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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라 (6.공의로우신 하나님) (시 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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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라 (6.공의로우신 하나님) (시 89:14)


세계 인구 연감에 의하면, 현재 세계 인구는 약 70억 9천만이고, 이 중에서 약 84.5 %가 종교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종교의 종류에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유대교, 기타 종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무신론자라고 응답한 사람은 15.5%에 불과합니다. 이 통계 자료는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으며, 신에 대한 믿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종교를 신봉한다고 해서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는 말씀처럼, 모든 종교가 다 생명의 길은 아닙니다. 성경이 계시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종교를 믿어서는 구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 종교가 비윤리적이라거나 또는 반사회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를 제외하고 소위 고등 종교에 해당하는 불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의 가르침은 윤리적으로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교들은 영생의 도가 아니라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같은 종교들이 섬기는 신들의 성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힌두교는 범신론을 믿는 까닭에 신의 수가 무려 3억 3천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많은 신의 이름조차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힌두교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별도의 신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과의 법칙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지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 종교인 셈입니다.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일부 따다가 만든 종교로서 유일신 알라를 섬깁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교는 그 성격이 기독교의 이단 중 하나와 흡사합니다.

유교는 본디 종교가 아니고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터득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공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이 땅의 일도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 이 후를 알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자는 철저하게 현세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교에서 조상 제사를 극진히 모시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것은 조상의 혼령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효를 가르치기 위한 데 근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도교에서는 도(道)에 관하여 말하지만 노자가 말하는 도(道)란, 우주 원리를 가리킨 것일 뿐 윤리적이거나 인격적인 성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신 가운데 한 분이 아니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무슨 원리나 법칙이 아니고 윤리적이시며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정의를 갖고 계시며, 선악을 분별하는 도덕적인 품성을 갖고 계십니다. 이 도덕적인 품성 가운데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선하심과 미쁘심과 진실하심과 같은 품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품성들은 서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공의는 거룩성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미쁘심과 진실하심 역시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섯 번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신 것과 그 분의 자비하심과 전능하심, 거룩하심, 영원하심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품성에 속하는 공의로우심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합니다.

공의란, 선악을 공평하게 판단하시고 이에 합당한 상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말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않으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않다면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 행위에 대하여 전번에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지만 이번에는 진노하신다면 우리는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그런 염려를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정의롭고 공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행하기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공의는 하나님의 어떤 품성에 근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시므로 터럭만치도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공의로우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사실이지, 사람의 판단은 100% 공정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다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에 “10)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남의 행위를 판단하려면 먼저 자신이 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판사라고 공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전혀 동일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때때로 공정하지 못한 판결이 나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판사 역시 불의한 인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뇌물이나 편견, 또는 가치관 등에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히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란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재판에서 상고심을 허용하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의 판단이 부실한 것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공의롭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한 분만이 인생들을 판단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재판장에 비유한 곳이 많습니다. 시편 7편 11절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고 하였고, 시편 68편 5절에는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119편 13절에는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노라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공정하게 해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의한 대접을 받고도 속수무책으로 아무 대항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자주 당하다보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화병에 걸려 고생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할 때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악인을 징벌하시고 성도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하므로 광야 동굴 속에 숨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죽을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하나같이 사울 왕과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적진에서 키가 3미터나 되는 장수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독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겁에 질려서 누구하나 나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윗이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치즈와 떡을 갖다 주고 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말을 들은 다윗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사울 왕에게 가서 자기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왕은 처음에는 만류했지만 다윗이 하도 강청하는지라 허락했습니다. 

그 날, 다윗은 단 한 번의 물매질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였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외에도, 사울 왕이 악신에 사로잡혀 고통할 때마다 다윗이 수금을 연주해서 악신을 쫓아내곤 하였습니다. 더구나 다윗은 사울 왕의 둘째 딸인 미갈의 남편이므로 왕의 사위였습니다. 그런데도 사울 왕은 다윗을 정적으로 여기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이려 했습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에게 호소할 데도 없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화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원수를 갚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찾아왔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칼을 거두었습니다. 

그 대신 다윗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시편 142편은 다윗이 굴에 숨어 지낼 때 지은 것인데, 거기에 보니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어도 자기가 직접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처분에 맡겼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에 자기 운명을 맡겼더니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다윗처럼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써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노라면 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법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 편을 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으로 해결하기가 난처한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오해를 받거나 억울한 누명을 쓸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해명할수록 문제가 더 악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다윗처럼 하나님의 공의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다윗에게 공의로운 판단을 내리셨던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이 당면한 곤경을 공의롭게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항상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인생을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주고받은 말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시며, 아무도 모르게 행한 선행이나 악행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하십니다. 각 개인에 대하여 심판하실 뿐 아니라 세계 각 민족에 대해서도 심판하십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가인은 아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얼마 후에 두 사람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가인이 대답하기를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절대로 없으며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타락하여 죄악이 세상에 가득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셨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아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소돔 성을 멸하시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소돔 성을 위하여 이 같이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해서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만족하지 않고 끈질기게 간구하여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열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소돔 성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없는 인자하심으로 인생들을 대우하시되 끝까지 회개치 않고 죄악의 길로 행하면 반드시 공의의 심판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악인들에게는 멸망을 의미하지만 의인들에게는 구원과 상급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하고 불의하게 살아왔으면서도 의롭게 산 것처럼 꾸미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행위로 인해 장차 심판대에 설 때 더 큰 정죄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적으로 공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농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 6장에 이르기를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장래를 위해서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금년도 우리 교회의 실천 목표가 “믿음에 견고히 서서 주의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자”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위하여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하겠습니다. 허황된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아까운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낭비하지 말고 공의의 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해 아래 수고한 것은 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아서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매사에 유행을 좇아가느라 애쓰지만 유행은 돌고 도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9,10)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장차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입니다(고후 5:9,10).

이 세상에서는 큰 공을 세우고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흔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으나 그것을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돌아간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아시고 상을 내려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 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8)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6-8)고 하였고, 또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재료로 집을 지었는지 겉모양만 보아서는 알 수 없을지 몰라도 한번 불로 시험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데 대하여 그럴듯한 핑계를 대서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앞에 내놓고 부족한 것이 있거든 회개하고 새로운 결심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우리 구원의 근거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장 1절, 2절에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다니 세상에 이처럼 놀랍고 위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만한 공로가 없는데,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은 것일까요? 우리의 그 많던 죄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무조건 죄 없다고 하실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행해진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과 티가 없고 아무 죄도 없으시지만 모든 죄인들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남김없이 퍼부어질 때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운명하셨습니다. 이로써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으며,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주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의 은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을 의인이라고 인정하신 하나님의 처사는 더없이 공의로운 것입니다.

본문에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공의 위에 세워진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우리의 소속은 공의로 다스림 받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공의로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니 우리도 공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마다 이 악하고 불의하고 어그러진 세대를 본받지 마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데 쓰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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