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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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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주리고 목마름
  
오늘은 팔복의 네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입니다. 의에 허기진 자, 의에 갈증을 느끼는 자!  
  
그러면 본문이 말하는 의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義라는 단어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주로 “dikaiosuvnhn”(디카이오수네)란 단어가 사용됩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모든 것이 바로 義입니다.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법이 바로 의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즉 구원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실 만큼 아무 허물도 없는 것이 바로 의입니다.  
  
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행위로 나타나는 義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실천적인 의입니다. 예를 들면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연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들입니다. 

잠언에 보면 의인의 행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지식과 지혜를 베푸는 것, 기쁨을 주는 것, 이웃을 격려하는 것,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 길로 인도하는 것, 긍휼히 여기는 것, 정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 정직한 것,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부지런한 것, 모범적인 삶, 선한 길을 제시하고 그 길로 다니는 것 등등.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의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둘째는 마음속에 품은 의로움입니다. 예수님은 제 6계명과 제7계명을 가르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하는 자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하는 자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의(義)란 행위로 나타난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도 의로워야 됩니다. 세상 법으로 보면 마음에 품은 것을 죄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어떤 범죄 행위로 표출된 것에 대해서만 문제 삼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에 품은 것은 양심의 자유와 사유의 자유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속에 담긴 것 때문에 처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다릅니다. 겉으로 나타난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은 생각까지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생각과 행위가 동일하게 의로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의인입니다.   


인간에게 의로움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의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살펴보십니다. 그들의 행위를 낱낱이 지켜보십니다. 마음의 생각까지도 철저하게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삼상 2:3)
  
오늘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평가해 보세요.  어떻습니까? 의롭습니까? 당당합니까? 당당하다면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평각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행위만 평가합니다. 그것도 남의 눈에 들키지 않은 것만 평가합니다. 남의 눈에 띄지 않은 범죄 행위는 덮어둡니다. 마음속에 품은 나쁜 생각들은 전혀 평가에서 제외합니다. 그래서 감히 자신은 의롭다고 큰소리칩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하나님이 들으시면 실소를 금하실 수 없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1,4)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은 죄인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10-1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마주하여 교제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 된 채로 버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형편없는 의로움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요? 내 자신에게는 의가 전혀 없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의롭게 만들어 줄 존재를 찾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갈망입니다. 구원의 갈망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신앙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덮어줄 존재를 찾았습니다.  내게는 도저히 의로움이 없는데, 누가 나를 의롭게 할 수 있는가? 누가 나를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할 수 있는가? 결국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의로움과 배부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는 복은 영혼의 배부름과 만족함 입니다. 영적인 배부름, 만족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의롭게 만들어주시고, 하나님 자녀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얻는 배부름과 만족입니다.  
  
“배부르다”(cortavzw)는 말은 실컷 먹다, 혹은 만족하게 되다(be satisfied)는 뜻입니다. 인간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만족은 영혼이 의롭게 될 때입니다. 즉,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자녀로 인정받는 것, 너는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것, 천국 백성이 된 것, 영생을 얻은 것! 아담이 범죄 하기 전에 누렸던 축복이 바로 그런 축복입니다.  

하나님 품에서 함께 사는 복! 내 영혼이 그보다 더 만족할 일은 없습니다. 이런 만족은 육신의 양식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 영달로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주십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죄를 덮을 수 없고,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의로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의를 가리켜 “하나님의 의”라고 표현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아담은 타락한 후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가리려고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곧 시들어서 죄악 된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이런 아담에게 하나님이 만들어 입히신 옷이 있습니다. 바로 가죽옷입니다. 가죽옷이 상징하는 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속죄로 말미암아 입혀주시는 용서의 옷, 의의 옷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어떤 죄인도 예수님의 속죄를 힘입으면 그 모든 죄가 덮어집니다. 완벽하게 가려집니다. 다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영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완벽한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그렇게 갈망하던 의로움, 그 허기와 목마름이 단번에 채워지고도 넘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배부름입니다.  
  
영적인 배부름과 만족은 육신의 환경이나 조건에서 오지 않습니다. 지난주 중앙일보에 어떤 인물이 소개되었습니다.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이란 51세의 미혼 남성입니다. 그는 유태계 인물로 청소년기에는 마르크스에 심취했습니다. 그 후에 자본주의의 실상을 알기 위해 비즈니스에 뛰어들어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은 현재 20억 달러 정도 됩니다. 우리 돈으로 2조 4천억 원쯤 됩니다. 

