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요 6:26-35)

첨부 1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요 6:26-35)

요한복음 6장 1절이하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소문이 급속도로 근동에 퍼졌습니다. 그러자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수소문하여 배를 타고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까지 찾아왔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로 오셨습니까?" 하자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고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해 힘쓰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게 하는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모세는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리게 하였는데 당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기적을 행하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주기를 기대하는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보다 더 놀라운 생명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며 수근거립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가 그 부모를 아는데 어찌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 사람이 어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하고 웅성웅성하더니 '따라다녀봐야 또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우리의 배를 채워주지 않겠구나!' 하고 실망하여 모두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군중들뿐만 아니라 66절에 '그의 제자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하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까지도 실망하고 예수님께 등을지고 돌아선 것입니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참 생명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냉정하게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교회를 찾아 왔다가 기대와 다르다고 실망하여 다시 돌아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썩는 양식 즉 육신의 필요만을 채우고자 나아왔다가는 실망하고 돌아가는 것일지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은 분명히 굶주린 무리들을 육의 양식을 가지고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순간적으로 배부르게 할 뿐인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하고 영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기도하도록 강조합니다. 경제문제나 자녀문제, 취업이나 건강의 문제를 가지고 새벽기도나 수요기도등 기도시간에 교회에 나와 간절히 부르짖음으로 응답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문제든지 하나님께 들고 나아와 기도로 해결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예배후에나 목장모임에서 병든 자를 위한 치유기도를 자주 해 줍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치유받습니다. 성령님의 강한 만져주심으로 그렇게 치유받은 간증이 교회에 셀 수없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런 역사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능력의 예수님을 경험함으로 그분께 구원이 있음을 깨닫게 하여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겨서 영생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아무리  불치의 병에서 치유받고 다 망했던 사업이 크게 일어나고 곤경에서 기도응답으로 빠져나왔다고 해도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겉보다는 속에 숨겨진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본질적인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겉 모습은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외모가 어떻게 생겼으리라고 상상하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배용준이나 장동건처럼 잘 생기지 않았을까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증거합니다.  

30대 초반에 50세 정도로 보았을 정도이니 얼마나 초췌한 모습이었을까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화려한 기적을 행할 때는 몰려왔다가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않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예수님 스스로 제물이 되시겠다고 하니까 실망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모여온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스스로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자신을 내어 주시어 영생의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을 보려고는 수 천 명, 수 만명이 몰려오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생명의 양식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당장에 잠시 잠간 만족을 느낄 육의 양식에만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었어도 그것을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날마다 먹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으며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늘 나라는 물론 약속의 땅에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아무리 만나를 많이 먹어도  그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갖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말슴을 통해서 예수님이 왜 이 땅에 내려오셨는지 가르치시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을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에서 눈을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 돌려 예수님만을 바라볼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을 체험한 분들중에 예수님을 멀리하고 떠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렇게 확실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적인 착각이었습니다.  암에서 치유받고 무서운 귀신에게서 해방되고 가정해체의 위기에서 문제가 해결되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맨몸으로 교회와서 부자가 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내가 반드시 은혜를 갚을것이다.' 감격하여 어쩔줄 몰라하지만 다 소용없습니다. 조금만 교회에 섭섭한 일이 있어도 등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맞추어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과 능력을 다 부정하고 배반합니다. 떠나갑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찾아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배가 고파 빵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입니까?  몸이 아파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입니까?  가정의 위기에 처했는데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서입니까?  불안과 두려움, 스트레쓰 등 정신적인 위안을 받고 싶어서입니까?  

여러분이 어떤 필요가 느껴져서 오셨든지 잘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경제문제, 건강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 마음의 평안 등 다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 해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문제만 해결받고 돌아가면 여러분은 갈릴리 평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배불리 빵을 얻어 먹었으나 그뿐이요, 예수님을 멀리 떠나간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바가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떡과 생선은 직접 그 현장을 보고 직접 먹어보면 좋겠으나 못먹었어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것은 직접 체험해 보아도 좋고 체험을 못했어도 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표적을 통하여 우리로 참된 믿음을 갖게 도와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르게 믿게 하여 영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로 영생을 소유하게하여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깊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의 주님을 보지못하고도 그 기적의 떡을 맛보지 못하고도 예수가 믿어지면 더 좋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대단한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체험하지 못했으나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고 받아들여 참된 만족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유명한 전도자 무디는 별로 배운 것이 없으신 분이셔서 말과 글이 서툴렀다고 합니다.  전도 집회를 인도할 때 그의 서투른 문법이나 철자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어느 교회에서 집회가 끝난후 누군가가 무디 목사님에게 한번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문법적인 오류가 있었는가를 조목조목 지적했을 때 무디는 감사를 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신기하기만 하답니다. 그런데 궁금해서 묻습니다만, 선생님은 그 정확한 문법으로 몇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셨는지 궁금하군요?" 

아무 대답이 없는 그에게 '제발 그 좋은 달란트를 주께 드려 쓰임 받으시는 인생을 사시기를 기도하겠다'고 하였답니다. 무디는 종종 우리 성도들이 천국에 도착할 때 유일한 후회는 "내가 만일 헌신만 했더라면 이렇게 쓰임 받을수 있었을 터인데--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묻어두고 산것에 대한 후회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사는 사람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평생 부지런히 살기는 하나 썩을 양식 즉 이 세상에 속한 것만을 쫓아 달려가는 인생은 허무하고 불쌍한 인생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에는 아무리 화려하고 비싼 것들도 다 뜨거운 풀무불에 타 없어집니다.  

우리가 부활하여 예수님앞에 가는 날 썩을 양식만을 위해 일한 사람들은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즉 세상이 없어져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을 하나도 준비하지 못했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반면에 세상이 없어져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영원히 빛나는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남기려고 꿋꿋이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무엇을 위하여 대부분의 시간과 재능과 지혜를 쏟으며 사셨습니까?  썩을 양식입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까?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굶주린 자에게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항상 먹어도 다시 배고프고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도 여전히 배고픈 인생들에게 참 만족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서서히 죽어가며 멸망에 이르는 자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사람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어떤 어려운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어떤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5절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노동을 하는 것같이 생명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도 어떤 수고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많습니다. 무언가 열심히 노력하고 많은 수고를 해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일에 매달리다가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슴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결코 부족하지 않고 충분합니다. 예수 잘 믿으려고만 힘쓰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찾아 교회까지는 왔으나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교회에 가봐도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 내가 오랫동안 교회다녔는데 다 소용없더라."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훼방하는 방해꾼이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교회에 나오셨으면 거기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품안으로 깊숙히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리에까지는 나아갔으나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지금도 살아계셔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으면 그분께 믿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35절 말씀에서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마음과 삶속에 주인으로 모셔들여 예수님이 나를 주관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도록 자신을 그분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캐나다의 옛날 개척자들은 바빈 요새를 대피소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물자가 거의 바닥나자 빅터 클락과 한 젊은 안내자가 음식을 구하러 요새를 떠나 해즐튼 마을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요새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살을 에는 바람으로 뼈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었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불을 피워 그곳에서 비참한 밤을 보냈습니다. 이윽고 새벽빛이 서서히 밝아오자 그들은 그들이 멈추었던 곳에서 불과 수백 야드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포근하고 안락한 요새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안식처가 있었는데 그렇게 고생하며 헤메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수도 없이 들었으면서도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방황하는 분은 없습니까?  예수님은 영생의 양식을 가지고 여러분 가까이에 계십니다. 여러분, 경계선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지금 생명주시는 예수님 안으로 나아가기로 결단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