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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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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1-16)

하갈은 비참한 처지가 되어 인생의 최저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 위기는 누가 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초한 것입니다. 아브람의 자녀를 잉태했다고 자기의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했다가 오히려 사래에게 학대받고 쫓겨나 갈 곳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고향인 애굽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잉태한 무거운 몸으로 약 160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수르 광야의 샘물에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날도 더운데 160km를 잉태한 몸으로 걸어왔으니 배도 고프고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래서 물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샘물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갈의 인생이 가장 최저점에 도달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하갈의 인생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면서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고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갈은 하나님에 관해 위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Ⅰ. 하갈을 만난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이 성경에 처음으로 나온 곳은 창세기 16장 7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창 16:7). 어떤 분들은 여호와의 사자를 문자 그대로 ‘the angel of the LORD’ 즉, ‘하나님의 천사’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라고 할 때 ‘angel’은 ‘천사’라는 뜻도 있지만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말라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언약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 3:1). 

그러므로 창세기 16장 7절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창 16:10). 

첫째, 어떤 천사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창 16:13). 

둘째, 하갈이 천사가 아닌 하나님을 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가 아니고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먼저 하갈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합니다.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창 16:8).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묻는데 “아브람의 아내인 하갈아”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했던 교만을 깨뜨리고 하갈의 본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어찌하여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의 도를 버리고 떠났느냐? 어찌하여 너는 아브람의 품을 떠나서 우상의 본고장인 애굽으로 돌아가려느냐?”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 질문을 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아담 안에 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넓은 길로 가다가 결국 멸망으로 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사람은 생명길로 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하갈이 50km 정도 걸어왔을 때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화를 냈을 것입니다. 화를 내며 자신이 어찌 사래의 여종이냐며 따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게 뭐냐며 대들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갈은 잉태한 몸으로 160km를 걸었기 때문에 힘이 다 소진되어 대답할 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깨지고 부서져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창 16:8). 

자신의 신분을 똑바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사람의 마음은 길가 밭과 같은 마음도 있고 돌짝 밭과 같은 마음도 있고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지금 옥토 밭과 같은 마음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무슨 말씀을 하든지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도 아버지 몰래 재산을 가지고 나와서 해외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해외에 가서 술집도 많고 여자도 많으니까 거기서 돈을 다 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하게 됐는데 돼지 치는 일을 하면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정신이 든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이 자신보다 형편이 훨씬 낫다며 집으로 돌아가 종노릇이라도 해야겠다고 돌아온 것입니다. 인생이 비참해지니까 제정신이 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죄인이고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셔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천국에 가며 영생을 얻는다고 해도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밥 먹고 살만한 돈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놀러다닐 수 있는 건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만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직 깨지고 부서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갈도 인생의 최저점에 도착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며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옥토 밭과 같은 마음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의 마음이 옥토 밭과 같이 되어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약속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 16:9). 먼저 돌아가서 복종하라는 것을 명령(Command)했습니다. 돌아가라는 것은 회개(Repentance)를 명한 것입니다.

마귀에게로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종하라는 것은 불순종하는 삶의 모든 태도를 개혁(Reformation)하라는 것을 뜻합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로 돌아가고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사도바울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에게 그 주인 빌레몬에게로 돌아가서 순종하라고 말씀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개혁하라는 명령은 많은 약속과 축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를 약속(Promise)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창 16:10~12).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들 낳는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저는 아들 둘이 있습니다. 딸도 있었는데 낳자마자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딸이 있었으면 했는데 올해 10월에 제 아들이 딸을 낳는다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까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의미의 이스마엘로 지어주시고 그가 많은 후손을 낳아 큰 민족을 이루고 살겠지만 들나귀 같은 성품을 가져서 사람들과 싸우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갈이 생각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서 유복자를 낳아 사람들에게 학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아브람의 품으로 돌아가 비록 들나귀 같은 자손이라 할지라도 번성하는 자손의 어미가 될 것인가?’ 생각해보니까 바로 답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사래에게 순종하며 사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사는 길은 언제나 최선의 길이며 복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옥토 밭과 같은 겸손한 영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얻게 되었습니다. 


