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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심을 잃는 이유 (신 3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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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을 잃는 이유 (신 30:11-14)

1. '초심'(初心, original resolution)은 '처음 품었던 마음'을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좋은 마음(good intention)을 가리킵니다. 흥미롭게도,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할 때면 우리는 선한 뜻, 좋은 의도를 가지고 다짐을 합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참되게 사랑하며 살기를 다짐하고 시작합니다. '대충 살다가 안 되면 그만 두지'라고 생각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긴, 그런 사람이 없진 않았습니다. 2009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 마크 샌포드(Mark Sanford)가 그 예입니다. 그는 아주 지성적이고 매력적인 아내를 속이고 오래도록 외도를 즐겼습니다. 그 사실이 드러나 주지사 직에서 사퇴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그 아내 제니 샌포드(Jenny Sanford)의 회고한 바에 의하면, 마크 샌포드는 결혼식을 할 때 결혼 서약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결국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내 사전에 이혼은 없다"고 결심하고 시작해도 속절없이 깨어지는 것이 결혼인데, 그런 결심도 없이 시작했으니, 그 결혼이 온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혼만이 아닙니다. 공부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새로운 직장에 취직할 때도 그렇습니다. 누구나 처음 시작할 때는 아주 좋은 의도로 시작합니다. 목회나 선교와 같이 특별한 일을 시작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개는 거룩하고 순수하고 좋은 의도로 시작합니다. 평생토록 신실한 종으로 살기를 다짐하며 그 길에 들어섭니다. 그것이 초심입니다.

그런데 그 초심을 지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먹은 마음을 그대로 지킨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업을 새로 시작할 때의 그 마음이면 사업에 실패하지도 않을 것이고 돈을 만이 벌어도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산다면 그 사람이 섬기는 교회가 얼마나 은혜롭겠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세례 받을 때의 그 마음으로 산다면 교회마다 천국의 향기를 풍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통해 인간 본성의 이중성을 발견합니다.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할 때면 누구나 선한 의도를 품는다는 사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거룩하게 지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잘 해 보려는 의지, 제대로 살아 보고 싶은 마음, 좋은 일을 이뤄 보고 싶은 뜻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주신 거룩한 본성이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 좋은 뜻을 끝까지 유지하고 실천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에 곯아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마 26:41)

이것이 인간의 실존 상황입니다. 거룩한 열망은 있지만 그렇게 살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거룩하게 살기를 포기하고,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처방을 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매일 번민하며 살아갑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말은 거룩하게 살기를 열망하며 그렇게 살도록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이 문제를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믿음의 길에서 한숨과 탄식으로 우울하게 나날을 지낼 수 있습니다.


2. 오늘 읽은 신명기(Deuteronomy)는 모세의 설교 묶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의 광야 방랑을 마치고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전해 줍니다. 온갖 잡신을 섬기며 부정하게 사는 가나안 주민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살도록 준비시키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 모든 계명을 전달 해 준 후에 결론처럼 덧붙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의 본질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11절)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laws and commandments)이 얼른 보면 그들의 능력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어렵고 부담스럽고 힘겹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12-13절)

여기에서 모세는 장차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 들이 댈 핑계를 예상하여 미리 일침을 가합니다. 누군가 하늘에 올라가서 계시를 받고 내려 온 것처럼 신령하게 말씀을 쪼개어 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율법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핑계할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멀리 외국에 나가 학문을 배워 깊이 있게 설교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잘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핑계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모세는 다음 절에서 밝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14절)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씀은 "당신들의 능력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이상한 부담을 지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알고 보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명령대로 살 때 인간은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며 행복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계명들을 찬찬히 읽다 보면, 우리의 마음에는 "그래,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살면 온 세상이 행복할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로, 십계명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인간답게 살게 하고 가장 자유하게 하며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며 사는 것보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하고 자유하고 인간답습니다. 악착같이 모으며 사는 것보다 이웃과 나누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쉽고 편합니다. 

스스로 신이 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더 인간답고 자연스럽고 자유하며 행복합니다. 율법은 그렇게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편하고 행복한 길을 안내하는 도구입니다. 그것을 따르기 위해 고차원의 학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신비한 계시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보통의 지능과 상식만 있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율법을 읽으면서 "그래,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동의하기는 했지만, 막상 그렇게 살기에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인간이 가장 행복해지는 길임을 아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우리의 본성에 자연스러운 것을 외면하고 불편한 것을 찾습니다. 우리의 본성에 가장 편한 것을 거부하고 불편한 것을 따라갑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에 등 돌리고 불행하게 할 것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어렵고, 불편하고, 무겁다고!


3.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문제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초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열망하며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초심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율법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첫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초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의 마음은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저절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대로 놓아 두면 죄의 길로 기울어지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죄가 이끄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다짐하고 결심해 보지만, 그 결심이 얼마 가지 못하여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것을 우리는 해마다 '새해 결심'(New Year Resolution)을 하면서 경험합니다. 또한 문득문득 "초심을 잃었구나!" 싶은 경험을 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타락성을 확인하곤 합니다.

