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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 이야기(3) : 축복의 통로, 요셉 (창 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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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이야기(3) : 축복의 통로, 요셉 (창 39:1-6)
 
닉 부이치치의 도전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방영된 ‘힐링캠프’에는 팔, 다리가 하나도 없는 닉 부이치치(Nick Vujicic)가 게스트로 출현했습니다. 여러분도 그의 모습을 TV나 신문을 통해서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OECD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 1위라는 이 한국에서,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청소년 자녀를 두셨다면 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물론 대학청년들에게도 도전이 될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팔, 다리가 없는 그에게 어릴 때부터 ‘네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네가 가진 것에 집중해라. 그리고 감사하고 도전해보라’는 말로 가르침을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없는 것에 대해 ‘왜 내게는 없는가’ 하고 마음속으로부터 분노합니다. 또 자신에게 있는 것은 오히려 우습게 생각하여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장애를 가지고서도 저렇게 밝은 얼굴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는 최근에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생각해보라, 내겐 팔이 없다. 다리도 없다. 제 아무리 용을 써 봐도 형편없는 외모는 가려지지 않는다. 못된 아이들에게 한참 시달릴 때는 두렵고, 우울하고, 불안하며,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이런 시절에 나는 평생 직업을 가질 수 없을 것 같고, 대학을 갈 수 없을 것 같고, 결혼할 수 없을 것 같고, 아빠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던 나의 절망에 하나님은 기적처럼 날개를 달아주셨다. 그래서 앞으로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향한 나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당신도 나와 같이 도전하지 않겠는가?” 

방송 마지막에 그는 스스로 바닥에 누운 다음, 성경책에 이마를 가져다 대고는 벌떡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여기까지 온 것은 신앙의 힘이라고 말하며, 방송에서 일반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 하나님, 성경, 신앙 등의 말들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마치 한 사람의 간증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불평, 불만한 것이 너무 많았구나!’ 하는 부끄러움과 함께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인생은 일엽편주(一葉片舟)와 비슷합니다. 큰 파도가 치는 바다 한복판에 떠 있는 자그마한 배인 것입니다. 때로는 속임수에 당하거나 협박을 받기도 합니다. 유혹과 미혹이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삶이란 결코 안전판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짧은 세월 동안 경험했습니다. 아니,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내가 탄 배가 파도에 마구 요동치는 것을 체험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 속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은 배신을 통해 슬프고 아픈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친척, 형들에 의해 마치 물건처럼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막 뒤틀리지 않았겠습니까? ‘이 못된 형들아, 이 나쁜 놈들아. 너희가 형이냐? 너희가 사람이냐? 동생을 팔아넘기는 너희가 제대로 된 인간이냐?’ 아마 마음속으로 수없이 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 사실을 침묵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셉은 자유의 상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노예 신세기 되었습니다. 내 것이 없습니다. 내 의지마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동안 누리던 자유를 다 잃어버렸고 인격도, 자존감마저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마 반복해서 하나님께 넋두리처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왜 이런 자리에 있는 걸까요?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 같으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학하며 인생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만약 종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종이 된 것이라면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본래 자유자였습니다. 사랑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답답해서 소리쳤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적 상황, 개인적 실존의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이토록 거센 파도가 불고 있는 요셉의 상황보다 더 어렵습니까?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며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성숙이 나타납니다. 

혹시 ‘역경지수’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폴 스톨츠(Paul G Stoltz)는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라는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여러 잣대 중 하나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는가’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 줍니다. 지성지수를 IQ, 감성지수를 EQ, 도덕지수를 MQ라고 하는 것처럼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이 역경지수는 AQ라고 불립니다.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어려움을 잘 대처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인생을 마라톤이나 등반으로 비유하지 않습니까? 평평한 대지를 걸을 때도 있지만 오르막길을 오를 때도 있습니다. 또 깊은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도 같은 길이 없는 곳을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즉 누구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폴 스톨츠는 역경지수를 이야기하면서 대부분의 인간은 어려움 앞에서의 태도를 통해 세 종류로 분류가 된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퀴터(Quitter), 즉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해 보다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아, 이거 못해 먹겠네.”하고 주저앉아 아예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캠퍼(Camper),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장애물을 만나면 “더 나가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만큼 했으면 됐지. 그냥 여기서 쉬자.”하고 멈춰 서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클라이머(Climber), 도전하고 모험하는 사람입니다. 어렵고 힘든 것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서 넘어서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히려 남을 더 격려하고 남에게 용기를 북돋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 세 가지가 같이 있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하나님, 이게 뭡니까?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하고 퀴터가 되다가도,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이 정도에서 머물러야지’하며 캠퍼의 태도로 바뀝니다. 하지만 다시금 ‘무슨 소리야. 한 번 더 새롭게 해 봐야지. 다시 도전해 봐야지!’ 하며 클라이머가 됩니다. 이렇듯 이 세 가지가 뒤섞여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그는 분명 포기하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캠퍼와 클라이머 사이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요셉이 ‘더 이상 종살이는 못해 먹겠다. 기회를 봐서 도망가야겠어.’ 라고 했다면, 그것은 또 새로운 세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구조화되고 질서화된 애굽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영원한 도망자이자 도피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결정합니다. 자신이 처한 위기와 아무 능력도 없는 그 자리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말입니다. 그리고는 멈춰 서지 않고, 부딪칩니다. 도전하며 변화를 요청합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유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진 소중한 품성이었습니다. 

