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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도 (고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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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고전 1:18) 

옛날 중국에는 전설상의 큰 도둑이 있었습니다. ‘도척’이라는 이름의 큰 도둑은 도둑사회에도 도(道)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장자 ‘지협’편에는 도척이 대화형식으로 도둑에게 하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도둑에게도 도가 있느냐고 도둑이 묻자 도척은 도둑의 도를 말해줍니다. 첫째는 방안에 감추어 둔 것을 미루어 아는 것은 성(聖)이고, 둘째는 앞장서서 들어가는 것은 용(勇)이고, 셋째는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은 의(義)이고, 넷째는 가부를 아는 것은 지(知)이고, 다섯째는 고르게 나누는 것은 인(仁)이라고 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못하면 천하에 큰 도둑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큰 도둑이 말하는 도둑의 도를 보면 예수 믿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도는 예언을 잘 알아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하고, 의가 있어야 하고, 지식으로 충만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하고, 함께 나누고 베풀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래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큰 길(道)을 만날 수 있습니다. 
  
‘로고스’라는 헬라어는 우주세계의 정신개념을 말합니다. 우주생성의 원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로고스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주의 원리이며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서두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태초에 로고스가 있으니라”는 뜻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에는 “태초에 도가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이미 길이 있었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바울이 간절히 전하려고 했던 것은 “십자가의 로고스”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를 전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로고스는 십자가의 원리이며 십자가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말은 헬라어 “호 로고스 호 투 스타우루”인데 문자적으로는 “그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말의 지혜”와 대조되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인간의 말의 지혜와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말의 지혜와는 달리 십자가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는 말씀입니다. 
  
말의 지혜란 무엇입니까? 말의 지혜는 ‘척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8에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합니다. 입술로 공경하는 척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18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면 곤충들이나 짐승들 가운데 ‘의사(擬死)행동’을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위급한 일이나, 불리한 정황을 만나게 되면 누워서 죽은 척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척하여 위기를 피하는데 뒤로 넘어져서 아무리 건드려도 일어나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죽은 척하여 위기를 피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다가 진짜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의 지혜와 십자가의 도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말의 지혜는 죽은 척하는 것이고, 십자가의 도는 죽는 것입니다. 척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죽은 척하는 것과 실제로 죽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생명의 차이입니다. 
  
설문조사를 한 것을 보면 회사에서 왕따 1순위가 나와 있습니다. “누가 왕따 대상인가?”라는 질문에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하는 ‘척돌이’, ‘척순이’가 왕따 1순위입니다. 세상에서도 척하는 것은 탄로가 나고 왕따가 되지만 하나님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척돌이, 척순이는 통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죽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말재주가 아닌 실천입니다. 위선이 아닌 진실입니다. 다른 인간적 조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도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 십자가의 도에 살며,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상반절에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합니다. 사람이 왜 멸망합니까? 십자가를 믿지 않으므로 멸망합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해보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신을 모독한 죄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황제를 모독한 죄로 법정에 섰습니다. 로마에 대한 국가반란죄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볼 때는 정치범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형당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판단해 볼 때는 십자가는 미련한 자들이나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십자가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나무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한낱 장식품 정도로 취급합니다. 
  
“멸망하는”이란 말은 헬라어의 ‘아폴뤼메노이스’라는 말인데 현재분사형입니다. 그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가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 받을 일만 끊임없이 한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해서는 안 될 일만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의 생리란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습니다. 악은 또 다른 악을 범하게 합니다. 멸망하는 자들은 똑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반성은커녕 더 큰 죄를 계속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라”고 권하지만 멸망하는 자는 그 말을 듣고도 깨어있지 못하고 졸고 잡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들의 경고의 나팔소리가 미련한 말로 들립니다. 이런 자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믿고 있지만 천주교회에서는 정경과 함께 외경을 믿습니다. 구약 외경에 ‘유디트’가 있습니다. 유디트는 이스라엘의 산악도시 베틀리아에 사는 미모의 과부입니다. 유디트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나 우리나라의 논개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기원전 2세기 아시리아 군대가 베틀리아를 침략하자 보급로를 차단하여 고립위기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유디트는 홀로 적장을 처단하러 아시리아군의 막사로 갔습니다. 보초병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고 말솜씨에 혹하고 말았습니다. 적장 홀로페르네스와 밤을 보낸 뒤, 적장이 잠든 사이에 적장의 목을 베어 자루에 넣어 돌아왔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멸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미모와 말재주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외형과 말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도인 십자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그 자체가 멸망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동산에서 멸망하고 동산에서 구원받았다. 에덴의 완벽함은 폐허로 끝났고 겟세마네의 구원은 쓰라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에덴에서 인간의 실패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동산 한 가운데의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였는데 그걸 믿지 않았습니다. 뱀은 선악과를 먹는다고 죽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헛소리냐고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을 극대화하고 싶었던 사람은 뱀의 말이 그럴 듯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길이고, 도이고, 로고스인데 이것이 미련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가 미련해 보이는 것이 멸망을 가져오는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멸망을 예고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동안 사람들은 노아의 일을 비웃었습니다. 해가 쨍쨍한 날에 홍수를 대비하는 것이 미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천사가 와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예고하자 사위가 될 사람들에게 불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위 감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과 저주’를 그 앞에 두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할 것을 경고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을 미련한 소리로 여겼습니다. 
  