미국에서 발행된 초대형 베스트셀러 중에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이 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풀검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훈들은 대학의 상아탑이 아니라 유치원의 모래성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만 잘 행해도 우리 각자와 우리 사회는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나누어라. Share everything.
공정하게 행동하라. Play Fair.
남을 때리지 말라. Don't hit people.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Clean up your own mess.
내 것이 아니면 가지지 말라. Don't take things that aren't yours.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 Wash your hands before you eat.
변기를 사용한 뒤에는 물을 내려라. Flush

저는 풀검이 나열한 항목들을 읽으면서 감탄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가 행복해지고 인간 사회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박사가 배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배워 알고 있는 기본적인 규칙만 잘 지키면 됩니다. 인생과 사회에 가장 중요한 원리는 대단한 것도 아니고 생소한 것도 아니라, 우리 입술에 있는 것이고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며 우리 손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고차원 방정식은 잘 풀어내면서 이 기본적인 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잘 지켜야 하는데, 더 지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나누어라? 어른들의 세상은 '승자독식'(Winner-Takes-All)의 사회입니다. 
공정하게 행동하라?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자기의 이익만 따집니다.
남을 때리지 말라? 법이 무서워 그렇지, 하루에도 여러 사람 때려 눕혔을 겁니다.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어른들이 놀다 간 자리를 보십시오. 아이들이 놀다 간 자리보다 더 지저분하고 어지럽습니다.
내 것이 아니면 가지지 말라? 남의 것을 통째로 먹으려고 머리를 굴리고 침을 삼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으라? 나이 들수록 씻기를 귀찮아 합니다. 
변기를 사용한 뒤에는 물을 내려라? 흘리지나 말면 다행입니다.

왜 이럴까요? 이렇게도 쉽고 이렇게도 자연스러운 것을 왜 나이 들수록 더 못할까요? 왜 지식과 능력에서는 뛰어난 어른들이 기본적인 미덕에 있어서는 어린 아이만 못할까요?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귀찮은 것은 아무 것도 손 대기 싫어하며 자기 좋을 대로만 살려는 어른들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요? 하늘의 계시가 필요한 것일까요? 외국의 지식이 필요할까요? 문명이 더 발달되어야 할까요? 더 좋은 약이 필요한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은 동일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고쳐지지 않는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토착민들이 즐기고 있던 죄악에 그렇게도 쉽게 빠져 들어간 것처럼, 그리고 작심을 하고 나서 사흘도 되지 않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삼촌들처럼,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결의를 다진다 해도 초심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면, 나이 먹는다는 것은 망가진다는 뜻이요, 철 없어진다는 뜻이며, 고집불통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꼰대'라고 합니다.


4. 바울 사도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이 들수록 꼰대로 타락하도록 자신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 최고의 이스라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조건도 있었고 또한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빌 3:5-6)

이렇게, 율법에 대해 자부하고 자신에 대해 자신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율법이 짐이었습니다. 부담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치 매일 죽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끊임없이 그의 본성과 충돌했습니다. 너무도 불편하고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5절)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19절)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22-23절)

바울 사도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 받기 전에 자신이 겪었던 내적 갈등과 고민에 대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강력한 열정이 있었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번민 끝에 사도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4절)

이렇게 매일의 분투와 번민 가운데 살던 바울 사도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는 마침내 자신을 죽음의 몸에서 건져 주실 구원자를 만났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 매일 거룩한 동행을 즐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본성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옛 사람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 새 사람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율법이 더 이상 무겁지도, 불편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아니, 율법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다"(롬 10:4)라고 적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안에 거룩한 생각을 불어 넣어주시며 그것을 열망하게 하시고 또한 행하게 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기억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28-30)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율법의 짐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죄 된 본성을 치료받지 않은 채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좋은 일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은 나이가 들수록 감퇴하는 우리, 무슨 일을 시작할 때면 잘 해 보겠다고 다짐하지만 번번이 초심을 잃어버리는 우리, 그리고 거룩하고 고결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제로는 부정하고 추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영혼의 안식과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늘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거룩하게 살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극심한 영적 짓눌림을 겪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의 거룩한 동행을 살다 보면,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의 마음은 죄의 감염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안식과 만족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는 생각과 열망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답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행복합니다. 


5.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대해 우리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접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분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능력의 공급원일 뿐입니다. 이렇게 믿고 사는 분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뜻한 바대로 되지 않아서 탄식으로 기도해 본 적은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루기 위해 죄에 오염된 본성과 씨름하며 탄식으로 기도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스스로를 생각해 보기에 자신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면, 심각하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은 우상 숭배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루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죄에 물든 본성의 힘이 너무 강하여 바울 사도가 고백한 것과 같은 영적 짓눌림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분들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인 것은 알지만, 미움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거룩하고 성결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은 알지만, 음란하고 부정한 것을 탐하는 마음에 이끌립니다. 나누고 베풀며 사는 것이 바른 줄은 알지만, 이기심과 탐심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면 늘 죄스럽고,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만일 스스로 생각해 보기에 자신이 여기에 해당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동행을 더욱 힘써야 합니다. 주님과 온전히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옛 사람이 아직 주권을 휘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주님께 주권을 내어 드리시고, 매일 성령의 은혜를 구하시며,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서서히 그러나 필경 영적 짓눌림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셋째, 여러분 중에는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매일 사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무런 거침이 없으며 또한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사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잘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믿음이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1)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불편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 나누고 베풀지 않고는 불편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 낮아져 섬기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자유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은 존재이고,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완전히 죽지 않았고, 악한 자는 호시탐탐 우리를 넘어뜨릴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크게 넘어집니다. 영적 방심과 영적 교만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에 금이 가지 않도록 늘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할 수 있으며, 그 상태에 늘 머물러 살 수 있습니다. 초심을 잃었다 하여 한탄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매일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고, 편하고, 쉽게 느껴지기를, 그리고 그로 인해 가장 행복한 삶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 주님,
죄에 오염된 본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쳐온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저희의 전부를 내려놓습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주시고
새 사람으로 지어지게 하소서.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사모하게 하시어
거룩한 삶의 길을 가게 하소서. 아멘. 

(김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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