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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수를 사랑하라 (마 5: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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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 (마 5:38-48)

(마5:38-4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1.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다른 일 때문에 목사님 설교를 듣지 못했던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셨나요?” 남편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아내를 힘껏 껴안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내는 목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제 설교에서 무슨 말씀을 전하셨습니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 <베니스의 상인> 이야기입니다. 1596년, 유태인에 대한 반감은 16세기의 현실이었습니다. 그중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며 자유로운 도시국가였던 베니스에서조차 그러했습니다. 법에 의해 유태인들은 낡은 벽으로 둘러쌓인 공장이나 ‘게토’(ghetto,유대 인들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거주 지역)에서 살아야만 했고, 해가 지면 문을 닫고 기독교인들이 감시를 했습니다. 

낮 동안 ‘게토’를 떠나는 자는 빨간 모자를 써서 자신이 유태인임을 알려야 했습니다. 부동산 소유권이 없었던 유태인들은 고리대금업자가 되었고 이는 기독교법을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현실적인 베니스인들은 이를 눈감아 주었으나 종교의 갈등에서 오는 증오심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유태인에 대한 멸시와 적대감의 근거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자들이었다는데 있었습니다. 등장 인물 중 안토니오는 이자놀이를 하는 자들을 경멸하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거나 순수한 우정으로 목숨을 걸면서까지 친구의 곤경을 도와주는 전형적인 기독교인입니다. 

그의 절친 베사니오가 재색을 겸비한 팔방미인이며 부유한 상속녀인 포시아에게 청혼하기 위해 안토니오에게 3천 다켓이라는 거금을 빌리고자 합니다. 안토니오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3개월 후에 갚겠다며 3천 다켓을 빌리고 차용증서를 써줍니다. 그리고 그 돈을 절친 베사니오에게 빌려줍니다. 

그런데 안토니오가 써준 차용증서에는 만약 명시된 기일과 장소에서 원금을 갚지 못할 경우, 그 벌칙으로 정확히 1파운드의 살점을 도려내 가져가도 좋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은 평소 샤일록이 안토니오로부터 받은 온갖 멸시와 조롱에 대해 보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니스를 지배하고 있는 물질과 법의 힘을 빌려 샤일록이 기독교에 대한 복수(復讐)로 만족하겠다는 음흉하고 잔인한 악마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베사니오는 친구 안토니오가 샤일록으로부터 직접 차용한 돈을 빌려 벨몬트의 포시아에게 청혼하는 일에 만반의 준비를 다해 마침내 청혼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렇게 좋은 날 베사니오의 절친한 친구 안토니오에 대한 불길한 소식, 안토니오의 상선들이 모두 난파당했다는 것과 샤일록에게서 빌린 돈 3천 다켓을 갚지 못한 채 3개월이 다 지나 샤일록이 차용증서대로 집행하겠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마침내 샤일록이 청구한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리게 됩니다. 재판을 담당한 공작(公爵)들은 샤일록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풀라고 거듭 권고하지만, 샤일록은 자신은 이미 거룩한 안식일에 채무 이행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했다며 분명하게 거절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기독교인들을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또한 이 소송 사건을 기각한다면 공작들의 권위와 베니스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에 대한 미움보다 확실한 증오심을 품고 소송한다며 법대로 시행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이때 재판에 참석한 베사니오는 차용금의 2배인 6천 다켓을 내놓으며 소송 취하를 요구하지만, 샤일록은 6배를 준다해도 받지 않고 안토니오의 살은 자기 것이라며 집행을 요구합니다. 샤일록은 집요하게 판결을 요구하며 가져온 칼을 꺼냅니다. 이에 공작 대표가 이 사건 재판을 위해 벨라리오 현자(賢者)의 추천을 받은 로마의 젊은 법학자에게 법정을 위탁합니다. 젊은 법학자는 사건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가운데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비는 하늘에서 대지 위로 내리는 단비와 같이 이중의 축복을 지니는 것이다. 베푸는 자와 받는 자 쌍방의 축복이요. 자비심을 발휘하여 정의를 실현할 때 비로소 신의 권세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태인이여, 끝까지 정당성만 고집한다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선처를 기대하는 바이나 계속 고집한다면 본 법정은 피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샤일록은 ‘제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법대로 해주십시오’ 라며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원금의 10배를 준다 해도 거절하며 법대로 집행하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젊은 법학도는 선고합니다. ‘피고의 1파운드의 살은 원고의 것이다. 본 법정은 그걸 인정했고 법이 그 권리를 주었다. 원고는 가슴부위 살만 도려내야 한다. 본 법정이 허락했고 법이 허가한 것이다.’ 

