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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록된 꿈, 생명 구원의 비전 (고전 9: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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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꿈, 생명 구원의 비전 (고전 9:16-23)

우리 교회가 사회교육원을 만들어 지역 주민들과 아이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봉사했습니다. 그 때 인터넷만 약 1200명 정도 가르쳤습니다. 물론 교재도 무료로 주고 수강료도 안 받고 가르쳤습니다. 그 때 인터넷 교육을 받은 분 중의 한 분이 지금 한방 의료봉사로 주일마다 봉사하시는 이 집사님이십니다. 지금 한의원 원장이신 최집사님과 함께 부부가 제가 봉사해주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신실하게 한방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131 쉐마 독서 교실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올해 안에 반에서 적어도 1등 하자”라고 하자 아이들이 “할 수 있다”고 다짐들을 했습니다. 양서를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야 성공 경험도 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감도 생기기 때문에 올해 반에서 1등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제가 앞으로 6년만 열심히 하면 인생 70년이 보장되니까 열심히 하자고 하니까 아이들 모두가 “할 수 있다”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목표가 분명해지면 아이들의 삶이 바뀌게 됩니다. 

1. 우리는 기록된 꿈, 생명구원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낮 12시에 컴퓨터 게임방 2곳을 가보았습니다. 아이들이 게임방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학교에 간다고 책가방을 가지고 게임방에 와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거의 남자 아이들이었습니다. 목요일 새벽기도 나오기 전에 다시 새벽 3시 10분에 게임방 두 곳을 가보았습니다. 여전히 새벽까지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뚜렷한 목표만 있으면 인생은 달라집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목표에 확신을 가져야 그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실천합니다. 

공부라면 자타가 인정하는 신앙 좋은 고승덕 변호사는 고시합격을 위해 50권의 책을 5번 보아야 한다고 해서 자신은 7번을 목표로 책을 보아 1년 만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출항하는 배도, 이륙하는 비행기도, 시동을 거는 자동차도 빠르게 가는 것보다 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20대를 변화시키는 30일 플랜"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연구소는 어느 사회에서나 65세 이상의 정년 퇴직자들이 3: 10: 60: 27이라는 비율로 경제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답니다. 3%는 최고의 부를 누리고 있었답니다. 10%는 퇴직 전과 별 차이 없는 경제력을 갖고 있었답니다. 60%는 간신히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고, 27%는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났을까?"를 조사해 보았답니다. 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답니다. 3%는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목표를 글로 적어 놓고 수시로 꺼내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0%는 목표는 있었으되 글로 적고 수치로 꺼내 읽는 습관은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60%는 목표가 수시로 바뀐 사람들이었고, 27%는 목표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슷한 조사 결과가 예일 대학교에서도 있었습니다. 예일 대학교는 1953년도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은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종이를 갖고 있습니까?" 3%의 학생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97%의 학생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20년 뒤인 1973년도에 1953년도 졸업생들의 경제력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3%가 나머지 97%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은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인종이나 학력, 부모의 환경의 차이가 아니라 비전의 차이입니다. 비전은 중요합니다. 특히 기록된 명쾌한 비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록된 비전은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막연한 비전이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 측정 가능한 비전, 실현 가능한 비전, 명확한 비전을 갖는 사람과 갖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저 생각으로 갖는 것과 문서로 작성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 잘 되기를 원하면 명백한 비전을 기록하게 하고 하루에 한 번씩 읽게 해 보십시오. 눈빛이 달라질 것입니다. 

