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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이유 (눅 4: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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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이유 (눅 4:16-19)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자란 곳은 나사렛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고,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한다. 나사렛에 돌아왔다. 안식일이 되자, 늘 하던 대로, 회당을 찾아갔다. 성경을 읽으려고 섰다. 

그때 회당의 사람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글(성경)을 예수님께 주자, (사61:1-2)을 찾아 읽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오늘 본문과 약간 차이가 있다. (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땅에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세상에 오신 자신의 목적을 말씀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했느니라.”며(21), 목적을 말했다. 예언대로 ‘내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왔고, 그 일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씀했다. 

1.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18上).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예수님은 자신을, 성령의 기름이 부어진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한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아(󰖙י󰚄󰗪, 마시아흐)요, 또 헬라어로 그리스토스(Χρστός)이다. 기독교(基督敎)는 그리스도를, 한문으로 음역한 말이다. 기름부음 받는 자들은, ‘왕, 제사장, 예언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관사가 있고, 기름부음을 받은 다른 자들에게는 관사가 없다. 

유일무이하다는 말이다. 기름을 부었음은, 이제는 성령님을 통해, 합법적으로, 공식적으로 세웠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사가 이제 절대로 다시 붙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 다시 내게 임하면, 내가 예수님이나, 성령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자는 다 이단이다. 

(1) 성령은 왜 예수님께 임했는가?(마3:16-1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심을 선포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님이 함께 한 사역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성령님이 함께 했는데, 하물며 연약한 우리는,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님을 모르니까 복음전파가 안 된다. 작은 일에도 힘들고 어렵다.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한 마디만 해도, 쓰러지고 넘어진다. 사람의 힘으로 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주의 말씀이, 내 심령 속에 가득해야 한다.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무엇이든지 하기를 축원한다. 찬송과 기도로, 영성이 회복될 때,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한다. 

(2) 복음이 무엇인가? 
(왕하6:24-7:20)에, 사마리아 성이 둘려 쌓여, 자기 자식을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해진 자들에게,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베풀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육체로 와서, 우리 죄를 짊어진 소식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는데, 예수님이 하늘보좌를 내려놓고, 전해주러 온 복음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나의 죄가 사면되었다.”는 소식이다. 

주님을 나를 살리기 위해, 친히 부활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복음이, 오해를 받아 변질되고 있다. 아니 복음을 잘못 알아, 복음이 정확하지 않으니까, ‘도덕’이나 ‘윤리’처럼 오해한다. 심지어 ‘웰빙’, 즉 잘 사는 것을, 복음으로 오해되고 있다. 사탄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 복음의 개념을 변질시켰다. 
그래서 복음이 ‘복 받고 부자 되는 방법’이 되기도 하고, ‘긍정적인 성공’이 되기도 했다. 병고치고 예언하고,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복음의 껍데기일 뿐이다. 복음의 본질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주님은 이것을 전하려고 오셨다. 

(3) 복음을 전할 대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 가난한 자는 프로토스(πτωχός)로, 프톳소(πτώσσω 두려워하여 움츠려들다.)에서 유래된 말로,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가는, 비참한 사람을 말한다.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힘이 없기에, 짓밟히고 억압당하는 사람으로,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고통 중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을 말하는 자들을 말한다. 

가난은 물질도 포함되지만, ‘심령이 가난’을 의미한다. 교만하거나 부요하면, 복음이 절대 들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면 귀가 열리고, 복음이 귀에 들려와,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자신이 부족함을 알고,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주님은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했다. 

2.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18下).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다시 회복시킴을 말한다. 

