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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등을 넘어 (행 15: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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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을 넘어 (행 15:22-31)


반상의 질서가 엄격하던 19세기말에 천민은 양반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천민 중의 천민으로 불리던 백정의 경우 더욱 심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른 대접을 받지 못했고 호적조차 없어 백성대접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백정들끼리 집단으로 촌을 이루며 살았는데 양반들에게 이런 백정 마을 사람들은 접근해서는 안 될 경계 대상이었습니다. 1895년 무렵, 지금의 관훈동 부근인 관자골에 있던 백정 마을에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는데 미북장로회 선교사 무어가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운영하던 예수교 학당에 다니고 있던 그 아들 봉출이를 통해 사정을 알게 된 무어는 제중원 선교사 에비슨을 데리고 관자골을 찾아가 박성춘을 살려냈습니다. 박성춘은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무어 선교사가 사역하던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양반 마을인 곤당골(지금의 소공동)에 있던 양반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에 백정이 나왔으니 문제가 터질 것은 당연했습니다. 양반 교인들은 박성춘을 다른 교회에 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며 그들의 요구를 일축했고 결국 양반 교인들은 홍문수골(지금의 광교 자리)에 따로 교회를 세우고 나갔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한 박성춘은 충격도 받았지만 오기도 생겼습니다. 양반들이 떠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울 근교 백정 마을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백정으로 태어나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를 사람대접 해주는 종교가 왔다.” 박성춘의 메시지는 그와 같은 한을 가지고 살아가던 백정들에게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홍문수골로 나간 양반들은 이런 곤당골 교회를 보고 첩년들과 백정놈들이 다니는 교회라 하여 무시했지만 곤당골교회는 계속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후 교회를 합치자는 홍문수골 교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금의 인사동인 탑골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였으니 지금의 승동교회의 출발입니다. 세습되어 내려오던 노비제의 풍습은 갑오경장을 계기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던 것이 계급의식입니다. 곧 죽어도 나는 양반, 너는 상놈이라는 구분입니다. 양반이라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 제도에 적응도 느리고 없는 형편에 자존심은 있어 체면을 차리느라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막 시작된 교회에 양반과 상놈이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이를 불편하게 여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혼란과 대립, 진통을 거친 후에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선각자들을 통하여 중심으로 신분과 지위를 구분하지 않는 전통이 세워졌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는 한 뼘밖에 되지 않지만 머리의 생각이 가슴에 와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오랜 전통에 사로잡힌 사람이 새로운 사상, 새로운 체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일 만큼 겸손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교회 안의 갈등도 유대인들이 가진 고정관념이 바뀌지 않아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은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힘썼고 배우기를 힘썼고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놀랍게 변화된 삶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믿는 자가 많아졌습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할례는 믿음의 세례로 대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징표가 할례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기보다 할례 자체가 유대인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특권의식을 나타내는 표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상황에서도 할례 = 구원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안디옥에 온 유대주의자들은 그런 생각을 가진 그룹을 대변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교리 상의 문제로 안디옥 교회 안에 갈등이 생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소집됩니다. 열띤 논쟁도 있었고 자칫하면 엉뚱한 결론이 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간섭하심과 영적인 안목을 가진 리더들의 발언을 통하여 아름다운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갈등을 통해서도 복음의 진보를 이루시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갈등 

바울과 바나바가 일차 선교여행을 다녀온 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바보 성에서 바예수가 대적하다가 눈이 멀게 된 사건, 비시디아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난 사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주님의 능력으로 일으킨 사건, 유대인의 선동을 받은 무리들이 던진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 계속 복음을 전하게 된 사건 등등 그들의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안디옥 교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쁨이 충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 몇 명이 안디옥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교회 전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유대에서 온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갈등의 상황에서 안디옥 교회는 적당히 타협하거나 대립하면서 분열하지 않고 이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의뢰하기로 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교우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까지 가면서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베니게와 사마리아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방문하는 교회마다 구브로와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나누며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 교인들과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보고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부 바리새파 출신 교인들은 이방인 신자들도 자기들과 같이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민감한 문제를 다루려고 모였습니다. 이 회의를 ‘예루살렘 회의’또는‘예루살렘 공회'라고 부릅니다. 

이 회의는 이방인 신자들을 유대인 신자들과 같은 지체로 인정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 소집한 모임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공회의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증인 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견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의견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1) 베드로의 변론

한참 논쟁을 벌인 후 베드로가 일어나서 발언합니다. 베드로 역시 유대교 안에서 지내왔기에 처음부터 이방인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고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본 환상이 단순히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계획과 관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있었다는 사실이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알려지자 이방인들과 함께 있었다고 하여 추궁을 당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며 담대하게 말하자 예루살렘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말했습니다(행 11:17-18).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간치 않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고 죄 사함의 은혜 주신 것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고, 이방 성도들에게 멍에를 씌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이어서 회중은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그들의 간증은 베드로의 변론에 더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2) 야고보의 제안

베드로의 변론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보고를 들으면서 두 의견이 팽팽하던 회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분위기로 흐릅니다. 이때 야고보가 발언합니다. 그는 요한의 형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되었고 마가의 어머니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도 함께 있으면서 성령의 부어주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고보가 베드로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부상하였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취하시려고 이방 사람들을 처음으로 돌보셨다고 하는 베드로의 발언을 지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하며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돌아보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이방인들을 돌보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백성으로 번역된 'laos'라는 단어는 원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단어인데 야고보가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이방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것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9:11-12절을 인용합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 속에 있었고 때가 되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께 돌아오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의무를 지워서 괴롭게 하지 말고 단지 몇 가지 즉, 우상에 드려진 제물, 음행,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 피는 멀리 하도록 권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야고보가 제안한 규정들은 이미 유대인들의 삶에서 오랫동안 지켜온 관습이기에 이 최소한의 규정을 이방인 신자들이 지킨다면 유대인 신자들과의 교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3) 공회의 결의 

