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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받은 사람들 (행 4: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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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은 사람들 (행 4:32-35)

필립 얀시가 쓴 역작 중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필립 얀시는 자신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가 우연히 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한 젊은 여자가 통로 맞은편의 남자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게 됩니다. 여자는 “뉴욕 타임즈”의 최장기 베스트셀러인 스캇 펙(Scott Peck)의 “아직도 가야 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답니다. 남자가 먼저 묻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친구가 준 거예요. 이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나요.” 여자가 대답을 합니다.
“그래요? 어떤 책입니까?”
“글쎄요. 무슨 인생 지침서 같기도 하고. 아직 별로 못 읽었어요.” 여자는 책장을 두르르 넘기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 제목이 이렇네요. 훈련, 사랑, 은혜….”
그 때 남자가 말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은혜가 뭐지요?”

현대 교회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은 말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저는 그것은 바로 은혜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란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경험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간의 대화 중에도 제일 많이 쓰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를 접촉하는 이웃들이 우리가 은혜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은혜를 받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믿는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담대히 복음을 증거한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무리들이 생겨났고, 그 무리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특징들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은혜 받은 사람들이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Ⅰ. 그렇다면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공동체를 하나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은혜 받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마음에 감동이 있다.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뭐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은혜 받고 마음이 짠했다. 이런 것은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 32절 보세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믿는 무리’, 사도들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큰 은혜를 받은 무리가 어떻게 변했다고요?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 받은 자의 첫 번째 특징은 연합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연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마음에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올라오기 때문이지요. 피를 나눈 형제라도 아이들은 먹을 것 앞에서 싸우지 않습니까? 아이들만 그런가요? 어른이 되면 좀 더 큰 것을 가지고 싸울 뿐입니다. 부모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형제간의 다툼이 일어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나요?

부부 간에 하나 되지 못하고 깨지는 일들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우리 가정이 가난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배움이 짧아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더 부유해지고 더 많이 배웠지만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갈등지수가 0.71로 OECD국가 중 4번째라는 것 아세요? 사회 갈등으로 인해 연간 손실액이 얼만가 했더니 무려 300조원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왜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사회가 갈등 속에서 몸살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보세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인간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거에요.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로가 상대방이 준 상처만 기억해요. 그리고는 말합니다. ‘저 사람과는 도저히 하나 될 수 없어. 어떻게 저 사람과 같이 살아.’

은사는 많이 받았지만 분열에 빠졌던 고린도교회가 그랬어요. 그들을 향해서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3장 3절 보세요.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 받은 자의 첫 번째 특징, 그것은 서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은혜를 어려운 이웃과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닙니까? 은혜 받았으면 은혜를 나누어야 사람이지요. 은혜를 받고도 은혜를 나누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짐승 취급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한량없는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나누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본문 34~35절 볼까요.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본문을 보면 그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큰 은혜 받은 거에요. 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33절 보세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어떻게 은혜를 받았습니까? 복음을 들은 거에요.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와 허물로 망가진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신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받은 큰 은혜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뭔가 이루어져서 다른 사람들과 물질을 나눈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십자가의 은혜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은혜는 우리도 이미 받은 은혜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과 우리의 반응은 왜 다른 것일까요? 그들에게 복음은 생각하면 할수록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메마른 은혜가 아니었어요. 과거의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는 지금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자신의 것을 나눈 거에요. 구원 받을 수 없었던 우리, 죄와 허물로 망가져 마땅히 십자가에 달려야 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셔서 나의 구원자요 주님이 되어 주신 은혜, 그 은혜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 받으셨습니까? 질문을 바꾸어 볼까요?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은혜 받은 것을 간증하셨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은혜를 나누며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은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잠깐 누구를 도운 적은 있지만 계속해서 소외된 이웃과 물질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물질을 나눌 때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우리가 받은 은혜, 그것은 감정적 카타르시스였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쓸모없는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 그 아들을 송두리째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입니다. 전혀 아까워하지 않으시면서.