(1)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신다(사61:1中). 히브리어와 헬라어 70인역, TR에는 나온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회복을 말한다. 상한 자는 완전히 짓이겨 저, 산산 조각나, 회복이 전혀 불가능한 자를 말한다. 고치신다(ἰάομαι, 이아오마이)는, 신적인 능력으로, 온전하게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건강하다가 병에 걸린다. 그러나 의사의 치료를 잘 받아, 병이 고쳐지면 ‘회복’되었다라고 한다. ‘회복’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나쁜 쪽으로 되돌아가면, 회복이 아닌 악화라고 한다. 경제가 좋지 않지만, 다시 경기가 좋아지면 경기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실 일을, 한 마디 단어로 표현하면,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회복의 뜻은 ‘원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을 뜻한다. 전도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을, 타락 이전상태로 회복시키러, 오셨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러나 죄악으로 그 형상을 잃어 버렸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왔기에, 전도는 영혼을 다시 치유하는 회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죄가 들어오자, 사람은 서로가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고 죽는 일들이 나타났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완전히 상해서, 회복불가능한 자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친다. 
어떻게 치료하나?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의 십자가로, 나음을 입는다. 

(2)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제공한다. 
‘포로 된 자’는, 전쟁포로를 말한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다시 돌아온 자들을 말한다. 인간은 원래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아 타락하자, 마귀의 포로가 되었다. 
죽음 앞에 꼼짝 못하는, 죽음의 노예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고, 부활하여, 우리의 죽음을 해결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된다. 이 구절은 단순히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죄의 사슬에 매여 살지 않고, 주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기를 축원한다. 그래서 (요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했다. 그 자유를 우리 모두 누리기를 축원한다. 
온전한 자유를 이루려면, 그 구원자(󰖙י󰚄󰗪, 메시아)와 구속자(ל󰔞󰕄)가 동시에, 있어야 한다. 구원자는 
권력이나 능력이 있는 자가, 자기 힘을 발휘하여 구출해서, 해방시켜 주는 자이다. 구속은 법적으로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 구원자요, 구속자가 되신다. 

(3) 눈먼 자가 다시 본다. 
‘눈 먼 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 말씀은 히브리 성경, (사61:1)에서는, 눈 먼 자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한다고 하였다. 
깊은 지하 굴속에 갇혀 있는 자들, 영적으로 갇혀 있는 자들은, 마치 눈 먼 자들과 같다. 그러나 풀려나면 
다시 눈을 뜨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눈 먼 자들이 눈을 뜨고, 소경이 말하고, 듣지 못하는 자들이 귀가 열리는 이적은, 메시아의 표적으로 제시되었다(사35:5). 

유대 지역에는, 태양의 직사광선과,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시력을 잃는 자들이 많았다. 눈이 멀게 되면 직 
장을 잃고, 사회로부터 가장 가난한, 약자의 자리에 내려가게 된다. 한 마디로 거지가 된다.  그래서 성경에는, 소경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소경은 한 마디로, 세상에서 끝난 인생이다. 
이런 인생은, 행복을 바라지도 못한다. 내일도 없다. 목숨만 붙어있지, 죽지 못해서 사는 인생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뀐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눈 먼 자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셨다(요9:39). 

인간은 원래 창조 시에,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죄를 저지른 후에, 그 눈이 가려졌다. 영적 소경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뵐 수 있게 하셨다.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보게 했다. 

(4) 눌린 자를 자유롭게 했다. 
눌린 자’는 부서지고, 상처받은 자를 말한다. 이 구절은 히브리 성경과, 70인 역에는 없다. 앞에 압제 당하는 자들의 모습을, 한 마디로 이렇게 설명했다. 
마음이 완전히 짓이겨져, 산산조각난 자들을 말하고, 마귀와 죄의 포로가 되고, 어둠에 갇혀 볼 수 없는 자가 눌린 자다. 이들을 자유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오늘도 사람들은 병든 감정과, 상처 난 감정에 억눌려, 잘못된 감정과 인격으로, 병들고 파괴된 인격을 형성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쇠사슬에 묶여,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 사람들처럼, 세상 사람들은, 술의 노예, 담배의 노예, 마약의 노예,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끌려 다닌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성령과 말씀으로, 이 모든 억눌림에서 해방시켜, 자유 하게 하신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해방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 죄로 인하여, 마귀의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울고 있는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시는 분이다. 

