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느헤미야의 개혁(1) : 세속주의를 척결하라 (느 13:1-9)

첨부 1


느헤미야의 개혁(1) : 세속주의를 척결하라 (느 13:1-9)

원래 느헤미야서는 내용상으로 보면 12장에서 끝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한 장을 더한 13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2장까지를 보면 그토록 소망했던 예루살렘 성벽도 완성했고, 봉헌식도 마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회복과 신앙인적인 부흥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성벽 재건을 기점으로 모든 역사가 좋게 흘렀으면 좋았을텐데 실상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성벽 재건 이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변질되고 타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예루살렘의 총독을 지냈습니다. 그 통치 기간 동안 성벽을 재건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에 없는 영적인 부흥과 도덕적 회복, 그리고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이제 더 이상 느헤미야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바사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바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왕에게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느헤미야가 바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다시 돌아와서 보니 이전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이 변질된 징조들이 보였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깁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헌신을 게을리 했습니다. 가정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신앙은 껍데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한때는 하나님께 아무리 뜨겁게 충성했다 하더라도 안일한 자세로 있다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디차게 식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불덩이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식어 버린 숯덩이로 끝날 수 있습니다. 또 처음에는 순수한 사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외식하는 사람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질된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부흥했던 한국교회가 부흥을 과신하다 몰락해 가는 한국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자칫 108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다 타성 젖어 나태해질 수 있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때 커다란 은혜를 체험하고 가슴 뜨거운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하지만, 이제는 그 열정은 온데간데 없고 형식과 위선과 가식만 남아있는 빈껍데기 신앙인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새로워지고, 하나님 전에 나올 때마다 신령한 은혜를 새롭게 경험하지 아니하면 신앙은 형식만 남게 됩니다. 감사와 찬송은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만 남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재개혁 운동”이 우리에게서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진 신앙을 재 개혁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4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구체적인 개혁의 내용이 나오는데 앞으로 3주간에 걸쳐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순수했던 그 처음신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성벽을 재건하고 마냥 기뻐했던 그 영광스럽고 감격적인 순간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 맹세했던 그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0장에 보면 성벽을 재건하고 커다란 은혜를 체험한 다음 백성의 대표들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대로 살겠다고 맹세하고 일일이 도장을 찍고 서약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반항이라도 하듯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녀들을 이방인과 결혼시켜 아예 모국어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함부로 범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습니다. 십일조를 도적질하여 십일조 곡간이 텅텅 비도록 했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사라지고, 제사장들과 레위지파들이 자신의 역할이 없어 농사지으러 시골로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심각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하고서도 “우리는 성벽을 재건한 백성들 이라는 공로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색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마음이 없습니까? 마음속에 감격과 기쁨이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내 손발에 충성을 잃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전에 찾아 나와 예배하고 말씀 듣고 찬양할 때마다 뜨겁게 흘러내리던 눈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주일을 지키며,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이라는 헛된 꿈을 꾸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의 신앙에 재개혁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느헤미야가 시행했던 첫 번째 개혁운동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1-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총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총회”란 말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총회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 23:3절에 보면 “암몬 사람과 모암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절 말씀에 보면 암몬과 모압 사람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암몬과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때 양식과 물을 구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저주했던 까닭에 이제 영영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즉시로 “섞인 무리”, 즉 혈통적으로 암몬과 모압 핏줄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가려내어 하나님의 성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모습이 바로 오늘 개혁주의 신앙을 지향하는 교회에서 지켜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 중에 하나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생명과 같이 지켜야 하는 것이 거룩성입니다. 따라서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룩하지 못한 것과 분리되는 것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나누다, 잘라내다”라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불결한 것, 불경한 것, 더러운 것, 죄악된 것들을 구별하여 나누고 분리해야 거룩한 것만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거룩한 것은 부정한 것과 결코 타협하거나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 섞인 이방인 무리를 다 내쫓는 일에 갈등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제사장 엘리아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시면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엘리아십은 이전부터 도비야와 아주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느 13:28절을 통해 엘리아십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과 사돈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재건 공사를 함께 방해했던 자들입니다. 따라서 사돈의 친구가 되는 도비야를 엘리아십은 친분 때문에 쫒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 인생의 도비야를 부끄럽고 아프지만 쫓아내시겠습니까? 아니며 더 깊이 숨기시겠습니까? 드러난 부끄러움을 아프지만 인정하고, 정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끄럽고 아프다고 더 깊숙이 숨겨두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에 자리 잡고 있는 도비야를 깨닫게 됩니다. 이때 내 인생의 도비야를 기꺼이 쫓아내고 새 출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 엘리아십의 악행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엘리아십이 도비야에게 “한 큰 방”을 만들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은 바로 성전 안에 있는 방입니다. 성전에 있는 여러 개의 창고 방을 터서 큰 방 한 개로 만들어서 사용하도록 주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방들은 소제물, 유향, 기명 등 성전에서 요긴하게 사용되는 거룩한 물품과 기구를 두는 방들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요, 그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지극히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거룩하고 구별된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인 셈입니다.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섞여 있어서 ‘분리케’ 하셨는데, 오히려 성전에 숨겨두었으니 이것은 얼마나 하나님께 심각한 도전행위이겠습니까? 

