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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세례·성령충만 (행 1:5-14)

첨부 1


성령세례·성령충만 (행 1:5-14)


I. 예수님의 부활

대구 어느 크지않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의 주일 설교는 “성령”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설교 후 광고를 하고 마지막 파송 찬송을 합니다. 그 주일 마지막 광고가 한 집사님의 장례 광고였습니다. 이 집사님은 교회에서 목사님과 당회원들의 속을 썩이고 교인들과 갈등을 일으키기가 일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아무개 집사님이 별세하셨습니다. 
 내일 새벽 6시 아무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예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파송 찬송멘트를 합니다. 모두 함께 일어나 찬송가 185장 
“이 기쁜 소식을 온세상 전하세” 힘차게 부르시겠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사모님이 “아니, 여보. 집사님이 돌아가셨다고 광고하고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를 힘차게 부르시면 어떡합니까?”
목사님 왈, “그래서 오늘따라 교인들의 찬송소리가 컸구만. 
살았을 때 좀 잘 하시지.”

「그대가 태어날땐 그대는 울었고 세상은 웃었다
  그러나 그대가 죽을땐 그대는 웃고 세상은 울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개가 죽었데.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 이런 사람으로는 살지 말아야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 공동체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제자들은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모였습니다. 언제든지 쾅쾅 문을 두드리며 모두 체포하겠노라고 고함을 치며 로마병사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들이 닥칠 것만 같아 떨고 있는 겁니다. 모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시던 예수가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조국 이스라엘을 식민지의 아귀에서 구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헛된 꿈이 되었습니다. 
이젠 그들에겐 어떤 희망도 꿈도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한없는 낙담과 절망,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눈앞에 나타납니다. 
예수의 부활소식은 제자들에게는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절망의 어둠이 짙게 깔려가던 조국에 다시 희망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살아난 예수와 함께 이 나라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할 기회가 왔다.”

II. “하나님 나라”와 “이 나라”

그래서 제자들은 주께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유대인들의 메시아 왕국관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는 지상의 왕국이 설립되고 옛날의 신정통치(theocracy)가 실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으로 제자들의 이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부활과 함께 그들은 다시 메시아 왕국에 대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은 주님과 함께 높은 지위에 앉게 되리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받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Bruce).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관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가 ‘언제’해방되며, ‘언제’주위 나라들을 굴복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아직도 ‘세상’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기 제자들의 모습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얼굴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는 땅의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 세상의 성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가 변하기를 기대하시는데 
우리는 환경이 변하고 상대가 달라지기만을 원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고 내가 죽어지라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예수 믿었으니 더 가지고 더 높아지기만을 원합니다.

「주여, 저를 회복하심이 어느때 입니까?」
그들의 기대에 찬 질문에 예수님은 동문서답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가 언제인가는 아버지께서 정해 두셨으니, 너희가 알바 아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땅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꿈을 얘기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라 말씀하십니다.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7절)
여기서 제자들이 알 바가 아니라고 한 것은 아직 그 기한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Lenski),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세와 계획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감추어진 경륜을 알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Alford). 

III.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능력” (눅24:49) 곧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성령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곧 성령이 하나님 나라의 설계자요, 건축자며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성경상 대단히 중요한 단어 하나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성령 세례’의 약속을 다시 상기시키셨습니다. 
곧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5절) 이것은 전에 세례 요한이 증거한 것인데(마 3:11 및 병행절), 지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예수를 믿고 험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성령세례란 말은 오늘날 대단히 중요한 말이 되었습니다. 

1. 용어

100년전 20세기초 일어난 오순절 운동의 영향으로 1900년동안 잘 사용하지 않던 한 단어가 유행어처럼 쓰여지게 됩니다. 바로 「성령세례」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 「성령세례」라는 명사형 표현은 없습니다. 단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는 동사형이 나올뿐입니다. 동사형으로 나오는 단어를 명사형 「성령세례」란 말로 사용한다고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신들의 교리로 편협되게 단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령세례」가 무엇인지 그 이해와 해석이 교단에 따라 성경적 해석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안에서도 이 용어는 분명한 규정을 하거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에 관한 용어는 같은 용어가 한 가지 의미로만 쓰여지기 보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또 표현은 다른데 의미가 같은 표현들도 등장합니다. 

성경에 성령에 관한 표현들은 참 다양합니다. 
성령 받는다. 성령을 주신다. 성령충만을 받는다. 성령이 임하신다. 성령을 부어 주신다. 성령이 감동하신다. 성령의 기름부으심,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2. 바울과 누가

바울 서신은 성령 세례란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에서 “성령 받는다”는 말은 구원론적으로 즉 칭의와 신앙고백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에 의하면 “성령이 아니면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9에 의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2에 의하면 “성령 받는 것은 죄 용서받아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 즉 누가의 저작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성령 받는다는 말이 반드시 구원론적 칭의와 관계된 것만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8:18에 보면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사람들이 성령받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어떤 현상, 표적, 은사를 보았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표현은 바울과 누가가 다른 성령론을 가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9:1-7에는 바울 또한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바울 서신에서처럼 단지 성령받음이 구원론 즉 중생, 칭의, 신앙고백에 관한 것이라면 이런 질문은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표적이나 은사와 관련해서 등장하는 용어가 “성령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충만이 반드시 은사나 표적과만 연관된 것은 또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 5:18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즉 성령충만이 거룩한 생활, 성화와 관련을 가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사도행전 1:8에서도 또 복음을 전하는 능력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성령충만이란 용어는 에베소서 5:18같은 극히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누가의 저작에서만 나타나는 말입니다. 

