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겜을 떠나 벧엘로 (창 35:1-7)

첨부 1


세겜을 떠나 벧엘로 (창 35:1-7)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일은 자기인식의 일일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는다는 것과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정말 내가 해야 할 일인지,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를 깨닫는 일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또한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때로 자기착각이나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인식부족이 인생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며 얻어야 할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자기인식의 지혜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 가장 자기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일찍이 체험하게 해주셔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 나옵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야곱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이란 바로 그 옛날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을 그의 인생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순탄하게 주어진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 벧엘이라는 곳이 야곱의 기억에는 그리 유쾌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그 벧엘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창28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야곱의 생애에서 벧엘의 기억은 가장 낮은 밑바닥을 의미합니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가진 것 하나 없이, 동행하는 사람 하나 없이 도망치다가 빈들에 쓰러져 잠들었던 곳이 벧엘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그의 인생에 있어서 벧엘은 가장 낮고 비참하며 무력하게 쓰러졌던 실패의 자리였습니다. 생각하기조차 지긋지긋하고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그 자리가 바로 벧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곱에게 있어서 벧엘이 가지는 의미가 이것으로 끝나버렸더라면 야곱은 영원히 야곱 되지 못하고 그의 인생은 이름도 없이 그렇게 쓸쓸히 막을 내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이 이렇게 값지게 된 것은 벧엘에서의 또 다른 의미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실패한 야곱의 모습으로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야곱을 만나 주셨고 철저히 밑바닥으로 떨어진 야곱을 일으켜 복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헤매던 야곱이 가장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평생에 잊지 못할 아름다운 밤을 보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실패한 벧엘의 의미보다 오히려 야곱의 생애에 길이길이 기억되어야 할 잊히지 않는 벧엘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 시기에 대한 의미는 다를 수 있지만 기억되는 아픈 시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이 나를 실의의 자리로 내몰았다고 생각되면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그 아픔이 나를 성숙하게 했고 그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는 남다를 것입니다.
 
자, 어쨌든 오늘 하나님은 야곱에게 인생의 아픈 기억이 자리 잡고 있는 그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잊었던 아픈 기억이 더 크게 떠오를 상황입니다. 그 옛날 그때처럼 또 다시 그렇게 낮아지고 비참해지고 싶겠습니까? 지금 야곱의 형편은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형, 에서가 받아야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망하여 가족을 데리고 세겜 땅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비극이 됩니다. 자기들의 누이 디나가 강간당한 것에 격분한 야곱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남자는 전부 죽여 버렸고, 아이와 여자와 재산은 모조리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본토인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보통 큰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결과가 뻔한 싸움을 하다가 죽던가 아니면 무조건 도망치는 일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망치는 것마저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막상 야곱에게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란으로도, 애굽으로도, 그 어디로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형 에서가 있는 세일 땅으로 가서 형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살수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 일이 있으니 형에게 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해 봅니다. 모르긴 해도 평소에 야곱에게는 “벧엘에 돌아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아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창28장에 나와 있습니다만 처음 하나님을 만나서 그가 한 서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 아픈 기억이 자꾸 생각나서 차일피일 미루면서 아직까지 이 세겜 땅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가 진정한 신앙을 가졌더라면 아픈 기억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그를 돌보시던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기억했어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벧엘로 올라가지 못하고 육신이 편안하고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이 곳 세겜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겜이라는 곳에 다다라보니까 물도 많고, 풀도 많아 가축을 기르기에는 이 보다 더 좋은 곳이 없거든요. 그런 곳을 두고 황량한 들판인 벧엘에 가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막막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거기가 좋아 안주하고 있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이게 실수입니다. 

비록 벧엘에는 물도 풀도 세겜 만큼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곳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야곱의 신앙이 이것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비단 야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편안하면 안주하고자하는 마음이 생기고, 세상이 가져다주는 것들이 충분하고 좋아서 안주하기 시작하면 신앙도 잃어버립니다. 세겜이 좋아 벧엘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야곱과 같은 우리들입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할 하나님과의 약속이 살아있는 벧엘은 거부한 채 내가 원하는 자유가 있고 날마다 채울 욕망이 있는 세겜의 안일한 삶만을 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로는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차마 편안하고 안일한 그 자리를 박차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차마 그 안일의 자리를 버리고 또 다시 아픔과 실패가 있는 그 벧엘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으로도 꿈으로라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언제나 그렇습니다만 우리의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는 다릅니다. 그것은 오늘 야곱에게도 여지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반드시 벧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을 경험하게 하시고 결국은 벧엘로 가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를 깊이 새겨 본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 고 하신 말씀은 잠들고 안주한 야곱의 신앙을 다시 세워 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패 속에 헤어나지 못하는 신앙을 회복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이 깨어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편안함에 안주하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점점 나태해져가는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자, 보세요. 이제 이 어마어마한 사건 앞에서야 야곱이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비로소 인간적인 계산 방법이 다 없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수긍을 합니다. 야곱이 변했습니다. 그 변화는 야곱으로 하여금 벧엘로 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더 철저히 순종하게 했습니다. 

그의 결단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첫째결단이, 자기들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신앙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때그때 적절히 필요한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자기들이 섬기는 신중에 하나로만 생각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찬양을 했지만, 집 구석구석마다 우상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 호신용 장신구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 거짓된 것들과 잘못된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위로와 복된 손길이 미치는 벧엘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결단 두 번째는, 내적인 변화입니다. 그 가족들에게 하는 말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는 말속에서 그 결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들의 생각대로 행했고, 자신들의 편리한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생각 할 겨를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생각이 이끄는 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고 영적 신앙을 좀먹는 거짓과 술수를 계획적으로 일삼았습니다. 

그러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하나님과는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도 전혀 의식조차 없었던 그 행위를 청산하고서야 벧엘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오늘 야곱을 보면 이방 신상들과, 온갖 장신구들을 상수리 나무아래에 묻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으로 그것들을 완전히 매장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셔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며 벧엘에까지 인도해 주셨다고 본문5,6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세겜에서 마냥 안주하고자하는 신앙이 아닙니까?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면서도 의식도 못하고 결단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야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하나님과의 약속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신앙은 세겜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이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