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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광야, 그곳에서 뭘 감사할 일이? (시 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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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그곳에서 뭘 감사할 일이? (시 52:1-9)  

맥추감사절을 준비하고 있는 저의 눈에 한 자매가 보내온 초록색 편지가 몇 번이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편지 속의 남편은 지난 1월 제2자유로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심각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는 90%이상 살 수 없다고 했는데 그 후 몇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졌고, 이번에 일산병원으로 옮겨서 다시 수술 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내는 짧은 편지에서 무려 17번이나 ‘감사’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남편을 간호해온 아내의 입에서 나온 ‘감사’이기에 무척이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는 3천 년 전 인물을 조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다윗이라는 퍼즐(puzzle)을 맞추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2편 9절을 보면, 다윗이 지금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맥추감사절을 맞이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확신합니다. 

시편 52편 표제를 보면,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놉 제사장 아히멜렉을 통해 떡과 칼을 제공받았는데 그 현장에 공교롭게도 사울의 목자장 도엑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를 사울에게 고해바치자 사울은 즉시 제사장 아히멜렉뿐만 아니라 그의 일가 85명 전부 살해를 명령합니다(삼상 22:18). 이 명령의 선봉장이 된 이가 바로 도엑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시편 52편입니다.

그래서인지 다윗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격정적인 어투를 토해내고 있습니다(시 52:1-3). 여기 2인칭 ‘너’에 대해 당연히 모두가 ‘도엑’을 떠올리는데, 과연 도엑일까요? 첫째, 다윗은 천성적으로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52편만큼 분노를 표출하는 시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둘째, 도엑은 사울의 ‘목자장’입니다. 재무부장관, 왕의 직속 부하입니다. 부하가 상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임을 잘 알고 있는 다윗이 도엑을 향하여 분노를 발하는 부분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셋째, 더 중요한 것 있습니다. 시편 54편은 52편과 상황이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격정적인 저주의 말들을 쏟아내지 않고 있습니다(시 54:1-2).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여기 2인칭이 누구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무엘상 21장, 그 현장으로 가봐야 합니다. 

다윗이 아히멜렉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왕의 특사로 은밀한 일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합니다(삼상 21:2). 교묘한 거짓입니다. 또 ‘이번 일이 보통이 아니다.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삼상 21:5). 또 ‘왕의 일이 급해서 칼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하면서 칼을 수중에 넣었습니다(삼상 21:8).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 거짓말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삼상 21:10). 그 날, 즉 거짓말한 바로 그 날, 거짓말의 결과로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까지 두려워하여 그는 미친 체하고 있습니다(삼상 21:12-13). 역시 거짓액션입니다. 거짓은 두려움을 안겨줍니다(창 3:10). 두려움 속에는 거짓, 범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초라하고, 비굴하고, 비참한 존재로 전락해버린 자신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한심한 자신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52편은 이와 같은 상황이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52편의 ‘너’는 바로 다윗 자신입니다. 자신을 자책하는 부르짖음입니다. 52편은 스스로의 가슴에 날카로운 화살, 비수를 내리꽂는 회개의 시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간사한 혀여’하고 있습니다(시 52:4). 2인칭의 ‘너’가 간사한 혀, 곧 자신의 거짓된 혀임을 밝힙니다. 하나님의 종 제사장 앞에서 잔꾀를 부리고, 줄줄 거침없이 거짓말을 내뱉었던 자신, 살기 위해서 미친 체하며 거짓행동으로 남을 또 속이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한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가 아닌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는 아픈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7:5).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향하여 채찍질을 하며, 거짓을 쫓아내었을 때, 그에게 찾아온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였습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주께서 무엇을 행하셨단 말입니까? 무엇을 영원히 감사한단 말입니까? 첫째, 죄 용서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합니다(시 52:1,8). 거짓말을 둘러대는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인자하심, 즉 죄 용서를 베풀어주심에 대해 다윗은 감사하고 있습니다(시 103:3-5).

둘째, 생명 있음에 대한 감사입니다(시 52:5). 당장 심판을 받아 마땅할 자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지켜주심으로 다시 주의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사모하고,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주심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에게 찾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 긍휼, 자비하심입니다. 이것이 왕의 자리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맥추절을 지키라’(출 23:16).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 전에 드리라’고 말입니다(출 23:19).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 광야에서 도대체 뭘 감사할 일이 있단 말입니까?”라고 고개를 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감사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다윗은 죄 용서해주신 것과 생명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동일하게 우리 또한 이 두 가지 감사를 오늘 하나님 앞에 표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설교가, 성서학자인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평소 지나는 골목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지반 죽게 되어 겨우 집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무사(無事)함을 당연한 일로 여긴 무지를 용서해주시고, 무사히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감사하는 여생이 되게 하소서.’ 그가 남긴 말입니다. “때로는 지루함을 느낄 정도의 자신의 평범한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요, 기적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도무지 감사할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나와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을 왕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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