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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말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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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말 1:1-5)

말라기서는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3차에 이르는 귀환을 하게 됐으며, 어려운 상황에서 성전을 건축하고 성곽을 다시 쌓았으며 새로운 신정국가를 이루기 위하여 힘써왔던 B.C.432년경에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꾸짖고 다시 메시야 도래의 소망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당시는 바사제국의 식민국가로써의 각종 세금 납부 의무와 거듭되는 가뭄과 병충해, 특히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논밭과 포도원이 황폐화 되었으며 이사야나 학개 스가랴 등을 통하여 예언하신 메시야왕국의 즉각 임재할 것을 믿었는데 귀환이후 100여년이 지났는데도 실현되지 아니함에 대한 의구심과 경건생활 자보다 불의한 자들의 득세로 인하여 신앙이 극도로 피곤한 지경에 이르게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로 제시하신 그 첫째가 야곱을 선택하시고 사랑하셨음을 상기하신 것입니다. 현실의 곤고함에 지쳐서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나이까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모든 면으로 장자로서의 하나님의 복을 계대할 자격이 있었지만 에서를 버리시고 야곱족속이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실력이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사 선택하심이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창 25:23, 롬 9:10-1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소원이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벧전 1:18-21, 딤후 1:9, 엡 1:3-2:10).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택하시고 그 사랑이 우리를 십자가로 속량하사 허락하신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데 우리는 현실의 어려움을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심중에 빠진 일은 없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시 73, 23편).

두 번째 증거는 에돔족속은 심판하사 아주 멸하셨지만 이스라엘이 잘못했을 때에는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심판하사 징계하시지만 고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사랑하심의 증거로 제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어려움이라는 시험의 현실을 조성하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실력이 모자라서 이거나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결단코 아닙니다(요 14:1-3, 눅 10:3). 

또한 우리의 분깃은 이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형상을 닮은 하늘나라의 실력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기 위한 연단의 훈련의, 상급을 마련하게 하시기 위한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감사가 식어지고, 원망과 불평 낙망이 생겨지며,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뜨거움이 식어진 증거이니 우리는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계 2:1-7). 우리의 신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롬 8:31-39, 요일 4:9-10)

오늘 본문에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건축하고 난후 나태함에 빠집니다. 그리고 지쳐있었습니다.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들은 이야기합니다. 

"진짜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요한일서 4장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은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의심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간단합니다. 이들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과 사랑한다고 했지만 돌이켜 보니 좀 더 나은 게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안 믿는 바벨론에게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으니 당연하지요. 그러니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목사의 부축을 받으며 강단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앞으로 3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불만에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왜 다른 사람에게는 긴 삶을 허락해 주시면서 저에게는 이렇게 짧은 생명을 허락해 주십니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요즘엔 심한 고통이 있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에 찬 기도를 드렸습니다. '왜 짧은 생명에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고통까지 주십니까?' 그러다가 어제 저녁에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큰 것에 대하여는 더 이상 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에게 오늘 이 밤만이라도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침대에 들었는데 놀랍게도 저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햇빛이 창문으로 비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수면제 없이 긴 밤을 편안히 지낸 것입니다. 나는 이 조그만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상 우리에게는 이런 일들은 감사의 조건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은 살아갑니다. 살아가며 문제를 만납니다. 그러기에 현명하게 살아가는 길이 요청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너지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 입술과 삶에서 감사가 사라지면 "아! 내 신앙이 무너졌구나!" 생각해도 좋다는 말씀입니다. 희한한 것은 불평하는 사람은 불평할 꺼리만 찾습니다. 본당이 환해요! 무슨 교회가 돈이 많다고 이렇게 불을 켜! 아이 어쩐지 교회가 환해서 좋다. 불평하는 사람은 비가 오면 짜증냅니다. "아이! 오늘 길이 질꺼야!" 감사하는 사람은 "농사에 도움이 되겠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감사를 할 수 없습니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비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를 내는 것은 애굽과의 비교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숨을 돌리는 찰나 멀리서 애굽 군대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옵니다. 한 손으로 가축을 몰아치며 한 손으로는 어이들을 끌고 달려가다 보니 넓은 광야를 가로질러 홍해가 놓여 있습니다. 구름 기둥, 불기둥이 온데 간데 없습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애굽이 더 좋습니다. 원망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롱다리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몇 미터인가요? 살이 찐 것을 키에서 몸무게를 빼서 110으로 맞추었습니다. 상품적으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에베소서 2:장 10절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작품입니다. 작품은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백남준 아트비젼 그것이 작품입니까? 작품이라니까 그냥 감동 받으려고 하지 골동품에 망가진 텔레비젼 싸놓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비교의식은 우리를 불평하게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대들게 됩니다. 바벨론과 비교한 이스라엘 위기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가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이 안들립니다. 도리어 그 말에 강한 불평과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팽이를 쳐보면 팽이가 잘 돌다가 중심이 한 번 떨리기 시작하면 그 팽이는 주저앉고 맙니다. 그러나 옆으로는 곧장 쓰러질 것처럼 기울어져도 중심이 바로 서있으면 그 팽이는 바로 살아납니다. 위기에 부딪혔을 때 중심이 흔들리는 사람은 쓰러집니다. 그러나 중심이 분명한 사람은 넘어지는 법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말라기 선지자가 보게 됩니다. 