종합해 보면 성령충만은 

①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  ② 죄를 이기는 거룩한 삶
③ 성도가 받는 능력과 은사  ④ 복음전도의 열정과 능력 – 등과 관계가 있습니다. 

3. 성령충만과 성령세례

그러면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최초로 성령충만을 받는 경험으로 이해합니다. 이때 은사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특히 방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인들은 성령세례란 분명하고도 강한 내적 구원의 확신을 성령이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성령세례가 죄 용서, 칭의, 구원의 확신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장로교인들이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의 주장을 듣고는 깜짝 놀라지요. 성령세례가 방언과 관계가 있다면 방언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했단 말인가? “이것은 이상하다. 이단이다” 그래서 한때는 순복음교인들을 이단시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분명한 것은 성령세례나 성령충만이 반드시 방언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순절 사람들이 다 그렇게 주장하거나 다 그렇게 믿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 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 이겠느냐?”(고전12:30)

4. 소결론

그러면 성령세례가 칭의와 관계가 있다는 장로교인들의 주장이 맞을까요? 
사역의 능력이나 은사와 관계가 있다는 오순절 계통 사람들의 주장이 맞을까요?

이에 대해 장신대 성령론 교수 현요한 목사는 대단히 통전적 주장을 합니다. 
「성령 세례의 정의는 성경이 분명히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불필요한 논쟁인 것 같습니다. 또 상대의 주장을 정죄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로 상대의 주장을 존중해야 합니다. 서로 간의 혼동을 주는 성령세례라는 말 대신 “성령으로 거듭남” “처음으로 성령충만을 받음”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받은 은사를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하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거룩한 생활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오늘날은 지나간 그 어느 시기보다 우리의 믿음을 사탄은 흔들고 있습니다.
① 교회에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살아야 합니다.
②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도록 믿음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③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④ 우리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IV. 증인 - 순교자

그 다음절 사도행전 1:8은 사도행전의 중심귀절입니다. 
사도행전의 배꼽이라 일컬어지는 사도행전 1장 8절 본문에 보면, 
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게 되리라. 
② 그리고 나아가 너희들이 증인이 되리라. 두 가지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32,500가지의 약속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특별히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두 가지 소중한 약속이 있습니다. 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약속과 ② 성령을 부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권능을 받게 되리라고 했는데 여기 권능도 두 가지입니다. 
원어 ‘뒤나미스’(δύνμίς)에서 두 단어가 나왔는데, 하나는 다이나마이트(dynamite) 다른 하나는 다이나믹(dynamic)입니다. 다이나마이트는 폭발적인 힘, 신비한 힘,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그러나 다이나믹은 내면적인 힘으로 삶의 변화, 순교적 삶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힘이 증인되게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예수님의 유언적인 약속입니다. 자식은 반드시 부모의 유언을 기억하고 실천합니다. 예수님의 유언을 명심하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증인’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증인이란 말은 원어 ‘마르투스’(μάρτυς)라고 하는데 
영어로 Martyr는 증인, 순교자란 뜻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증인이 되리라” 
이 말을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순교자가 되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증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진리를 위해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를 말합니다. 

성령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처럼 심각한 것입니다.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순교자가 되게 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자로 죽었습니다. 
바울도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자로 죽었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십자가를 진 제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1. 성령의 사역에는 외적인 은사와 표적, 즉 다이나마이트 사역이 있고, 

   내적인 사역 - 인격과 비전이 바뀌는 순교자의 삶 즉 다이나믹의 삶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다이나마이트의 사역은 다이나믹의 사역으로 보완될 때 참된 성령의 역사가 됩니다. 성령의 은사만 갈구하고 성령의 열매는 놓치는 사람들이 교회를 헤치는 이유가 바로 다이나마이트와 다이나믹의 조화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생각을 바꿔줍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들의 꿈, 비젼을 바꿔줍니다. 세상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신령하고 거룩한 비젼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언어가 바뀌어집니다. 
기도가 바뀌어집니다. 자화상이 바뀌어집니다. 공동체가 바뀌어집니다. 
민족이 바뀌어집니다. 역사가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순교자란 반드시 맞아 죽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살아가는 사람은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았던 이익만 간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천국에서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부를 누리고 건강을 누리고 명예 권세를 누린 것 귀한 일이지요. 천국의 그림자로서 이 땅에서 누릴 우리의 분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지요. 

