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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자의 설교(1) (행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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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설교(1) (행 7:1-8)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스데반 집사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호랑이 굴에 들어갔고 호랑이를 잡았다. 그 호랑이는 기독교의 역사를 새롭게 쓰기 위해 준비된 유대교의 열심분자 사울이란 청년이었다. 스데반은 그 호랑이를 잡았다. 그러나 그 호랑이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스데반 집사.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7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고, 교회에서 성도들로부터 칭찬을 듣던 사람이었다(행 6:3). 사도들을 도와 공동체 안에서 구제와 봉사의 일을 잘 감당했을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 전도의 사역에도 열심히 있었다. 

그는 자신이 헬라파 유대인이었으므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주로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논쟁이 일어났다. 

이유는 그의 멧세지 때문이었다. 그의 멧세지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스데반 집사는 공회에 고발을 당하였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가 고발당한 죄목은 두 가지였다.
행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 성전을 모독한 죄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 모세의 율법을 훼손한 죄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들이 죄가 되는 것은 유대교가 진리를 외면하고 형식주의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그들은 진의를 알지 못하고 들은 말만 가지고 기독교도들을 박해 했던 것이다. 
당시의 재판장은 대제사장 가야바였다. 그가 엄중하게 스데반에게 물었다(1절). 
“이것이 사실이냐?”

대제사장의 심문에 스데반 집사가 답변을 했다. 그 답변의 내용이 2~53절까지이다. 스데반 집사의 답변의 내용은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기 위한 진술이 아니다. 

이미 이전에 사도들이 공회 앞에 끌려갔을 때 사도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다 알고 있었다. 사도들이 예수의 복음을 전함으로 공회 앞에 끌려왔을 때...
행 5: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스데반집사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하였기에 스데반의 진술은 재판장의 심문에 대한 변론이라기 보다는 설교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을 스데반의 설교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순교자의 설교”라고 붙였다. 이유는 이 설교를 마친 후 스데반 집사는 공회원들의 돌세례를 받아 목숨을 잃었다. 죽음에 이르게 한 설교인 것이다. 
행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공회원들 앞에서 행한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심오한 뜻이 있다. 우리가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설교의 핵심을 놓칠 수가 있다. 그리고 분량이 많기 때문에 5번으로 나눠서 설교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첫 번째로 1~8절까지의 말씀, 아브라함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스데반 집사는 율법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공회의원들 앞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서두로 꺼내고 있다. 그는 정중하게 공회원들을 높여 부르고 있다.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이 이름을 부를 때 공회원들의 관심이 집중 되었을 것이다. 저 친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살고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을 말하고 있다. 

스데반 집사는 왜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살았던 것을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 없이 살았던 때와 장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는 그곳,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우상을 섬기고 우상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존경하고 받드는 그들의 조상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 앞에 나타났는가?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초점은 아브라함에게 있지 않고 우상숭배 상태에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유대인들의 조상으로 삼으시기 위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1)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셨다(2절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가 없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영광의 하나님이 우상숭배하는 죄인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 오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아브라함은 이 은혜를 입은 자였다. 


2)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주셨다(3절)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오늘날 산업화된 시대에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다. 그러나 고대 씨족 부족 사회에서 고향과 친척을 떠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모험의 길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면 “고향과 친척”을 떠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세상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책임지시겠다는 뜻이다. 떠나야 하고 주께서 명하시는 곳으로 가야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유대인의 조상,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기 위한 조치이시다. 거룩한 백성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 그는 우상 섬겼던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을 향하여 가야 한다. 


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옮기셨다.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메소보다미아를 떠났다. 그러나 가다가 유브라데 강 상류의 하란에서 멈췄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부친 데라가 하란에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정착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땅으로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는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주저 앉아 있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그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땅에 도착하도록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신 자에게는 끝까지 인도하신다.. 


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다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3가지이다. 첫째는 땅, 둘째는 자손, 셋째는 모든 민족에게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대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아내 사라가 묻힐 작은 땅 막벨라 굴과 사라의 몸에서 난 외아들 이삭이 전부였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5)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들의 구원자가 되심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그네가 되고 4백년 간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창 15:13). 왜 그렇게 하셨을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위한 과정이다. 모든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한 연단의 과정, 종의 자세를 배우게 하신 것이다. 애굽에서의 4백년 종살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종과 같은 봉사자의 자세를 갖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들을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6)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할례의 언약

창 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갈대아 우르(메소보다미아)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순례의 여정 가운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 하셨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시고 함께 하셨다. 그 약속의 증표가 할례이다. 약속의 보증으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우리의 자랑스런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스데반 집사의 첫 번째 설교를 통해서 그가 공회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1)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 곧 은혜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2)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아브라함은 이방인이었고, 성지 밖에 있었던 별 볼일 없는 존재였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특별하지 않았음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특권의식 3가지

1)선민사상 2)율법 3)성전 - 성전과 하나님을 동일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율법은 우상과 같은 것이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 곧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 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성지가 된 것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규칙이었다. 그러다 보니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훼손했다는 거짓증거를 앞세워 스데반을 고발한 것이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성전과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과 무지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되심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특정한 사람, 특정한 지역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항상 움직이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 항상 자기 백성을 새로운 모험을 하도록 불러내시고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특정한 장소에 매여 계시고 특정한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그분의 역사하심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브라함과 같이 세상을 숭배하고, 죄악된 현실의 삶에 안주하고 있던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계속 진리를 따라 걸어가게 하시고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며, 모든 환란에서 구원자와 피난처가 되시며, 성령을 모신 성전으로 삼아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자세.
1)유대인들과 같이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형식주의 외식주의의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말씀에 찔림을 받고 늘 겸손히 섬기는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2)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여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인내로 따라감이 유익하다. 그렇게 하면 복된 믿음의 주인공, 믿음의 가문들을 이루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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