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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사람의 공평기준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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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의 공평기준 (마 20:1-16)


우리 인간들은 누구에게나 소원이면서 고민이 두 가지 공존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고 싶은 소원입니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서 나도 살고 싶고, 다른 사람이 가진 소유를 나도 갖고 싶고, 다른 사람이 누리는 영광을 나도 누리고 싶은 상대적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롤모델(Role Model)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사람과 같이 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은 행복의 자리에 왔을 때 그때가 되면 이제는 또 다른 욕망이 고민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은 욕망으로 변합니다. 무엇인가는 특별한 것을 소유하고 싶고 조금이라도 우월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같지 못한 불행이 해결되니까 이제는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이 불행의 조건으로 느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뉴욕에 부흥회를 하러 간 적이 있는데 식사 초대한 집은 굉장히 잘 사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 주인이 하는 사업을 저에게 소개했습니다. 옷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옷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도매로 팔아넘기는 옷장사가 아니고 일 년에 옷을 몇 십 벌 정도만 만들어 판다고 합니다. 아주 유행 감각이 좋은 특수 옷감을 가져다가 절대 조건 하나를 가지고 옷을 만드는데 똑같은 옷을 다시 만들지 아니하는 조건으로 맞춤형입니다. 그러니까 유명인들이 너도 나도 그 집에서 옷을 만들어서 옷 한 벌에 수천만 원씩 합니다. 그래도 밀려드는 일감이 항상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만든 옷은 그 사람 밖에는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안 만들기로 약속을 하고 비싼 값에 판매합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백화점에 가서 옷을 하나 잘 사 입었는데 다니다가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사람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남보다 특별하고 싶은 하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끝없이 이 평등하고자 했던 역사와 공평의 정의가 늘 문제가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주인과 고용인의 공평과 평등의 문제가 불편해진 이야기로 나타났습니다. 먼저 시대적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나라의 특산물 가운데 포도가 유명합니다. 기후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열대 기후라서 포도 생산의 가장 좋은 기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잘됩니다. 성경 말씀에 유난히 포도원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그 지방의 특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포도 농사는 여러 가지 기술이 필요한데 가지치기를 잘해야 되고 거름주기를 잘해야 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수확기 선택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며칠 햇볕을 잘 받아야 하는데 그 며칠이 매우 중요합니다. 

몇 시간만이라도 그 햇볕을 받으면 맛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문제는 조금만 너무 익으면 떨어지는 경우가 많고 상품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아주 잘 선택하는 것도 기술이라고 합니다. 또, 유대 나라의 포도 수확 시기는 바로 우기가 닥치는 계절이라서 포도 수확기는 포도 농장 주인들이 신경을 많이 써야 된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 포도원주인은 아마도 결실기에 접어든 포도 농장에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 거 같이 보입니다. 하루 종일 일군을 모집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마켓플레이스(Marketplace) 인력시장이라고 합니다. 