선고에 따라 샤일록이 드디어 안토니오의 가슴살을 도려내려고 칼을 들이 대자, 젊은 법학도가 소리칩니다. ‘잠깐, 기다려라. 아직 남은 게 있다. 이 증서엔 원고에게 피를 준다는 말은 없다. 분명 살 1파운드만 취한다고 쓰여 있다. 

증서대로 1파운드의 살을 취하되 잘라낼 때 기독교인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원고의 땅과 재산은 베니스 법에 따라 국가에 귀속될 것이다. 머리털 한 올 차에 저울이 흔들려도 원고는 사형이며 전 재산은 몰수당할 것이다.’ 

이같은 선고에 샤일록은 망연자실하여 할 말을 잃은 채 비틀거립니다. 법학도는 이러한 샤일록에게 다가가 ‘궁지에 몰린 채 서 있는 그대. 무릎을 꿇으라. 그리고 공작님께 자비를 구하라.’고 명합니다. 이에 샤일록이 힘없이 무릎을 꿇자 공작은 ‘우리 정신이 다르단 걸 깨닫도록 그대가 청하기 전에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하지만 재산의 반은 피고에게, 나머지 반은 국가에 귀속시키노라.’고 선고합니다. 샤일록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목숨이고 뭐고 다 가져가시오. 용서도 필요 없소. 내 집을 지탱하는 기둥을 뽑는 것은 내 집을 뺏는 것과 같고 내 재산을 뺏는 것은 내 목숨을 뺏는 것과 같소.’ 

법학도가 안토니오에게 ‘안토니오, 그대는 어쩔 텐가?’ 라고 묻자 안토니오는 ‘국고로 갈 재산은 벌금으로 용서하시고 나머지 반은 제가 신탁으로 맡았다가 저 사람이 죽으면 기독교로 개종한 그의 딸 내외에게 양도하게 해주십시오.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자면 저 샤일록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입니다.’ 라고 자신의 뜻을 말합니다. 

이에 샤일록이 자기 가슴을 쥐어 뜯으며 아주 괴로워합니다. 공작이 ‘받아들이겠는가? 만일 불복한다면 사면은 취하하겠노라.’ 고 하자 아주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동의합니다.’라고 합니다. 

공작은 양도증서에 서명토록 하고 법정을 폐정합니다. 현자 벨라리오가 보낸 로마의 젊은 법학도는 남장(男裝)한 포시아였습니다. 샤일록이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끝까지 고집했던 것은 탐욕에 가득 찬 고리 대금업자로써의 모습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에 대해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품고 있는 유태인의 보복 심리를 말합니다. 자신을 그동안 사람이 아니라 개로 취급한 안토니오 개인 및 베니스인 전체 기독교인들에 대한 복수인 것입니다. 

유태인 샤일록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고, 기독교인들이 승리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집니다. 안토니오가 사면 대신 내건 조건대로 과연 샤일록이 기독교로 개종했겠습니까? 샤일록이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바라면서 그를 개처럼 멸시하며 조롱하고 미워하며 증오하는 것이 과연 기독교의 참 모습이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 과연 승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2. 예수께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이는 구약성경의 규정들입니다. 레위기24:19-20을 보겠습니다.

(레24:19-20)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신19:21)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그러나 이 규정들은 복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라 미리 처벌 조항을 규정하여 법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구약 율법에서는 복수를 금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18입니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하나님니라. 

이 말씀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자’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에게 관용을 베풀어 사랑으로 그들을 감화시키라는 뜻입니다. 

예수 당시 로마 수비대의 권리 가운데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 곧 ‘5리’를 운반하게 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 경우입니다.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적극 도움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43절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의 잘못된 가르침,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구약 성경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레위기 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했고, 잠언 25:21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시정해주시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까지 심화시키고 승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고 하셨습니다. 