Ⅱ. 하갈이 깨달은 위대한 진리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창 16:13). 하갈은 애굽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첩이 되면서 개종하여 여호와를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애굽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애굽 신인 호루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호루스라는 신은 애굽의 여신인 이시스(Isis)와 애굽의 남신인 오시리스(Osiris)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오시리스가 그의 남동생인 세트(악의 신)에게 죽임을 당했고 이에 아들인 호루스가 세트를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호루스는 왼쪽 눈을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지혜와 마법의 신 토트가 그 눈을 치료해서 회복되었으나 그 색깔은 검은색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루스의 왼쪽 눈은 검은색이지만 행운의 힘을 가져다주는 부적과 같은 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호루스의 왼쪽 눈은 오늘날 프리메이슨이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며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화를 가져다주기도 하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젊은이들이 호루스의 눈을 문신으로 많이 합니다. 예전에는 문신으로 유행하던 것이 용이었는데 이제는 호루스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루스의 눈이 한국의 가수들이 노래할 때 배경으로도 많이 사용됩니다. 호루스의 눈이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해 부적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젊은이들은 하갈만 못합니다. 하갈은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분은 호루스와 같은 거짓된 신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나를 감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첫째, 사람도 한 사람에 대해 연구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감찰하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5:3). 

둘째, 사람이 사람의 외부를 감찰할 수는 있지만 내면을 들여다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 등 내면을 모두 들여다보십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상 28:9).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이 낮에 사람을 감찰할 수는 있지만 밤에 감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밤낮으로 사람을 감찰하십니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시 139:12). 어두운데서 행한 일도 주님은 다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넷째, 사람이 사람의 과거와 현재는 어지간히 추측할 수 있지만 미래를 감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미래도 다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은 하갈이 낳을 아들이 이스마엘이고 성격이 적대적이어서 사람들과 싸우며 살게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3).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습니다. 


Ⅲ.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주는 실제적인 의미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아니면 기분이 좋으십니까? 시편에 악인들과 교만한 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시 94:7).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시 94:9). 

악인들은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것을 마치 검사와 경찰관이 하늘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자기의 죄를 잡아내려고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사실이 큰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피로 덮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고 잊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녀를 돌보시는 사랑의 눈동자로 우리 성도들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면 혹시나 다치지 않을까 지켜보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진리는 

첫째, 하갈로 하여금 하나님께 진실로 경배(Worship)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호루스와 같은 상상 속 거짓된 신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의 이름도 ‘나를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뜻으로 ‘브엘라헤로이’라고 지었습니다. 하갈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경배했습니다. 

둘째, 하갈에게 이 진리가 큰 위로(Comfort)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 16:11). 하나님이 무서운 눈으로 잘못하면 벌을 주려고 감찰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처한 자에게 큰 도움을 주시려고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벌주려고 감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벌은 예수님에게 다 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나를 고통과 번민에서 건져주시고 위로하시기 위해서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이 진리가 하갈로 하여금 순종(Obedience)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시 여주인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복종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 길이 복된 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해서 돌아갔던 것입니다. 

넷째, 이 진리가 하갈로 하여금 다시는 아브람을 떠나서 안 된다는 것을 경고(Warning)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시는 것은 내가 죄짓지 않도록 막으신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삼하 11:27). 

다윗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간접 살인하고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다 보시고 징계를 내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진리는 우리 성도들이 악과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 

어떤 아버지의 직업이 도둑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을 해보니까 세금도 안 내고 낮에는 실컷 놀다가 밤에 한두 시간만 일하면 돈을 버니까 너무 좋아서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결심했습니다. 현장실습부터 시키려고 생각한 아버지는 도둑질하는 동안 아들에게 망을 보라고 시켰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신이 동서남북은 다 볼 수 있지만 위에서 보시는 하나님은 막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은 도둑이지만 아들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더니 착한 아이가 되었다며 도둑질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에서 보시는 하나님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다른 사람도 감찰하시지만 우선은 나를 감찰하십니다. 사면이 콘크리트로 막혀있어도 하나님의 눈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행위와 생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앞에 모든 것이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진리가 두려움이 아니라 위로와 거룩함을 줍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움과 위로를 얻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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