기록된 비전은 인생의 목표를 분명하게 해주고, 인생을 안내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하루에 5분이라도 미래를 보면 인생은 달라집니다. 기록된 비전은 미래의 이력서이며 인생의 나침판 역할을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2-3)" 

비전을 품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선명하게 기록해야 합니다. 비전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인생은 명쾌해 집니다. 비전이 구체적일수록 삶은 선명해 집니다. 기록된 비전을 품고 비전에 대한 열정을 품으면 내일은 기대가 되며, 삶은 재미가 있고 흥분이 되고 그 비전이 이루어질 확률은 높습니다. 학생은 학생이지만 밤새워 오락하는 아이들은 아마 만나서 물어보면 거의 기록된 비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록된 비전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여야 합니다. 학교간다고 해 놓고 밤새워 오락하는 부모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인데 교회에 다니면서 오락실 간 아이들처럼 산다면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바울은 기록된 비전을 가지고 선명하게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록된 비전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비전을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생 비전입니다. 우리를 무엇을 위하여 평생을 살고 있습니까? 어제 결혼식에 가니까 2부 축하를 하면서 사회자가 잔을 들라고 하더니 “신랑 신부를 위하여” 축배를 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인생을 축배를 들 때 누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합니까? 돈을 위하하여, 명예를 위하여, 권력을 위하여, 쾌락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우리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복음을 위하여, 건강해 지는 것도 복음을 위하여, 공부 잘하는 것도 복음을 위하여,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도 복음을 위하여, 평안한 삶도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명쾌한 복음을 통한 생명 구원사역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자선냄비를 통해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구세군이 있습니다. 이 구세군을 창설한 사람이 윌리엄 부스라는 사람입니다. 1904년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는 구세군을 창설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복지혜택을 준 윌리엄 부스를 왕실로 초청하여 격려했답니다. 그 때 왕은 격려 끝에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 때 구세군 대장 윌리엄 부스는 겸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답니다. "국왕 폐하, 제가 바라는 것은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저의 희망이요, 비전입니다. 그리고 최대의 기쁨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라는 찬송가를 작시자 엘라이져 캐슬(Elijah Cassel)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본래 의사였답니다. 그는 의사로서 성공하였답니다.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특별히 전도에 대한 비전이 있었답니다.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며 육신의 질병만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질병을 고치기 위해 복음을 전하며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는 복음 전도라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돈 버는 것보다도 전도 하시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답니다. "그렇고말고요.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인데요"라고 말했답니다.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란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그 말을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을 하겠다고 말했답니다. 

그의 부인은 전공이 음악 이었답니다. 그래서 이 부부의 고백으로 탄생한 찬송이 바로 찬송가 508(270)장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그는 나중에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불타는 열망 때문에 목회에 헌신하여 목사로 부임할 때 이 부부는 취임 예배에서 취임사를 대신해서 이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이 생명구원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 보지 않겠습니까?


2. 우리는 기록된 꿈, 생명 구원의 비전을 이행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는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전만 가지고 비전을 기록했다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책상 앞에 시간표를 적어 놓고 자신의 꿈을 기록하여 붙여 놓은 아이들이 왜 학교 갈 시간에 오락실에 가있겠습니까? 학자들은 아이들이 공부에 부진한 이유를 첫째가 목표가 없는 것이고 둘째, 동기부족, 셋째 자신감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아무리 하고 싶어도 나쁜 공부 습관이나 비효율적 공부 방법, 건강이나 환경이 뒷받침 되지못하면 공부의 진전이 없다고 말합니다. 

목표 다음에 동기부여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공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업도 생명 구원 사역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기록된 목표가 있는데도 왜 스마트폰에 3시간씩 매달려 있습니까? 공부에 대한 절박한 의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공부를 꼭 해야만 한다는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공부 안하면 10년 후 20년 후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절박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스라엘 가서 강연하는데 45분에 50만 달러(약 5억6150만 원)를 받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가 지난 주 아이들과 함께 131 쉐마 독서 교실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클린턴은 그렇게 많이 받는 데 아르바이트 하면 한 시간당 얼마나 받느냐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2013년도 최저임금은 한 시간 당 4,860원입니다. 얼마 전에 ‘최저임금 1만원’을 요구하며 경총포럼에서 기습시위를 벌인 알바연대 회원 4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자료를 보면 수능 성적 1등급의 월평균 초임 임금은 201만4000원, 12등급은 122만 6000원으로 나와 있습니다. 대졸 학력 이상 가구주의 월평균 가계소득은 498만7000원, 중졸 이하는 242만 7000원으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런 자료를 보여주면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공부하여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동기 부여를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절박성을 가지게 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45분에 5억은커녕 5천원도 받지 못하는 것을 절박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비전, 전도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생명 구원 사역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의무, 거룩한 부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땅히 당연히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국민으로 세금을 내고, 국민으로 국방의무를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