순교자는 예수님 때문에 생명을 손해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손해 보았느냐? 그것이 순교자의 삶이요, 천국에 쌓아놓고 살아가게 될 영생의 복락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무엇을 손해보았고 무엇을 잃어 보았고 무엇을 빼앗겨 보았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시간을 빼앗겨 본 사람. 예수님 때문에 재산을 빼앗겨 본 사람. 
예수님 때문에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 예수님 때문에 명예와 권세를 잃어 본 사람.  
그가 순교자입니다. 살아서 순교자가 되는 것은 한번 죽음으로 순교자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여러분 크게 봉사하지 못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많은 것 드리지 못했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너무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정신으로 살아가면 그가 증인이요, 순교자입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시간 저는 우리교우들에게 성령충만한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① 은사와 열매가 충돌을 하면 차라리 은사를 잠시 양보하십시오.
② 사역을 잘하는 것과 사람을 세우는 일이 충돌을 하면 차라리 사역을 잠시 양보하십시오.
③ 성과를 내는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이 충돌을 하면 차라리 성과를 양보하십시오.

3. 오늘 신앙인의 신앙이 병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처럼 심각한 순교의 싸움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적인 침체에 빠진 결정적인 시점이 있습니다. 곧 만불 이만불 소득된다고 자만 할때 헛바람이 든 것입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에 있지 않고 이 땅에서 형통한데 있게 된겁니다. 

내가 시장모퉁이에서, 내가 섬기는 직장 모퉁이에서, 내가 섬기는 교회 한쪽 모퉁이에서, 내가 섬기는 가정 구석구석에서 순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때묻지 않은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겠다. 더럽히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겠다. 가난함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내가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겠다. 이게 순교자의 삶이요 증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많아져야 합니다. 순교의 피가 말랐습니다. 증인의 삶에 피가 말랐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위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히 오시면 우리를 순교자가 되게 합니다. 알량한 신앙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기적 종교인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세상에서도 신용보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V. 예수님의 승천(9-14절) 

누가는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에 이어 승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있어야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행2:33).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 강림의 전체 조건으로 없어서는 안될 필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비밀리에 이루어지지 않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9절). 여기에 ‘승천’에 해당되는 동사로 ‘올리워 갔다’는 이 말은 우주의 어느 한 공간으로 가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며, 이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상 세계로 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늘로 올리우시는 예수님을 자세히 쳐다보고 있을 때 흰 옷 입은 천사 둘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하였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절). 
천사들의 이 책망은 자기들이 해야 할 사명을 잊고 이적 현상 자체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경계요 깨우침이었습니다(마17:4 참조).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을 믿는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① 손해 보아도 천국에서 예수님이 갚아 주십니다.
② 억울해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③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웃는자입니다.
④ 우리 그리스도인은 천국문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들이 머물던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열 한 사도들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그 외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명단이 다시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이미 그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눅6:14-16, 마10:2-4, 마10:2-4, 막3:16-19) 또 다시 일일이 다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성격이 다릅니다. 복음서의 제자들 명단은 사도로 불러 세우신 자들의 명단이라면 사도행전 1장의 명단은 3년간의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도들의 명단입니다. 말하자면 앞의 것이 입학생 명단이라면 뒤의 것은 졸업생 명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사도행전 1장에는 가롯 유다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것이 그 중요한 차이입니다. 

입학식날 우등생이 아니라 졸업식날 우등생이 되도록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의 승리자가 되게 해 줍니다. 
과정의 승리자가 아니라 종착점 – 종말의 승리자가 되게해 주십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로 삼아 주십니다. 

VI. 성령충만한 사람들

저는 어린초등학교시절 분명히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처럼 교회에서 주로 살던 저는 청소년시절 여러번 신앙의 갈등과 위기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청상이 된 어머니가 자식 하나 대학 보내겠다고 목이 짓눌리도록 이고 다니는 보따리 장사로 모은 돈을 도둑놈이 몽땅 훔쳐갔습니다. 어린 저는 문득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실까? 이 돈이 어떤 돈인데? 육군사관학교 신체검사에서 고혈압이 되어 떨어지고 태능 기차길에 누워 죽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내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신앙에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버리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도망을 가도 구원의 확신이 도저히 흔들리지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이었습니다. 제가 바로 어린시절 성령세례를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 목회현장에서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 예수 복음 하나로 하나님은 오늘의 한소망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교회 많은 성도들이 성령충만을 경험하여 복음에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름 앞에 언제나 귀신은 결박되었습니다. 
수없이 병든자들이 나았습니다. 암환자들의 암세포가 소멸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이 말하는 희한한 기적들 즉 능력행함의 은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과 함께 나타난 능력과 은사들이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사회환경, 목회환경이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럴때는 성령의 은사와 함께 성령의 열매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의 인격과 삶이 거룩해져 가야 합니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안에서, 직장안에서,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덕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성령충만의 열매입니다.

내가 섬기는 우리교회를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가지고 이단과 사이비들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피흘려 헌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신앙자세입니다. 

사도행전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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