외국에는 이런 시장이 동네마다 있습니다. 저도 교회 건축할 때 밴 차를 몰고 가서 “오늘 하루에 얼마씩 줄 테니까 건축 노동에 일할 사람!” 소리치면 새까맣게 몰려듭니다. 그러면 투입해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는 약속한 임금을 주고 보내는 일을 건축 끝날 때까지 해본 일이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다섯 가지 종류의 일꾼이 포도원에 투입됩니다. 이른 아침, 제3시, 제6시, 제9시, 그리고 제11시입니다. 유대나라 문화의 시간 개념은 오전 6시를 0시로 계산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3시는 오전 9시가 됩니다. 제6시면 낮 12시고 제9시가 오후 3시이고 제11시는 오후 5시가 됩니다. 일은 오후 6시에 끝이 납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일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건강한 사람의 하루 노동의 삯은 한 데나리온씩 정하고 있는데 우리 돈으로 약 10만원씩입니다. 그 사회에서는 그렇게 주면 누구든지 노동하겠다고 말들을 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 포도원 주인으로 표현된 사람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설교의 목적이 돈 버는 방법을 가르친다거나 노동 계약법을 설정하시거나 포도 수확에 관심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포도원인 세상에서 일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왜 사는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정의가 나왔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 산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중남미에 이민가면 거의 가 성공합니다. 돈을 잘 법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중남미 사람들은 놀기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돈을 그렇게 많이 벌어서 뭐하느냐?” 결국 재미나게 놀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인데 그 돈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틈에 돈 벌기를 좋아하는 우리 한국 사람이 들어가니까 자연히 돈을 벌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주인은 지금 자기 포도원 밭과 노동자들이 몰려있는 이 인력시장을 하루에 다섯 번이나 왕복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최대 관심이 뭔가? 놀고 있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생각해 보면 오후 5시면 이제 하던 일도 정리하던 때입니다. 그 시간에 노동자를 투입하는 주인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주인은 마지막 시간까지 찾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일을 하라고 시키고 마침내 그 시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볼 때 이 주인은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놀고 있는 사람의 노동력도 평가한 적이 없습니다. “너 무슨 일 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현장에서 “너 왜 게으르게 그렇게 하느냐?” 이런 참견하는 게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그런 일 하는 그 자체만이 주인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생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포도원이라는 이 세상에서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일을 하기를 소원하시며 시간적으로 내 인생은 이제 오후 5시라 일을 해봤자 한 시간 그럭저럭 하다가 끝나는 그런 시기가 되었다 하여도 하나님은 일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하나님 백성됨의 가치는 엿새 동안 네 모든 일을 힘써 행하고 있는 창세기의 이 일에 대한 철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사느냐?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아무 쓸데도 없다고 판단하고 이것은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규정해서 멸시하던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놓고 죗값의 논쟁을 벌일 때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가 이렇게 된 것이 자기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이 사람도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그 나름대로의 선한 일이 있어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중한 인생관을 잊어버리고 인생을 포기하듯 빈들빈들 놀고 있는 자에게 주인은 하루 종일 부지런히 왕래하면서 일감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이제 오후 5시라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할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주인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 많은 사람은 하루 동안 일하는 기쁨 속에 시간이 잘 지나갔습니다. 저녁이 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한 것 때문에 그 자리는 매우 불편스러운 말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의 보상을 똑같이 한 것이 불공평의 문제로 터진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오늘 말씀의 내용은 누가 판단해도 공평하지 않습니다. 합리성이 결여된 최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문화개념에서는 절대 맞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는 출근해서 입구에 타임카드를 꺼내서 내 이름이 적힌 카드를 타임기계에 ‘찰칵’ 대면 하루에 몇 시간 몇 분 몇 초 일했는지 다 계산해서 그것에 의해서 합산해서 일한만큼 보상하는 문화입니다. 가끔 우리들은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보면 아무래도 예수님은 수학에 별로 관심이 없으신 거 같습니다. 헌금 많이 한 사람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쓰는 동전에서 가장 낮은 두 렙돈을 헌금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가장 많이 했다.”라고 평가하신 적도 있고, 막달라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의 옥합을 깨뜨릴 때도 가룟 유다는 합리적인 계산을 금방 하는데 예수님은 합리적 계산하는 가룟 유다를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양 아흔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가 더 소중하다는 분위기의 설교도 하시고 제가 생각할 때 재정 부장은 요한에게 맡기셨으면 아무 문제가 없으셨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맡기셔서 괜히 손해를 많이 보셨습니다. 오병이어 오천 명 먹이실 때도 계산을 잘못하셨는지 12바구니나 남았다고 했습니다. 수학은 별로 관심이 없으신 거 같습니다. 