도 바울은 믿는 자로서 당연한 의무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불이익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이 시키는 일을 거부하면 필연코 화를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투에서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총살형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신 그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예수님은 70인 전도대를 파송하면서도, 부활하셨을 때도,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셔도, 승천하기 전에도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최대의 지상명령과 동시에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그 피 값을 추궁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17-18)”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당신의 백성으로 먼저 삼으신 것은 곧 우리를 이 민족에 대한 파수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박감을 가지고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6-27)” 


3. 우리는 기록된 꿈, 생명구원 사역을 하나님께서 상급 주기 위해 내게 맡겨준 마지막까지 이루어야 할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17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생명구원 사역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명'(oikonomian)은 집 주인이 집안일을 믿을만한 청지기에게 신임하여 맡길 때에 쓰여 지는 말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해준 소명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현대어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만일 내가 자진해서 이 임무를 맡았다면 주께서는 내게 특별한 보상을 주시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이 거룩한 임무를 맡기셨기 때문에 내게는 선택할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고전 9:17)” 

사명이란 마지막 천국에 갈 때까지 생명을 바꾸어서라도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사명의 출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반드시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임무입니다. 대통령이 미국 대사로 임명해 주면 소홀히 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바울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사도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고전15:9). 

그는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고(딤전 1:13), 스스로를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엡 3:8)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가던 중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시면서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라고 분명하게 그의 사명을 말씀 전하는 자를 통해 알려 주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이방인에게 보내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들었습니다(행 22:21). 

바울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자신을 택하시고 이 일을 맡기셨다는 사명의식, 소명의식이 분명했습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갈 1:15-1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부르심과 같이 모태로부터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바울의 말을 변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 13:47)” 

바울은 이 사명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은 소명의식은 분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소명의 원천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인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나 소명의식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복음 전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일에 생명을 걸고 살아간 것입니다. 수없이 문화와 언어가 다른 곳들을 찾아다니며 몇 번의 죽을 고비와 매질에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복음 전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바칠 마음의 자세로 임하였습니다. 수많은 곳에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 사람들로 만들어 십자가의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만족시켜드리는 것 외에는 생을 위한 어떤 욕망에 의해서도 얽매어 있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괴로움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교회를 위해 더욱 헌신하였습니다(골 1:24)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고난도 받지만 상급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18절을 읽어 보세요. 현대어 번역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의 상급은 먼저 복음을 전하는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받을 보수가 무엇이겠습니까?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고 내 권리를 조금도 주장함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서 오는 특별한 기쁨,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을 보수입니다.(고전9:18)”

예수님께서 70인의 전도대를 보내었을 때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 올 때 기쁨이 충만하여 보고 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19-20)”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의 기쁨, 이 땅의 권세도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하늘 나라에 상급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 12:3)”라고 했습니다. 

전도는 교회가 기쁨을 누립니다. 전도하는 교회가 축복을 받습니다. 전도하는 교회가 부흥의 기쁨을 맛봅니다. 전도하는 개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립니다. 

