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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할례와 침례 (창 17: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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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와 침례 (창 17:9-14) 

창세기 17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장로교회와 침례교회가 구별됩니다. 장로교회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할례가 유아세례의 모형이라고 가르칩니다.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주어야 되기 때문에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침례교회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신자의 침례를 믿습니다. 특별한 환자를 제외하고는 물속에 들어가는 침수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은혜언약’을 통해서 구원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시어 천국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는 것에는 서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언약백성’(Covenant People)이라고 부릅니다.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인데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바로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백성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엄청난 특권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약백성이 낳은 육신의 자녀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낳은 육신의 자녀는 저절로 하나님의 은혜언약에 포함됩니까? 아니면 그들도 각자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까? 

장로교회의 학자들은 신자가 낳은 육신의 자녀들도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언약에 포함되며 언약의 표징인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침례를 줄 수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장로교회는 신자가 낳은 육신의 자녀를 ‘언약의 자녀’(Covenant Children)라고 불렀고 어렸을 때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근거가 구약에서는 창세기 17장,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2장 39절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39). 

이 말씀을 가지고 장로교회의 신학자들은 신자와 신자의 육신의 자녀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해석하는데 이것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입니다. 너희 후손들 가운데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들은 다 구원받게 된다는 약속으로 봐야지 이것을 신자의 육신의 자손은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약속으로 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침례교회도 언약신학과 언약의 백성이 있다는 것은 믿습니다. 하지만 신자의 육신의 자녀가 자동으로 하나님의 은혜언약에 포함된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7장의 할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Ⅰ. 할례의 대상자는 누구인가?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10). 먼저, 여자는 할례의 대상이 아닙니다.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창 17:11~13).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직접 육신으로 낳았거나 아니면 돈 주고 사온 종이라도 아브라함 집에 사는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이 자식을 낳아도 8일 만에 다 할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 할례를 가리켜서 ‘언약의 표징’(Sign of Covenant)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이 순종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특징은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실 양피를 벤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임에도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창 17:23). 

99세에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았고 아브라함이 86세에 낳아 13세 된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집에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외에도 남자가 300명이 넘게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창 14:14). 그러니까 아브라함 집에서 그날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300명이 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날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로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 17:15~16).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의 뜻은 왕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사래의 이름을 사라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라는 ‘열국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라의 나이는 89세였습니다. 그 나이에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라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창 17:17). 

내년이면 자기는 100세, 아내는 90세이고 이미 경수도 끊어진 사람이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7:18). 이미 낳아놓은 아들 이스마엘에게나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창 17:19~21).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으니 이스마엘이나 복 받게 해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도 이 세상의 복은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천국의 복은 이삭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마엘처럼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이삭처럼 되고 싶으십니까? 이스마엘은 이 세상의 복은 다 받았지만 천국의 복은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이삭은 이 세상의 복도 어지간히 받았고 천국의 복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후손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신약성서에 이스마엘이 천국의 복을 받지 못했다고 명백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0).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사라의 아들인 이삭과 함께 천국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대상이 아님에도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할례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Ⅱ. 할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할례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먼저 할례의 의미에 관한 잘못된 견해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어떤 사람은 할례가 아브라함과 육신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날 300명이 넘는 남자가 할례를 받았지만 아브라함과 육신적 관계가 있는 사람은 이스마엘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아브라함과 육신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표징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람들은 할례가 이스라엘 나라의 백성이 되는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것은 거의 600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아서 야곱이 130세가 되었을 때 애굽으로 건너가 430년을 살다가 나온 이후에 이스라엘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과 이스라엘 국가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어떤 사람들은 할례를 유아세례의 모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앞으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추정(Presumption)하여 유아세례를 준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위대한 종교개혁자이며 제가 존경하는 분이지만 유아세례의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제가 존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틴 루터도 어린아이들에게 잠재적인 신앙이 있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도 어린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는 이유에 대해 앞으로 그 아이가 거듭날 것을 추정해서 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잠재적인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이스마엘이 나중에 참된 믿음을 갖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마엘은 참된 믿음을 가질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믿을 것을 추정해서 할례를 준다는 생각도 옳지 않습니다. 