여러분! ‘사자의 공평’이라는 동물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늑대와 사자와 여우가 팀을 이룹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팀을 이루어야 한다.” “그럽시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늑대야! 너는 뛰기를 잘하니까 온 산을 뛰어다니면서 먹잇감을 다 튀어나오게 하라. 토끼도 튀어나오게 하고 노루도 튀어나오게 해라. 그러면 튀어나오는 대로 내가 잡아 죽이겠다. 여우야! 너는 내가 죽이는 것을 다 한군데로 모아라.” “그렇게 합시다.” 그래서 셋이 힘을 합쳐서 일을 했더니 토끼가 수십 마리가 잡혔습니다. 사자가 늑대에게 말했습니다. “늑대야, 먹자. 공평하게 세 사람 몫을 나눠라.” “네! 사자 한 마리, 늑대 한 마리, 여우 한 마리!” 계속 똑같이 나눈 후에 “모두 나눴습니다.” 사자가 “이게 공평이냐?” 

“네!” 와락 달려들어서 늑대를 물어 죽였습니다. 여우에게 “네가 다시 나눠봐라.” 여우는 큰일 났습니다. ‘아니, 늑대가 공평하게 했는데?’ 잘못하면 자기도 죽을 거 같았습니다. 여우는 여우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에이, 모르겠다.’ “사자 10마리, 나는 1마리, 사자 10마리, 나 1마리!” 사자가 “껄껄껄!” 웃으면서 “공평하다. 이제 먹자.” 먹고 났는데 여우가 아무래도 이상하거든요? “사자님! 사자님은 10마리, 나는 1마리를 먹었는데 이게 왜 공평한 겁니까?” 

“너는 하루에 1마리만 먹어도 돼. 나는 10마리를 먹어야 배가 불러. 이게 공평이야.” 그래서 그것을 ‘사자의 공평’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공평과 불공평의 이야기는 아주 많이 나옵니다. 탕자 비유도 같은 내용이 됩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공평을 항의하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거늘 염소새끼 한 마리도 내 친구와 즐기게 하지 아니하시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친구와 함께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매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것이 공평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저런 나쁜 놈은 아버지 집에서 내쫓아버려야지 무엇을 잘했다고 죄 짓고 돌아온 놈을 금가락지를 끼우고 비단 옷을 입히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하시나이까? 그러면 나도 일찌감치 저 놈과 같이 탕진하고 돌아올 것을 괜히 여기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합리성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정도 그럭저럭 끝마무리만 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공평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평은 그 목적이 구원에 있습니다. 한 시간만이라도 포도원에 와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좀 늦기는 했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삶에 동참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우리 일반 사회나 국가도 법의 정신은 뚜렷합니다. 모든 인간이 최대 공약서로 행복한 삶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악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면 이 하나님의 법 정신을 이해할 때 함께 살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모태 신앙이 많습니다. 80세가 되신 분은 8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헌금했습니까? 교회 봉사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많이 애태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까? 죄 짓지 않으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고 80년 동안 보내셨습니까? 그래서 구원 받은 인생이 되어 영생을 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기 10분 전에 구원 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떡합니까? 저는 그런 사람에게 병원에게 가서 많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과 같이 달렸던 흉악범은 평생 흉악범입니다. 죽기 몇 분 전에 말 한마디 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는 구원의 약속을 얻어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공평한 것인가? 모태 신앙자들이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도 평생 망나니로 살다가 죽기 전에 회개 한마디 하고 구원 받을 것을 일평생 내가 교회 봉사한 것이 얼마인데 마음 상한 게 얼마인고 얼마나 많이 헌금을 했는데….’ 불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기 나타난 인간의 심리를 보자면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마음이 은혜스럽지 못해서 나에게 아무 손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싫은 것입니다. 

여기 주인이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너를 내 포도원에서 일을 하라고 불러준 것이 잘못이냐? 너와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내가 약속대로 지불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한테 무엇을 잘못했느냐? 너의 불평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형제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괴로운 거 아니냐? 그것은 내 뜻이지 네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이게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탕자 비유에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볼 때 이렇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큰 아들이 더 복되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너는 쓰지 않았을 뿐 네 소유는 여기 다 있도다. 타락하지 않고 재산 허비하지 아니하고 착하게 살아온 네가 더 복이 있는 사람이지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네 동생이 더 복된 사람이냐? 그러면 너는 타락하지 못한 것이 불평이냐?”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온 그것이 더 복된 사람이지 평생 죄 짓다가 마지막에 구원받은 강도가 부러운 것이냐?” 지금 포도원 주인은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내가 이른 아침에 만났기 때문에 하루 종일 행복하게 일했소. 