예루살렘 공회는 야고보의 제안을 따르기로 결의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공문으로만 보낼 수도 있었지만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을 선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안디옥 교회에 가서 공회의 내용을 설명하도록 배려를 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내용을 담은 공식 서한과 함께 예루살렘 공회의 의견을 전할 대변자로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파송하기로 가결합니다. 공문의 내용으로부터 세 가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루살렘 공회는 사도적 권위를 가졌음에도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 그리고 화평을 이루기 위해 포용과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문은 “사도와 장로가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 교회 대표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형제로 여기고 있다는 뜻으로, 모교회로서 권위를 내세우거나 우월감을 품지 않고 그들을 포용합니다. 

그리고 이방인 신자들이 피해야 할 것 4가지를 언급할 때도 명령하거나 당위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요긴한 것들’로 표현하고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라고 말함으로써 자발적인 순종을 권합니다. 이 요구는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교제와 연합 차원에서 제안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의 덕을 세우며 함께 세워져가기 위하여 서로 양보하고 존중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북하게 여겨질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 가서, 지도자들이 시키지 않은 여러 말로 안디옥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마음을 어지럽게 한 것을 언급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할례를 주장하던 자들에게 그런 말을 할 권한을 준 일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교회의 공인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그릇된 가르침이 침투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어디서 개인적으로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목회자와 먼저 상의하지 않고 다른 교인들에게 교재나 설교 tape를 나누어주거나 같이 공부하는 것이 때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가르침 가운데 이단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성령과 우리는” 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령의 인도 아래 결정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에 모든 결정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공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회의에서는 안건을 토론한 후에 다수결로 결정하지만 가능하면 기도와 충분한 토의를 거쳐 하나의 결론으로 이끄는 것이 덕스럽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의의

한동안 혼란 가운데 있었던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공회가 보낸 편지를 읽고 마음의 부담을 떨쳐 버리고 기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공회의 대변인으로 파송된 유다와 실라도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서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큰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과 기쁨을 되찾은 안디옥 교회는 바울, 바나바와 함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집중합니다. 교회가 맞닥뜨린 위기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지혜롭게 극복할 때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더욱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는 선교현장에서 일어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소집된 모임이었지만 이 모임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는 매우 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할례나 모세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과 교회의 근거라는 것을 확인한 공식적인 회의였습니다. 강한 유대교적 배경에서 출발한 교회였기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았고 또한 변화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면서 할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편견, 이론, 관습, 그리고 이와 연관된 신앙 감정을 하루아침에 모두 버리고 자신들이 철저히 무시하던 이방인과 태연히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고 복음을 이야기 하며 신앙의 감정을 나누거나 같은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이 실제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숨 가쁘게 펼쳐지는 과도기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옛 상황을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구속 상황에 적용하기 위한 과정이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혼란과 대립, 논쟁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 앞에 한 교회로 서는데 필요했던 과정이었습니다. 유대인에서 개종한 신자들과 비유대인으로서 믿음의 길에 들어선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할례나 모세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구원과 교회의 근거라는 것을 확인한 이 회의 이후 사도행전은 더 이상 ‘사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도의 직무, 즉 교회의 기초를 놓는 작업이 완수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제는 모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한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함께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면 기독교는 그저 유대교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하고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논쟁, 대립, 갈등은 있었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일치된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이제 은혜의 복음이 유대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인종과 종족을 초월하는 본격적인 이방 선교가 시작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공회는 회의의 결의 사항이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문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있어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남으로써 복음이 소아시아에서부터 유럽까지 확산되며 선교의 다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 교회 안의 갈등을 최소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공동체가 하나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다보니 견해차로 인하여 갈등이나 논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자기의 주장만 옳다고 고집을 피우거나, 몇 사람의 주장으로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냥 넘어가거나, 혹은 자기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기주장과 다른 사람들을 은근히 비방하며 험담하는 것은 바른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갈등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감정대립을 보이거나 상대방을 적대시하여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타난 갈등과 이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저희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들이 보여준 해결방법은 영적이면서도 상식적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당면한 문제를 말씀 안에서 성숙하게 토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기도하며 의견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주목되는 것은 교회 내부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공개적으로 토의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회중의 의견을 하나로 수렴한 점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인지라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함을 받는 교회는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대화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의 모습을 보이며 다른 형제나 자매들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2) 율법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열정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섬기지만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처음 열정은 식고 형식과 관습과 문자적인 규율에 매여 역동적인 신앙과 삶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율법주의 경향이나 그로 말미암아 인정을 받으려는 공로주의에 알게 모르게 젖게 됩니다. 

예배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자발적인 믿음의 표현이 되어야지 단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심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만 자칫하면 무엇을 했느냐 안했느냐는 외형적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바른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자세로 살아가는 헌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려는데 때로 우리의 영적 안목이 부족하거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거나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분별하는 영적인 민감함, 하나님의 뜻이다 싶으면 담대하게 실천하는 느헤미야와 같은 균형 있는 신앙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난 예루살렘 공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귀한 도전을 제공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면서 새로운 차원에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아름다운 사귐을 통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를 이룰 뿐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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