네 번째로 어떤 사람들은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신약교회를 가장 위협했던 악한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이들을 유대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가장 심하게 욕한 대상이 바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할례주의자들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빌 3:2).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사람들을 ‘개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3~4). 오늘날 로마 가톨릭에서는 침례를 영세라고 하는데 영세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유대주의자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할례는 참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언약은 육적인 의미에서의 은혜언약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아브라함과 그의 육신의 자손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자체는 그림자요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인 할례도 역시 그림자요 예표인 것입니다. 표징(Sign)은 그 실체(Reality)가 따로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고속도로를 달릴 때 햄버거 가게 간판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간판 밑에 가서 햄버거를 달라고 하면 줍니까? 거기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햄버거는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간판은 여기서 나가면 어떤 햄버거 가게가 있다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간판이 가리키는 실제 가게에 가서 햄버거를 주문해야지 간판 앞에서 아무리 주문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할례가 가리키고 있는 실체는 무엇입니까?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1~12). 

아브라함이 손으로 한 할례의 실체는 신약시대에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입니다.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는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손으로 한 할례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할례는 내적인 할례, 영적인 할례,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 30:6).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고 모세가 이미 말했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렘 4:4). 예레미야도 마음 가죽을 베는 것이 중요하지 신체의 가죽을 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렘 9:26). 또한, 몸의 할례는 받았지만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으므로 구원받지 못했다고 선포했습니다. 

신약성경에 사도 바울도 참된 할례는 마음의 할례라고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롬 2:28~29). 그러므로 할례는 유아세례의 모형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의 모형인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란 골로새서 2장 11절에 “육적인 몸을 벗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적인 몸은 죄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죄성을 벗어버리는 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죄성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죄를 완전히 짖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성에 대해 다른 태도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에게는 죄성이 남아있습니다. 불신자는 죄성을 따라 죄성에 복종하며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죄성에 복종하지 않고 죄성과 싸우며 하나님이 주신 새 성품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결국, 마음의 할례는 거듭남 즉, 중생(Regeneration)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약 할례가 유아세례의 모형이라면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고 했으니까 유아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 백성 중에 끊어진다고 해석해야 합니까? 이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해석인 것입니다. 그러면 할례를 받지 않는 자가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요한복음 3장 3절에 말씀하신대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녔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10번 읽었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성경을 여러 번 읽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사람이 들어갑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의 죄성을 싫어하고 죄성과 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 성품으로 살려고 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구경할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Ⅲ. 할례와 침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마음의 할례와 침례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그리스도의 할례와 침례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신약의 진리를 구약의 할례가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례는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은 침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지만 침례는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왜 침례를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받으라고 하셨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이미 마음의 할례를 받은 믿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신자가 낳은 육신의 자녀라고 해서 유아세례를 받을 수 있는 언약적인 특권이 있다는 가르침은 전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장로교회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만 장로교회의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낳은 육신의 자녀들에 대한 영적인 교육과 훈련을 강화하려고 하는 좋은 동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명백한 가르침을 대적하는 것은 예수님이 금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인간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대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옛날 바리새인들은 밥 먹을 때 손을 씻고 먹는 것을 종교적인 계율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굉장히 야단치셨습니다. 밥 먹을 때 손을 씻고 먹는 것이 뭐가 나쁘다고 야단을 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깨끗하게 하려고 하고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1). 

인간의 유전으로 성경을 바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성도의 육신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교회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목사라고 자식들이 다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장로님이라고 자식들이 다 거듭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 아버지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악을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듭남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손들을 위해서 성경교육도 잘 시켜야 되겠지만 거듭나는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이 교회에 나오게만 하지 성경을 제대로 아는지도 모르고 진짜 거듭났는지도 확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낳은 육신의 자녀는 저절로 그리스도인 될 거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말씀을 똑바로 가르치고 그들이 거듭나도록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저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나는 마음의 할례를 받은 존재인가? 나는 거듭났는가? 이것을 스스로 질문해봐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거듭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침례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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