우리가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음이 뒤틀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상대를 미워하게 되고, 증오하기까지 이릅니다. 그래서 복수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아니면, 인생은 다 이렇다며 냉소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비탄에 빠져 절망하기도 하고, 일종의 자기 파괴적 감정으로 스스로를 못살게 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불평 속에 인생을 침몰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감사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감사했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자유는 없지만, 자신에게는 17살의 젊음이 있었습니다. 건강이 있었고, 삶에 대한 의욕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있다는 것이 그의 삶에 긍정적인 요소로 비추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후에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형들에게 했던 요셉의 말을 통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창세기 50:20)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그는 기억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이것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신앙을 내 것으로 받은 것입니다. 3인칭의 신앙을 2인칭, 1인칭의 신앙으로 바꾸면서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그 사실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난국을 이겨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실함은 하나님의 신뢰를 받게 합니다.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품 중 하나는 성실성입니다. 야곱에게는 이기적인 탐욕도 있었지만, 그는 본래가 성실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성품을 요셉이 받은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요셉의 성실성을 알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어느 날 요셉에게 부탁을 합니다. “요셉아, 형들이 양을 치러 나간 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 네가 가서 형들이 잘 있는지 알아보고 올 테냐?” 아버지는 형들이 먹을 음식을 싸서 요셉 편에 보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말씀에 바로 순종합니다. 

당시 그가 살던 헤브론에서 형들이 양을 치던 세겜까지의 거리는 약 80km였습니다. 그런데 그 먼 길을 가서 보니, 세겜에 형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수소문을 해 보니, 형들이 도단이라는 곳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단은 세겜에서 30km 정도 더 가야하는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산을 넘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전부 합하면 100km 이상 되는 거리인 것입니다. 17세 어린 소년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아무리 빨라도 3∼4일이 걸렸을 것입니다. 만약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갔다면 일주일이 걸렸을 거리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중간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 이 정도로 찾아보고 아버지한테 못 찾겠다고 얘기 해야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그 길을 갔습니다. 이렇듯 그에게는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성실성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아주 중요한 인간적인 성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실성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해 깊은 책임의식을 갖는 마음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부자로 알려진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은 이렇게 사람을 고른다고 합니다. “나는 사람들을 쓸 때 세 가지를 본다. 첫째 성실성이다. 둘째는 지능, 분별력, 지혜이며, 셋째는 열정이다. 하지만 성실성이 없으면 나머지 두 가지가 당신을 망칠 것이다.” 성실성이 없으면 내게 있는 지능과 열심도 다 별 볼일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도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 중요한 덕목인 성실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실성이 요셉의 다음 단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창세기 39:4) 

노예였던 요셉이 주인 보디발의 눈에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은혜를 입었다’는 주인 보디발의 총애와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실한 요셉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눈속임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있거나 없거나 맡겨진 일에 일관성을 가지고 모든 일을 대했습니다. 

성실성을 가늠하는 잣대는 동기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는지, 아니면 주인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이 동기가 주인에게 의심을 받기 시작하면 둘 사이의 신뢰는 깨지게 됩니다. 

직장에서 상사 역할을 해 본 적 있으십니까? 부하 중에서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관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 친구 참 열심이구나!’ 그런데 조금 지나서 열심은 열심인데 자기 것 다 챙기면서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순간 관심이 깨질 것입니다. 더 이상 신뢰가 생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몫을 다 채우면 언젠가는 도망갈 친구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감사한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소망교회가 복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돈과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으면서 봉사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집사가 되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거야. 나는 권사가 되기 위해서, 앞으로 장로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동기를 앞서게 되면, 어느 순간에인가 그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실성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성실성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 나타납니다. 

직분 맡은 자를 세울 때 늘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 사람을 세우면 일을 많이 할 것이다. 교회를 위해서 많이 충성할 것이다’ 생각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저 사람의 성실한 모습을 닮고 싶다. 저 사람의 기도와 봉사, 언어가 참 성실하고 좋다’ 이렇게 여겨지는 사람이 직분을 맡아야 그 공동체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주인의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마음에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녀석에게 모든 것을 맡겨도 되겠구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을 그에게 주면 되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통해 큰 것까지 충성할 수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복의 통로로 세우십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게 큰일을 맡겨 보세요.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줄 알아야 큰일도 충성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구나! 잘하였도다. 이제 내가 네게 큰 것을 맡기리라.” 이것이 모든 인생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지켰기에 요셉은 가정총무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드디어 열매가 맺혀졌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창세기 39:5) 

성경은 요셉이 가정총무가 되어 보디발 집의 모든 일을 주관하게 된 그때부터 그 사람의 집에 복이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해서’ 복을 주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사랑함으로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축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서 우리 가정이 복을 받고 있습니까? 내가 직장에 다녀서 그 직장이 복을 받고 있습니까? 내가 교회 나와서 사랑하고, 충성함으로 우리 교회가 복을 받고 있습니까? 내가 서울 시민이고 대한민국 국민이여서 이 백성과 이 나라가 복을 받고 있습니까?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축복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축복 받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사람을 통해서 축복이 나타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성경이 계속해서 말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삶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기도하며 시작해 보십시오. 일하면서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가슴으로 받으면서 주님의 사람으로서 나가 보십시오. 

아마 이때 요셉은 자신이 국무총리가 될 것을 꿈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비밀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맡은 일을 하나하나 잘 감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축복의 통로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도 이 놀라운 축복을 받아, 있는 그 자리에서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주님과 함께 한걸음씩 내딛는 주님의 귀한 자녀, 하나님의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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