이렇게 일을 하면 저녁에 한 데나리온의 돈을 받아서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돌아간다는 기쁨 속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소. 그러나 저녁에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은 아침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정말 괴롭고 불행하게 시간을 보냈소. 아! 오늘도 허탕인가? 일을 해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장소에 가장으로서 아버지가 임금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텐데 오늘도 틀렸구나. 아! 이 빈손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어떻게 돌아가나. 하루 종일 그런 마음으로 고통 받았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행복했느냐? 생각해보라.” 인간은 본래 마음이 은혜롭지 않아서 남에게 가는 혜택을 싫어합니다. “다만 적게 일한 사람들에게도 내가 한 데나리온씩 준 것은 그 친구들도 이 저녁에 그 정도의 돈은 가지고 들어가야 가족과 함께 행복한 저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면서 혜택을 준 것이다. 그것이 왜 네 괴로움이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이 사람들에게 주는 혜택은 내 뜻이니라.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것이 나의 공평이다.” 자비를 기초한 공평입니다. “네가 더 행복했다.” 

보십시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경우를 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가난합니다. 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아무 거나 맛있게 잘 먹습니다. 길거리에서 국수 한 그릇을 5분 안에 다 먹어치웁니다. 자장면 곱빼기로 시켜서 10분 안에 다 먹습니다. 어쩌다가 갈비가 생기면 3인분 정도 거뜬히 먹어치웁니다. 그 사람은 당뇨, 콜레스테롤이 무슨 소리냐고 아무 것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재벌입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인지 먹지 못합니다. 그렇게 영양사가 와서 영양가를 따져서 비싸게 맛있는 고급 음식을 두 숟갈 먹어보고 안 먹겠다고 합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음식이 무용지물입니다. 

누가 더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공평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평생을 불행하게 삽니다. 은혜의 개념에 하나님의 축복을 내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남보다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평한다면 그것은 오늘 이 포도 농장에 불평하는 일꾼들과 똑같습니다. 일을 많이 한 노동자들이 그날 주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주인이시여!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인이 오늘 저희들을 써주지 않으셨다면 하루 종일 고통스러우셨을 터인데 저희들을 써주셔서 이렇게 행복한 열매를 손에 쥐고 집에 가게 되었으니 너무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써주시면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런 말입니다. 일을 적게 한 사람은 “주인이시여! 주인은 자비의 주인이십니다.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하루 종일 일한 품삯을 주시니 정말 황공합니다. 다음에 써주시면 오늘 못한 것까지 저희들이 열심히 일해 드리겠습니다.” 일꾼들끼리 집에 돌아가면서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있었다면 “형제여! 우리는 한 시간만 일하고 많이 받았으니 당신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아니요.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복하게 일했소. 바로 이 저녁을 생각하면서 말이오. 

그런데 형제는 오후 5시까지 일감이 없어서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소? 오늘 우리들은 주인을 잘 만났소.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이것을 들고 가서 빨리 행복하고 따뜻한 저녁을 맞이합시다.” 이렇게 되어졌다면 주인은 더욱 기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가 없는 인간 기준은 내 혜택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혜택이 고난스러운 것입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소.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상상해 보건데 이 포도원 주인은 그 다음부터는 불평한 사람들은 써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그 자체만이 우리는 감사하고 오늘 이 하나님의 자비의 말씀이 우리 모두의 영혼을 풍성하게 하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근본적으로 우리들은 마음이 은혜스럽지 못하고 자비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미워하는 괴로운 생애를 살아가고 있나이다. 성령께서 저희들의 마음에 임재하여 주셔서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비와 은혜를 기초로 해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주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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