1절에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기서 "경고"라는 뜻은 "짐"이요 "부담감"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고 마음 가운데 부담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껴 본 자들은 당연히 부담감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고 우셨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보면서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역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교회에서 부담감 느끼지 않아서 좋다고? 그것은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난 부담감이 오면 불평하고 불만할 것이라!" 말입니다. 많은 교회가 어려운 이유는 교인들의 부담감 때문입니다. 너무 인간적인 부담감을 느낍니다. 거룩한 부담감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담감! 느껴야합니다. 당연합니다. 어떤 부담감입니까? 복음이 내게 있고, 보화가 내게 있는데 어찌 보화를 보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마음이 없습니까? 

열왕기하서에 보면 사마리아 성이 완전히 적군에 에워쌓여 성안에 먹을 것이 없어 아이까지 잡아먹는 일이 생겼습니다. 성밖에 문둥병자 네 사람이 아람 진영에 내려갔다가 아람 군대들이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도망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나름대로 챙긴 다음, 오늘 기쁜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이 소식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 하며 가서 전합니다. 이런 것 전하지 않는 그것이 문제인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오죽했으면 '빚진 자'라고 하였을까요? 오죽했으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물어봅니다. 왜 목사가 되었냐구? 그럼 대답합니다.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당신은 무얼 하겠냐구요? 믿는 자들은 당연히 부담감이 있습니다. 왜 안 믿는 분들의 옆집에 이사왔습니까? 왜? 안 믿는 가정에 시집왔는가? 부담이 있어요! 나와 상관없는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부담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부담감이 우리에게 있어서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말라기는 이런 부담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사실 한사람이 바뀌면 전체가 변화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명의 사사가 제대로 서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있게 됩니다. 한 명이 깨달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옮겨집니다. 교회도 불 받은 사람이 있어서 온 교회로 불이 붙으면 동력이 생깁니다. 복음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야 교회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본문도 마음의 부담감을 통해 말라기 선지자에게 불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라기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부담감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께서 주신 부담감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분명한 부담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인지, 아니면 사역인지, 아니면 어떤 봉사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담감을 통해 일을 벌이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질문을 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는 물음을 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역사를 통해 설명을 합니다. 이 예화를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하신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볼 때 에서가 잘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릅니다. 에서는 존재자체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포로 된 유다 백성은 살아남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있던 큰 아들은 모든 것이 불만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지만 그런 것은 다 모릅니다. 단지 동생의 잔치만 생각합니다. 자기만 무시당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 하나님 믿는 사람들 바보지요! 이 시간에 나가 돈 벌어보세요. 다른 사람들 차를 타고 여행을 즐기는데 교회 와서 졸고 있습니다. 책 한 장 더 보면 모두 장학생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십일조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는 당연히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십분의 일을 바치면 못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은 믿는 사람들은 목표가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정열과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뱅뱅 돕니다. 소풍가서 많이 하는 게임 중의 하나가 눈을 감고 나 잡아 봐라! 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잡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방향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윤회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직진으로 가려고 하지만 눈을 감고 가게 하면 엉뚱한 데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노래하면서 놉니다. 늙으면 안 놀겠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됩니까? 불신자들은 전진한다고 전진합니다. 그런데 제자리입니다.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은 바보 같지요, 더딥니다. 그런데 바뀝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순종하다보면 전진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서만 맴돌았지만 얼마나 우리가 축복을 받았습니까? 가정을 보십시오, 몇 년 전을 기억해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합니까? 어떻게 고난이 우리에게만 있을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히브리서 12장 6절-8절에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리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징계해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포도나무에 열매를 얻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나무를 잘라버려야 열매가 열립니다. 사업이 너무나 잘 됩니다. 어떻게요? 주일날 쉬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자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르십니다. 

십자가를 체험하지 않고 부활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학교가 있습니다. 경남 거창 고등학교입니다. 입학을 하려고 전세버스가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이 인정받는 것은 서울대를 많이 보내서가 아닙니다. 그 학교의 교육철학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정신과 십자가의 보혈이 뚝뚝 묻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학교의 '직업 선택의 십계'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많은 사람이 앞 다투는 곳으로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학교의 철학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마귀가 무서워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귀가 무서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시험만 보면 1등 하는 사람? 돈 많이 버는 사람? 학문을 많이 한사람? 아닙니다. 마귀는 겸손한 사람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희생하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온갖 낙심과 시험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하는 자를 가장 무서워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이일에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야 합니다. 받은 바 은혜와 사랑을 간직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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