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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엑스트라 콤플렉스 (시 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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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콤플렉스 (시 54:1-7) 

우리교회 교우 가운데는 민항기 조종사들이 꽤 많습니다. 여성조종사도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오래 전부터 ‘마의 11분(11minutes of crisis)’ 얘기를 듣곤 했습니다. 이륙 3분과 착륙 8분 사이에 사고위험성이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착륙 때 마의 시간이 거의 3배입니다. 착륙이 더 위험하기 때문에 더 긴장해야 합니다. 산악인들은 하산하다가 죽는 경우가 많아서 한결같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의 후반부에 더 긴장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다윗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논할 때마다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이 사울입니다. 소년 다윗은 지금 이륙중입니다. 반면에 장년, 아니 노년 사울은 착륙모드, 마의 8분대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은 착륙에 집중하기는커녕, 엉뚱한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는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요나단도 소용없었습니다. 신하 도엑에게 자신의 흉심을 드러내지만(시 52편), 또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본색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시편 54편 표제를 보면,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십’이란 지명은 ‘광야, 산골, 수풀’(삼상 23:14,15, 26:2), 즉 황무지라는 부연설명이 따라다닙니다. 왕궁과는 거리가 먼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 백성들이 왕궁까지 와서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고해바치고 있습니다(삼상 23:19). 사울은 즉시 군사들을 이끌고 십 황무지를 에워쌉니다. 다윗이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그야말로 그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형국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시 54:1-3). 그는 지금 포기하지 않고, ‘진일보(進一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하시고’(yasha), ‘변호하시고’(din), ‘듣고’(shama), ‘귀를 기울여주시길’(azan) 호소합니다. 사중 강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어주시며, 궁극적으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을 믿으며 간구하고 있습니다(시 54:3-4).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진이보(進二步)합니다.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겠다고 합니다(시 54:6). ‘낙헌제’란 자원하여 드리는 제물,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기쁘게 감사하며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시 119:108, 레 7:11). 한마디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제사입니다. 이 태도야말로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는’ 태도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시 54:7). 사울이 다윗을 잡고자 할 때 마침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러 가게 된 것입니다(삼상 23:26-28).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눈앞에 있는 다윗을 붙잡지 못하고, 군대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그 다음 전투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삼상 31:4-6). 그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쳤습니다(갈 3:3). 하나님의 뜻, 물론 성경에서 밝히 드러나고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하나님은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핑계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롬 1: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손엔 성경, 한손엔 신문’을 들고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 영적 민감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삼상 18:7). “너는 이제 너의 역할이 끝났다. 이제 다윗에게 넘겨라. 아쉽지만 배역을 바꾸고선 전면에서 뒤로 물러나도록 하라.”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국사(國事)까지도 제쳐두고 ‘다윗 제거’에만 골몰했습니다. 이 심리가 ‘엑스트라 콤플렉스’입니다. ‘엑스트라 콤플렉스’란 ‘중요한 임무, 배역은 하겠지만 시시한 것은 맡을 수 없다. 주연역할이 내게 맞다. 하지만 다른 배역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생의 후반부에 ‘엑스트라 콤플렉스’에 함몰되어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는 왕으로 세움 받을 때 손사래 치던 사람입니다(삼상 10:22). 그랬던 그가 왕의 자리가 체질화되다보니 ‘엑스트라’ 역할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만 그럴까요? 오늘 나에게는 이 ‘엑스트라 콤플렉스’가 없을까요? 우리가 지금 어떤 자세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이 예배의 주역은 누구이며, 엑스트라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엑스트라라는 심리가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주역, 엑스트라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역할에 대해 경중(輕重)을 구분하시지 않으십니다(고전 12:21-24). 우리 모두가 다 주인공들이고,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동역자들입니다(고전 3:5).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두 달란트 받은 자에게 똑같은 상급과 칭찬을 주시는 것을 봅니다(마 25:21,23).

하지만 이 ‘엑스트라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어 갈라선 일이 있었습니다(행 15:39). 표면적인 이유는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였으나 사도행전의 전체 흐름을 보면, 그 밑바닥에 묘한 심리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나바가 앞서다가 사도행전 13장에서 성령께서 강하게 바울에게 역사하신 후(행 13:19), 점점 바울이 부각되면서 16장부터는 바울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바로 그 리더십 교체의 현장이 사도행전 15장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한 몸에 받았던 세례요한 앞에 한 시골청년이 나타나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 청년에게로 갈 때 세례요한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또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주는 자’, 즉 ‘엑스트라’에 불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막 1:7). 이런 그를 향하여 성경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마 11:11).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 전 가슴 따뜻한 기사를 대한 적이 있습니다. 홍명보 씨가 월드컵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을 때 그의 스승이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진심어린 축하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브라질로 가는 길을 그와 아주 가까이서 따르고 싶다. 감독이 되면 날 수석코치로 불러 달라. 한국대표팀이 성공하고 즐기길 바란다.”

제 동창회주소록 제일 뒷장을 보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동창들이 20명이나 되었습니다. 잠시잠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할 맡겨주시면, 이 역할에 최선을 다하다가 또 저 역할 맡겨주시면, 저 역할에 기쁨으로 감당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하나님 앞에 안전하게 설 수 있는 지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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