자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하나님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자기의 사명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갈팡질팡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나 달란트가 분명히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구원받은 것 자체로 만족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즉시 말씀을 읽고 또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직분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세상의 직분(office)의 영광은 크기, 위치, 값비싼 가구들에 있지만 위치적 직분의 영광은 그것의 권위에 있다합니다. 권위가 더욱 커질수록 직분은 더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여러 직분들이 겸해서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더욱 영광스러워질 것입니다. 흔치 않은 일이긴 하겠지만 어떤 사람이 대법원장, 대통령, 국회의장의 직분을 동시에 가졌다면 긍정적인 말로는 전권을 가졌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독재자, 혹은 폭군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힘과 절대적인 선을 동시에 소유하실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직분이 있는데 사실 복수로 “직분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며 동시에 세 가지의 영광스러운 직분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시며, 또한 왕이십니다. 이 삼중직은 메시아적 직분들입니다. “메시야”란 히브리 단어의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직분을 받는 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약술하며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의 명을 받아 기독교도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행 9:15;26:14-19). 즉 사도직의 은혜가 이방인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숭고한 사역의 성취를 위해 바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Godet). 그 후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일꾼'(레이투르곤)은 '백성'(레이토스)과 '일'(에르곤)이 합성된 단어로 공직자 곧, 공적인 관리를 뜻합니다(Godet). 종종 '군대의 종이나 왕의 신하'나 '성소에 부리는 자'(히 8:2)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특히 신약에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된 일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임명받은 일꾼을 말합니다(Meyer).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일꾼된 자신에게도 사용하지만 또한 에바브로 디도에 대해서도(빌 2:25)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을 위하여 부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 함은 바울 사도 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곧 자신의 직분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 자는 사명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바울은 자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고 제사장 직무를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 중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처음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는 비단 에베소 교회뿐만이 아닌 오늘날 신자의 식어진 사명에 대한 강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처음 구원에 감격하여 열심히 맡은 일에 뜨겁게 헌신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열이 식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서서히 사명감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신자가 매우 경계해야 할 상태입니다.

1182년 이태리 아시스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피에톨 띠 벨라드와 경건한 신앙인 어머니 마돈나 피카 사이에 프랜시스가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날 때 난산으로 오랜 시간 진통이 왔는데 그때 문밖에 지나가던 어느 성자가 나타나 “마구간에 짚을 깔고 거기서 아이를 낳으면 순산할 것”이라고 말하자 가족들은 급한 마음에 마구간에 짚을 깔고 산모를 누이니 성자의 말처럼 아이를 순산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 아이가 예수처럼 태어났으니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합니다. 이 아이가 세례를 받는데 세례명이 요한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언뜻 세례요한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거부하고 ”프랜시스”라고 부름으로 프랜시스가 탄생되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성장하면서 마구간에서 태어난 의미와는 다르게 방랑생활을 하고 놀기를 좋아하며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로 밤을 지새우다가 1203년 11월 어느 날 중병에 걸리게 되고 날마다 뼈골이 상접해 갔다 합니다. 

어느 날 저녁때 산타 마리아 수도원에서 종소리가 들려오고 집으로 돌아가는 양떼 울음소리가 밖에서 들려오자 그때 어머니가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합니다. “아름다운 아시스여, 아시스는 여전히 아름다운데 내 아들은 벌써 이곳을 떠나야 하는가, 아니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을 그때 프랜시스는 혼수상태에서 마귀와 싸우며 “아 괴롭다, 날 살려줘, 너는 누구냐, 네가 죽음의 사자냐, 나를 데려가려 왔느냐, 제발 나를 놓아줘, 살려줘“ 하며 고함을 지르고 몸부림을 쳤다 합니다. 

무서운 꿈을 꾸고 있는 아들을 깨우며 어머니가 근심스런 얼굴로 “꿈을 꾸었구나.”라고 말하자 온몸에 땀이 흠뻑 밴 채 초췌해 있는 아들이 “꿈이 아니었어요, 죽음의 사자가 날 잡아 끌었어요, 그래서 소리쳤어요, 그때 천사가 날도와 주었어요, 아니면 나는 끌려가고 말았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나서 깊은 상념에 빠지더니 회개를 했다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방탕자의 삶을 살았는가, 어머니, 내가 마귀에게 끌려갔더라면 지금쯤 내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는 그동안 값없이 살았어요. 벌써 내 나이 23세입니다“하고 후회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아 내 아들아, 네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구나, 과연 몇 해만에 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는 거냐, 하나님께 무엇이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엄마는 참 기쁘구나, 하나님이 너를 큰 그릇으로 만드실 모양이구나, 이것이 연단이라는 것이란다, 독수리가 높은 창공을 날려면 호된 훈련이 필요하듯 이것도 네게 주시는 연단일 것이다“.라고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프랜시스의 병이 치유되고 건강이 회복된 후 처음으로 밖으로 나가 길을 가는 동안 갑자기 찬란한 빛이 비추어 오더니 구름 저편사이에 작은 문이 보였고 그곳에서 “은혜 받은 자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너희 영혼의 새로운 문, 여기로부터 영원한 본향에 이르리, 영광 돌리세, 십자가의 주께 영광 돌리세“. 라는 천사의 합창소리가 들려왔다 합니다. 

프랜시스는 그 순간 깊이 생각했다 합니다. “나의 장래와 미래와 나에게 주어진 몫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할 일은 무엇이며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프랜시스는 그곳에서 마침내 “나는 평생 가난한 자와 거지들을 위해서 살겠다.” 마음에 다짐을 했다 합니다.

이것을 소명의 발견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는 때라 합니다. 
신앙적 정열이 식는다는 것은 곧 사명감을 잃고 있다는 증거요, 그러한 현상은 나도 모르게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말해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는 고백을 서슴없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직분을 올바로 수행하는 길입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기를 멈추고, 하나님이 무엇을 자기에게 하실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이다.”(메튜헨리)라 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고 하므로 자신 행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 속에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는 하나의 도구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직분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했고 그의 겸손은 그의 고백들에 나타납니다.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일컬었습니다.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러한 바울의 겸손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크고 놀랍게 쓰임 받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무디, 영국의 웨슬리, 스펄전 목사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한없는 '겸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의 제자에게 가르치기를 '성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첫째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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