원수들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성자인 이엠 바운즈는 기도에 관한 교훈에서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환경과 상황, 그리고 사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기도할 때 우리가 누리는 최대의 축복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가 피곤하고 몹시 배고픈 상태를 이용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양도받고, 아버지 이삭이 실명(失明)한 점을 이용해 ‘에서’로 감쪽같이 위장하여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에서’가 분을 삭이지 못하여 아버지 이삭이 죽은 다음 야곱을 죽여 그 한을 풀려고 했습니다.(창27:41-40)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불러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하란 땅 외삼촌집으로 피신시킵니다.(창27:42-45)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지낸 후 거부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창31:13) 

그런데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있어 야곱에게 가장 중요한 급선무는 형 에서와의 화해였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여전히 적개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형 에서의 분이 풀렸다는 기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화해의 사절단을 에서에게 보냈습니다. 돌아온 사절단으로부터 에서가 무려 400명이라는 대병력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한 하여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새 눈물로 기도합니다.(창32:9-12) 

기도 후에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대면한 이후, 더 이상 전전 긍긍하며 겁에 질린 야곱의 눈이 아니라, 이제는 믿음과 확신에 찬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함께 한다는 믿음으로 형 에서를 담담히 바라보았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자 에서가 달려와 끌어 안고 입맞추어 동생 야곱을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형 에서가 야곱을 두고 ‘내 동생아’라고 부르며 형제의 뜨거운 사랑으로 맞이합니다. 에서는 모친 리브가가 야곱을 그리워하는 것이 몹시 불편했고, 평소 자신의 아내들을 못마땅히 여긴 부모와의 갈등으로 인한 가정불화로 염증을 느낀 나머지 부모에게서 멀리 떠나 세일 땅 에돔 들에서 살았던 것입니다.(창32:3) 

그곳에 살며 동생 야곱에 대한 감정, 야곱을 죽여 한을 풀려했던 감정은 여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갔지만 동생 야곱을 보는 한 순간, 그에 대한 뼈에 사무친 원통함과 보복 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내 동생아’라고 부르며 뜨거운 사랑으로 야곱을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러한 형 에서에게 예물을 드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창33:10-11)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야곱은 형 에서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 은혜를 베푸셔서 형 에서의 마음을 한 순간에 돌려놓으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에서의 마음을 돌려놓으신 것은 하나님이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음장보다 차가운 에서의 마음에 은혜와 사랑의 온기를 심어 주셨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얼굴을 보고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한 것은 형의 얼굴에 나타난 따뜻하고 친절한 우애 속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빛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수심에 가득찬 형 에서의 마음을 그처럼 부드럽게 변화시켜 자신을 영접토록 주장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에서의 마음 이렇게 바꿔 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새도록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원수를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라.”는 뜻입니다. 로마서12:17-21을 보겠습니다.

(롬12:17-21)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하심이라.

B.C.845년경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아람은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게 하는 원수같은 나라였습니다. 아람 왕은 이번 공격을 은밀히 진행하기 위해 비밀 작전계획을 세우고 보안유지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그리고 작전대로 비밀히 잠입해서 이스라엘이 꿈에도 생각못할 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이스라엘 군대가 그곳에 정확히 기습 공격하여 아람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아람 왕은 기가 막혔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곳에 진칠 것을 알았을까? 아마 우연이었겠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좀 더 철통보안으로 작전을 짜서 공격하도록 하자’ 그래서 왕은 모든 참모들과 머리를 맞대고 비밀리에 공격할 곳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이스라엘 군대가 아람 군대의 공격루트를 알고 미리 와서 지키는 게 아니겠습니까? 결국 아람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크게 패배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빈번히 아람 군대가 가는 곳마다 이스라엘 군대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람 군대는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당했습니다.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는 보안을 아무리 철통같이 세울지라도 물새는 듯 새버리는 바람에 아람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참모들을 불러모아 추궁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가 없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참모 하나가 ‘왕이시여, 우리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왕이 침실에서 은밀하게 말하는 것까지 이스라엘 왕에게 모두 일러바치고 있습니다.’ 며 작전 보안의 실패 원인이 엘리사에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아람 왕은 즉각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엄청난 병력을 보내 그 밤으로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사의 사환이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 보니 수많은 말과 전차를 갖춘 아람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엘리사에게 ‘주인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하고 두려워 외쳤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군대가 그들의 군대보다 더 많다.” 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는데 그가 보니 불말과 불수레가 온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람 군대가 공격해 올 때 엘리사가 “하나님이시여, 저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일순간 눈뜬 장님이 된 아람 군대에게 엘리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길을 잘못 들었다. 이 곳은 너희가 찾는 성이 아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안내하여 너희가 찾는 그 사람에게 데려다 주겠다.” 