제사장 엘리아십은 백성들에게는 이방인들은 다 내보내라고 하면서 막상 자신은 개혁의 기회, 새 출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보다는 이제껏 살아온 관습과 인간적인 정을 끊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살아온 대로 그냥 사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다시 바르게 잡아가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물론 잘된 것이든 잘못된 것이든 그냥 살던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기도 안하고도 불편한 줄 모르던 사람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받았다고 그 순간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에 불평, 불만이 가득하고 감사는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감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상시에 충성하고 헌신하지 않았던 사람이 충성하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곧 바로 충성하는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혁에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세속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을 쉽게 포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절대 도망할 궁리를 하지 마십시오. “난 예외야, 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내 경우는 특별한 경우니까 하나님도 봐주실 거야”하고 자기를 합리화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성전에 숨겨둔 사실을 안 느헤미야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본문 8-9절에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황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분노한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방에 있던 세간들을 창밖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시며 성전에서 장사꾼을 내어 쫓았듯이 예레미야는 도비야를 내어 쫓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다시 하나님께 드릴 제물과 하나님의 종들을 위한 양식들을 넣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중심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셔야 교회도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교회가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 중심의 목표를 포기할 때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와 자리 잡습니다. 이것을 교회의 세속화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의 가정 큰 문제가 바로 세속화입니다. 세속화된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없습니다. 특히 요즘 한국교회의 세속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돈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교회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사람이든지, 권력이든지, 돈이든지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으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교회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의 능력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세속적 가치관들이 판을 치고 있다면 그것이 도비야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고, 교회가 새로워지고, 교회가 부흥되고자하는 몸부림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도비야입니다. 지도자 느헤미야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세력, 교인들의 열심과 충성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 사람이 도비야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전부, 삶의 전부, 마음과 영혼의 모든 방들을 주님께 드리셨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삶에 은밀하게 따로 만들어 놓은 도비야의 방같은 곳은 없습니까? 

방이나 거실에 폼 나게 장식해 놓은 각종 술병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걸어놓은 부적이나 달마상, 책상 은밀한 곳에 숨겨놓은 야한 동영상 등, 하나님과 무관한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욕망들, 신앙과 무관한 옛 습관들과 옛 관계들, 경건하지 못한 취미와 부정하게 만드는 것들, 성령님께서 근심할만한 것들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 도비야의 방입니다. 지금 그것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 방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채우고, 성령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만에 하나, 여러분의 삶에도 이와 같은 도비야의 방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방을 정결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방 때문에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침묵하셨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고, 기도의 응답이 없었으며, 종종 패배하여 넘어졌으며, 원수의 비난과 조롱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 안에 있는 도비야의 방을 정리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나, 가정이나, 인간관계, 그리고 생각이나 행동이나 마음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정결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지금 즉시 그것을 정리하고 내던져 버리리식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 신앙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으면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편하게 살려는 사람이 아니라 불편하게 살아가려고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 신앙의 재개혁을 통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을 잘 지키는 천국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