마가복음 13:14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멸망의 경고를 귓전으로 흘려보냈습니다. 경고의 말씀을 듣는 것이 미련한 일입니까? 멸망이 까마득하게 먼 훗날 얘기입니까?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미련한 일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백성들이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 높이 달아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낫게 하고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살지 못한 사람들은 한번 쳐다보면 될 구리 뱀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뭐 그 까짓것을 본다고 뱀에 물린 것이 낫겠어?” 그들은 구리 뱀을 쳐다보는 것이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5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가정파괴로 인한 혼인질서의 문란입니다. 둘째는 과도한 세금부과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의 팽배입니다. 셋째는 지나친 사치와 스포츠의 잔인성입니다. 넷째는 국토확장 전쟁으로 인한 청소년층의 붕괴입니다. 다섯째는 국민 전체를 하나로 묶어줄만한 고급종교의 부재입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데는 다 원인이 있습니다. 개인이나 나라가 멸망할 때는 진리가 미련스럽게 보이고,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입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둘째,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8절 하반절에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상반절의 ‘미련한 것’의 반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든, 하나님의 능력이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멸망과 구원의 차이입니다. 
  
‘능력’이란 말의 헬라어는 ‘뒤나미스’인데 신체적, 영적, 지적 능력을 포함한 총체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원리로서의 생명력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신약성경에서 ‘뒤나미스’란 단어는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수치이고 험한 물건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힘은 구원의 능력이며, 보혈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에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피는 구원을 의미하고, 물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변화는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형태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 가운데 ‘타우 십자가’(T)라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영어 철자로는 T자형이지만 헬라어 철자로 ‘타우’라고 읽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유월절에 자신의 문 앞에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이 십자가를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놋 뱀을 막대 끝에 매달 때에도 이 십자가를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집트의 고대 교회인 콥트교회 교도들은 이 십자가는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대 서방세계에서는 병자의 쾌유를 기원할 때 이 십자가를 ‘아뮬렛’(부적)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에 힘이 있다고 믿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놋 뱀은 바라보는 자가 치유되고, 회복되고, 구원받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십자가는 만세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동양귀신과 서양귀신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귀신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 대한 관념의 차이일 것입니다. 한국 귀신은 주로 원한관계 때문에 귀신이 됩니다. 귀신은 한 결 같이 한이 많습니다. 한이 많은 삼촌 귀신이 조카에게 들어가고, 할아버지 귀신이 손자에게 들어갔다는 말도 듣습니다. 어쩌면 한국 귀신은 사랑이 없이 가족들을 그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원한이 풀리면 사라집니다. 서양귀신은 원한관계가 아닙니다. 피를 빨아먹는 귀신이 많습니다. 그런데 서양귀신은 십자가를 보면 사라집니다. 
  
드라큘라는 영국 작가 스토커가 1897년에 쓴 괴기소설의 주인공입니다. 루마니아 백작인 드라큘라는 서양 뱀파이어의 원조입니다.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피를 빨아먹는 귀신입니다. 그런데 드라큘라는 십자가를 보면 두려워하고 도망갑니다. 십자가는 귀신을 쫓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생명이며 구원이기에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능력이란 말은 ‘뒤나미스’인데 는 원래 뜻은 자연적 힘을 의미했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격적 힘과 초인간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다이나마이트’라는 말의 어원인데 폭발하는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1:16에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합니다. 복음도 십자가도 폭발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폭발하게 하여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 동화에 ‘오페이로’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오페이로는 ‘지다’(to bear, to bring) 혹은 ‘업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오페이로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의 부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힘센 장수에게 가서 부하가 됩니다. 그런데 그 장수가 마귀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마귀가 장수보다 힘이 세다고 생각하여 마귀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귀가 길을 가다가 십자가를 보고 까무러칠 정도로 놀랍니다. 그는 십자가가 가장 힘이 센 것이라 생각하여 십자가의 주인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주인을 찾지 못한 그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는 사람을 업어 강 건너편으로 옮겨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그의 등에 엎였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강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엎인 소년은 납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등에 엎인 소년을 돌아보며 “소년은 누구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요”. “그런데 왜 이렇게 무겁소?”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가기에 이렇게 무겁소”.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주인은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십자가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 주인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부적처럼 이용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주인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십자가도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십자가도 아무런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되게 하셨습니다. 
  
찬송가에는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능력입니다. 십자가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무 막대기, 나무 기둥에 불과합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주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십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이며,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결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2년 밀비안 다리의 결전(Battle of Milvian Bridge)을 합니다. 그는 막센티우스와 대결하기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빛을 발하는 십자가가 나타났고, 십자가와 함께 ‘이 상징으로 그대 정복하리니’라는 문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사 모두에게 방패에 페인트로 십자가 표식을 그리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와 그의 군사들은 크리스천이 사교를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승리하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고, 구원의 생명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4에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살아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상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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