진돗개 전도왕으로 유명한 박병선집사님 순천시의 시의원인 그분은 자기가 전도하니까 30가지의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분은 아주 교회에 대하여 냉소적이었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아내 때문에 가정파탄이 날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아내의 전도를 받고 난생 처음 교회에 출석했는데 빈자리가 듬성듬성한 것을 보고 ‘하나님, 저 빈 자리를 제가 채우겠습니다.’라고 약속하였답니다. 평소 약속을 중요하게 여겼던 그 분은 교회 나간 지 하루 만에 친구를 전도했답니다. 아는 것이 없으니까 “교회 가면 좋다.” 고 진돗개처럼 한 번 물면 놓지 않고 교회에 인도했답니다. 순천시 의원에 출마했는데 선거 운동마저 팽개친 체 전도에 집중했답니다. 그런데 전남 지역 최다득표로 시의원에 당선이 되었고, 순천 시의원 202명 가운데 200명을 전도했답니다. 그렇게 하여 겁 없는 초신자는 1년 동안 무려 750명을 전도했답니다. 관계를 맺고 무조건 목사님 자랑, 교회 자랑, 성도 자랑을 하였다고 합니다.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여 기도하며 집요하게 전도해 교회에 등록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은 자신의 받은 복에 대하여 우선 내 건강이 몰라보게 회복됐다고 합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세속의 탁류에 미려 마치 죽은 물고기처럼 살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부부간의 금슬도 신혼 때처럼 좋아졌고, 가정에는 화목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풍성한 물질축복도 받았고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며 명예도 얻었다고 합니다. 국제대회의 강사로 참석하는 기쁨도 누렸고 정신없이 분주한 삶을 통해 인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태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낮아지고 복음을 위해 겸손해지고, 복음을 위해 적응하고, 복음을 위해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아무에게서도 보수를 받지 않는 만큼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되도록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고전 9:19)”

유대인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유대인과 같이 있을 때는 유대인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교의 관습과 의식을 따르는 이들과 같이 있을 때는 그들의 의식에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논쟁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기 때문입니다. (고전 9:20)”

이방인에게 어떻게 합니까? “이방인과 같이 있을 때도 될 수 있는 한 그들과 잘 어울리려 노력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당한 일은 반드시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들의 신뢰를 얻게 되어 결국 그들을 돕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고전 9:21)”

약한 사람에게 어떻게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사소한 일에도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내가 다 아는 것처럼 나서거나 그들을 어리석다고 탓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깨우치게 하여 나의 도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려고 애쓰는 것은 그들이 자진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를 청하게 해서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고전 9:22)”

대상자를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약한 사람도 강한 사람도 모두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노인이나 어린이나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 우리의 전도의 대상입니다.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불신자들, 예수를 믿지만 정한 교회가 없이 방황하는 신자들, 병든 자, 외로운 자, 문제당한자, 예수를 믿다가 실망하여 현재 나가지 않고 있는 사람들, 이사 온 이웃들, 가족 친척 모두가 우리의 전도의 대상입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게 맞는 방법을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에게 맞는 방법을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에게 맞는 방법을 택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때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때로는 죽음보다 하기 싫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상대방을 위해 희생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했습니다.(19) 경제적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 뿐 아니라(1-19) 자유인으로 모든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바리새인, 로마의 시민권을 갖은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종이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시간도 들이고, 물질도 드리고, 몸도 드리고 재능도 드렸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그들과 함께 복음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고전 9:23)” 오직 생명 구원 사역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초점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종된 이유도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19) 유대인에게 유대인 같이 된 것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얻고자(20) 율법 없는 자같이 된 것도 율법 없는 자를 얻고자(21) 약한 자같이 된 것도 약한 자를 얻고자(22)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고 구원하고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생명 구원을 위해 사는 사명자의 삶입니다. 

구역장이나 교사나 구역 식구 없다고 학생이 없어 못하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은데 아이들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 청교도 황태자라고 불리는 스펄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병든 사람처럼 연약한 여인이 스펄전 목사님께 교사를 시켜달라고 요청했답니다. 

바틀렛 여사인데 스펄전은 미덥지 않아 계속 거절했답니다. 아이는 주지 않아도 교사 임명만 해 달라고 해서 1859년 그녀를 마지못해 교사로 임명했답니다. 매주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700명을 만든 것입니다. 등록 교인을 1000여명을 만든 것입니다. 그녀는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에 “죽어가는 여인의 말을 들어 보세요.”라며 전도했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고 그의 비문에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딸을 추억하며 메트로 폴리탄 테버네클 교회의 목사 이하 제직들과 주일학교 어린학생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한 어머니가 된 그의 말을 여기에 새긴다. 자매여 십자가로 가까이 오세요." 우리가 죽었을 때 우리의 비문에 무엇이라고 쓰겠습니까?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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