성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에, 지배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었다. 동물도 신이고, 나무도 신이고, 태양도 달도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었다. 돈에 지배당하고, 재물을 신처럼 받들며, 눌려 살고 있다. 
그래서 날마다 무거운 죄 짐에 눌려서, 쓰러지고 넘어진다. 얼마나 힘든지, 살아갈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 허덕이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 근심 걱정 염려에서, 도저히 풀려날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눌린 우리를 자유하게 했다. 

예수님은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러한 모든 눌림이, 다 풀어진다. 이것이 회복이다. 늘 남을 의식해서, 힘들고 어려워서, 살맛이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자유를 누리게 된다. 

3. 기쁨의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 오셨다(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은혜의 해는 년을 말한다. 태양의 해가 아닌, year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희년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하나님의 지시대로, 매 7년마다, 안식년을 거행했다. 안식년이 되면 땅도, 일하는 종도, 나귀도 모두 쉬어야만 했다. 안식년이 7번 지나서, 49년 만에 큰 속죄제를 드리고, 50년이 되면 희년 나팔을 불었다. 

희년을 선포하면, 모든 종들은 해방되어 돌아가고, 팔아 버린 집이나 전토는, 도로 원주민이 돌려받는, 이스라엘 민족 최대의 경사가, 바로 희년이다. 희년이 되면, 가난으로 팔린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고, 종들은 해방되었다. 
포로 된 자들이 석방되며, 빚진 나가 탕감을 받으며, 헤어졌던 가족이 모두 만나, 감격의 눈물과 기쁨의 춤을 추는 해를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일본에 빼앗겼던 모든 것을, 해방과 더불어 도로 찾았다. 

이처럼 아담이 범죄하여, 잃어버린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도로 찾아 주셨다는 말이다. 이제는 가난한 자에게는, 복된 소식을 눌린 자에게는 자유를, 눈먼 자는 다시 보게 함을,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시고, 묶인 자를 해방하는 역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 속에 나타나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옛날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의 나날을 누리게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복을 모르고 산다면, 이것이야 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이 기쁨의 인생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엄청난 희락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 기쁨은 이 세상이 알지 못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미국 보스턴의 어느 지하 병동에, 한 소녀가 격리 수용돼 있었다. 그 소녀는 마음의 어둠 때문에, 심한 정신병을 앓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지르고, 독설을 퍼부었다. 의사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회복 불가능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부모도 이 아이를 포기해 버리고, 면회조차 가지 않았다. 그 누구도 ‘회복 불가능’이라고 낙인찍힌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병원에, 나이 많은 간호사가 있었다. 그 간호사는 모든 사람들이 포기한, 그 소녀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부모조차 포기한 아이였지만, 간호사는 6개월 동안 끊임없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다. 그러자 소녀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 
마음속의 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세상을 향해서,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 불가능’이라던 정신 질환마저, 완전히 치료되었다. 빛을 찾은 소녀는, 자신과 같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이 소녀가 바로, 헬렌 켈러를 어두움에서 해방시킨, 앤 설리번(Anne Sullivan) 선생님이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인생이 바뀐다. 어두움의 인생이 기쁨의 인생으로, 고통스런 인생이 즐거움의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 
12해 동안 혈루 병으로, 고통 받던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면서, 고통을 받았고, 재산마저 다 날렸지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병이 낫고, 육체의 회복도 이루어졌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눈을 뜨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 영적인 회복을 이루게 된다. 

돈만 알았던 삭개오도 변화되었고, 죄를 회개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했다. 자기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던, 완고하고 강퍅하던 사도 바울도 변화되었다. 우리를 고치고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이 예수님을 거절하지 말고, 모셔 드리기 바란다. 마음속에 왕으로 모시어, 복음을 알고, 깨달아, 주님이 우리를 지으셨을 때의 상태로, 다시 회복되는 기쁨이 넘쳐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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