그가 특별히 주목 받게 된 것은 특별한 생활태도 때문입니다. 한 때는 마르크스 레닌에 빠졌다가, 자본주의 중심인 뉴욕에서 돈을 벌었습니다. 헐리우드 스타들을 초대해 흥청망청 파티를 열던 플레이보이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이런 생활을 접고 서구 자본주의를 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뉴욕과 플로리다에 있는 저택를 비롯하여 모든 재산을 다 팔았습니다. 전용기와 아이폰, 정장 세 벌만 남기고 다 처분했습니다.  그리고 호텔을 떠돌면서 생활합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소유하면 아주 편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불편했습니다. 대단한 만족을 얻을 줄 알았는데 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세상을 바꿔보겠노라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제가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을 소개한 이유는 만족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는 이유에서입니다. 배부름, 만족함은 육신이나 물질적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의로울 때 얻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오늘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이 의로움으로 배부른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에 목마른 삶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에 목마른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분할 만큼 의로운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 것 때문에!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의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은 없을까요? 이제 의로운 자로 인정받았으니 더 이상 의에 대해서 갈망할 필요가 없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의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은 계속됩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우리는 의를 완성해 가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법적인 조치입니다. 하나님 자녀로 인정하고, 천국을 보장하고 상속 받는 법적인 조치입니다. 우리가 어느 집에 양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법적인 모든 권리는 보장받았지만 실제로 그 부모와 같아진 것은 아닙니다. 그 부모를 닮고 동화되는 것은 일평생 이루어야 될 과정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는 聖化(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이제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를 완성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 자녀답게 살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의로움을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뜻을 따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까? 매일의 삶을 통해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팔복의 전반부를 보면 자신에 대한 자각이 점진적으로 증대됩니다. 심령이 텅 빈 것을 발견합니다. 즉, 심령의 가난을 발견합니다. 그 다음에는 죄를 발견하고 애통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고 온유하게 순종합니다. 그 다음은 의가 전혀 없는 것을 깨닫고 굶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의에 대한 굶주림은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심령 가난, 애통, 온유,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은 구원 이후에도, 우리가 세상 떠나는 날까지 심령에 있어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성화의 구원을 완성해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을 통하여 의를 실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의를 실천해야 할까요? 솔로몬의 지침서가 참고가 될 겁니다. 솔로몬은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잠언을 기록했습니다. 너는 하나님 자녀이니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 솔로몬의 가르침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義에 대한 실천 방안입니다. 특히 잠언 1장 3절에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yrIv;ymeW fP;v]miW qd,x, lKec]h' rs'Wm tj'q'l,”(잠1:3)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단어입니다.  
  
첫 번째 단어는 “qd,x,”(체데크)입니다. 義를 나타내는 단어인데 주로 마음에 담긴 긍휼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righteousness. 마음에 품은 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자선의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평생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체다카를 실천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으며, 그 결과를 무덤까지 가져간다고 생각합니다. 의로운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자선으로 실행에 옮기는 삶입니다. 의를 실행하는 첫 번째 방식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fP;v]mi”(미슈파트)입니다. 공평, 공의, 정의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justice. 주로 법정에서의 공정한 판결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의 초두에서 이 교훈의 목적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아들아, 장래를 위해서 이것을 실천하라! 그러면 평생 잘 살 것이다!” 

미슈파트는 법정에 참여하는 판사나 검사, 혹은 변호사와 같은 법률가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매 순간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거기에는 사회적 이슈도 있고, 개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부부관계, 자녀 교육, 비즈니스, 공적인 직무 수행, 개인적 취미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일인가? 바른 판단으로 살아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삶으로 나타나는 의, 실천적인 의입니다. 義는 추상명사입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전혀 무의미합니다. 체데크, 미슈파트! 삶 속에 자선으로 실천되고, 재판으로 실천됩니다. 자선과 재판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의 장입니다. 하나님 자녀라면 마땅히 실천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의 실천자들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욱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정의와 공의는 마음에 담겨져 있어야 하고,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한 삶의 결과는 배부름과 만족함을 가져다 줍니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잠 15:6)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사악한 자는 넘어져서 해악에 빠지리라.”(잠 24:16)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김영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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