Ⅲ. 마지막으로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계속해서 드는 한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이해가 안 되잖아요? 본문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본문 34-35절 다시 읽어 보세요.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아니 공산주의도 아니고 어떻게 모든 소유를 나눌 수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적용하기 참 힘든 말씀입니다. 공산주의도 아니고 어떻게 밭과 집을 팔아 그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둘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그것을 자발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적용할 수 없는 공산주의 원칙이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와 본문에 나타난 교회공동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칼과 무력의 힘으로 목적을 수행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비밀이 바로 3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읽어볼까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있어요?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뭐라고요? 그렇습니다. 재물에 대한 그들의 인식, 그것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왜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원자요, 주님으로 받아들인 순간, 그들은 물질뿐 아니라 그들의 인생,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바로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물질, 우리의 자녀, 우리의 재능, 우리의 집,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 그 고백대로 살아가는 삶이 없다면 본문에 나타난 성도들이 받은 은혜, 그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평생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망가진 인생, 자신이 주인되어 살아 망가진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듣고 우리는 은혜를 받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청지기 정신으로 형제들을 용납하고 이해하며, 소외된 이웃과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필립 얀시가 최근에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집회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얀시가 그녀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은 보통 하루에 15명쯤의 남자를 상대하는데 코스타리카에서 온 ‘힐다’라는 여성은 하루에 2교대로 100명의 남자를 상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치욕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3시간 동안 들으면서 필립 얀시는 성매매를 하는 생활에 대한 선입관이 다 깨졌다고 했습니다. 힐다라는 여성은 자신의 말을 몇 번이나 멈추고 감정을 추스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해요. 엄마 얘기는 여태까지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어요.”
그녀는 흐느낌을 겨우 가라앉히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우리집은 돈이 없었어요. 엄마는 내가 네 살이 되자 성노예로 나를 팔았지요.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나는 매음굴에서 일했고, 나이가 어린 탓에 돈을 더 많이 벌었습니다. 정말 그런 고생이 없었어요! 밤마다 울다 지쳐 잠들었지요. 내가 번 돈은 엄마가 다 가져갔어요. 십대 때 임신이 됐어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그랬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너같이 더러운 여자는 아이를 기를 수 없다’면서 아이를 빼앗아갔어요. 그리고 다시 매음굴로 보냈지요. 그때부터 저는 아이들을 먹여 살릴 돈을 벌려고 더 열심히 일했고 2교대로 할 때도 많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내 사랑을 보일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었어요. 평생 나는 더럽고 추한 기분이었고 창피했어요. 고통을 잊으려고 술과 코카인에 중독되었습니다. 아이들만 아니라면 살아갈 이유가 없었어요. 하루는 어떤 손님이 자기가 시키는 대로 변태 짓을 안 한다고 버럭 화를 내는 겁니다. 그가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때려 머리가 터졌어요. 보이죠?”

그녀는 머리칼을 헤집고 필립 얀시에게 흉터를 보여주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자살하려고 했어요.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내 몸에 꽂아놓은 튜브들만 다 빼버리면 되겠다 싶기도 했어요. 그러나 대신 저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매달렸어요. 어떻게든 성매매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내 아이들에게 엄마다운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그때 하나님이 기적으로 제게 환상을 보여주셨어요. ‘라합 재단을 찾아라’ 저는 라합이라는 단어도 몰랐죠. 다행히 간호사의 도움으로 번호를 알아내 라합 재단으로 전화를 걸어 ‘도와주세요. 저는 죽어가고 있어요. 더는 못 견디겠어요’라고 말하고는 그곳을 찾아 갔습니다.”

힐다라는 성매매 여성은 다행히 그들을 돕는 재단인 라합 재단에서 메릴리애나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고 그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자로, 지치고 사나운 세상에 은혜의 막강한 힘을 풀어놓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죄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빛이 더 필요한 사람, 버림 받은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 압제자와 압제받는 사람 모두에게 언제라도 은혜가 흘러나가는 곳, 교회가 바로 그런 곳으로 소문나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이기를 소원합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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