그리고서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통째로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갔을 때 엘리사가 “하나님이시여, 이 사람들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아람 군대는 사마리아 성 안으로 끌려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쟁무기 하나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생포당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자신이 손 하나 쓰지 아니하고 저절로 굴러들어온 아람 군대를 보고 엘리사에게 ‘내가 이들을 죽일까요?’ 라며 원수같은 적군을 몰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건 안 됩니다. 칼과 활로 생포한 전쟁 포로도 아닌데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다음 그들의 왕에게 돌려보내십시오.” 라며 원수에 대해 선으로 갚으라고 지시합니다. 그래서 왕이 그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자 실컷 먹고 마신 다음 아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로 아람 군은 다시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는 원수에 대해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선으로 악을 갚았습니다. 엘리사는 원수를 자신이 갚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엘리사는 ‘원수가 주리고 목마를 때 먹이고 마시우게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와 부끄러움의 가책으로 타는 듯한 고통’을 안겨 주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성도가 원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가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놓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베푸는 방법입니다. 은혜를 베풂으로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렇게 행하여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아람으로부터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조우라는 충성된 노예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고 그에게 많은 일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조우와 함께 또 다른 노예를 사기 위해 노예 시장에 갔습니다. 많은 노예들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데 유달리 늙고 힘없는 한 노예가 끼어 있었습니다. 주인은 힘이 좋고 젊은 노예를 사려는데 조우가 병든 노예를 사자고 주장해서 주인은 조우의 말대로 그 노예를 사 왔습니다. 병든 노예는 집에 와서도 별로 일을 하지 못했지만 조우는 그를 열심히 간호하고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인은 조우에게 일도 못하는 그 노예를 무엇 때문에 그토록 극진히 돌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우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저 노예는 나의 원수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나를 유괴해서 노예 상인에게 팔아 지금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 사람도 노예가 되어 병들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저분이 세상 떠날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은 없습니까? 그를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미움을 해결하는 가장 실제적인 능력은 기도에 달려 있고, 변화의 능력은 사랑을 베푸는 데 있습니다. 

유명한 미술가 루오의 작품 중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는 제목의 판화가 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아픔을 주는 도끼날에 독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향을 묻혀준다는 것입니다. 향나무의 향처럼 어떤 경우에도 사랑을 풍겨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그러면 원수에 대한 보복은 어떻게 되겠습니가? 끝없는 용서 가운데 베푸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한 마디로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신명기32:35입니다.

(신32: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하나님은 사랑이듯이 ‘보복은 하나님의 것입니다.’(It is mine to avenge) “보복은 내 것이라.”는 말씀은 보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그러므로 보복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직접 보복하고 복수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 대신 ‘복수는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94편은 ‘복수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억울한 자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시94:1-3)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불의한 일을 당한 억울한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복수해 주실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악한 자들”(미 3:9), 

하나님은 이런 악한 자들을 징벌해서 복수하시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사회적으로 힘없는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들에게 정의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복수할 힘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약한 자들을 대신해서 복수해 주시고, 정의를 실현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보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피해를 당하고도 호소할 곳도, 보복할 힘도 없는 약자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복은 내 것이라.”고 하신 것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 인간 보복의 끊임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의 공의로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상24:12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상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보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다윗의 신앙을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다윗은 아무리 사울 왕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왕일지라도, 사울 왕을 보복할 기회가 수차례 주어졌음에도 하나님께 그에 대한 보복 심판을 맡겼습니다.(삼상24,26장) 

결국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반면 원수에 대한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고 산 다윗과 그 가문은 점점 강하여지고 흥하게 되었습니다.(삼하3:1)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보복은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축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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