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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본 (행 20: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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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본 (행 20:16-38)
  

여러분은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나요? 모본으로 모시고 살며 그 분처럼 살고 싶은 분이 있는가요? 얼마 전 목사 안수 받을 목사 후보생 몇 명 면접이 있었습니다. 6명이 둘러 앉아서 한 명에게 집중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전도사님에게는 멘토가 있나요? 저 분처럼 목회하고 싶다라고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그랬더니 돌아 가신 장로교 목사님 한 분 이름을 댔습니다. 옆에 있던 목사가 말했습니다.
“너는 어느 교단 목사가 되려는 거야?”
“감리교 목사요.” “그러면 감리교 목사중에 모델로 삼아야지, 여기 강 문호 목사가 있잖아?”

그의 입에서 엄숙하게 나오는 말에 나는 놀랐습니다.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며 생각해보았습니다. 후배들이 나를 닮으면 정말 좋은 목사가 될 수 있을가? 내가 목사의 모본이 될 수 있을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를 잘 압니다. 나는 결코 누구에게 모본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 가요?
“내가 모본이다. 나를 닮아라.”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모본을 보였으니 자기를 따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 부러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바울을 두 가지로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은 항성이 아니라 유성이었다.”
“바울은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말들은 바울의 생애를 집약하는 말들입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에게 잡혔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고 죽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생긴 사건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2-24)
마지막 설교는 비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남겨두어야 할 유언과 같은 말씀들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25)

얼마나 슬픔의 언어들입니까?
이 설교에서 바울의 자기의 일생을 담았고 자기 인생관, 자기 신앙, 자기의 모든 것을 간단하게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고별설교를 이렇게 비장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18)
이 고별설교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일생을 살았는 지 엿볼 수 있습니다.바울의 일생을 한 마디로 말하면 <모본을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한 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35)
무엇에 모본을 보였습니까?

1. 청빈한 삶의 모본 

바울은 계속 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33-34)

바울은 먼저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금, 은 그리고 의복은 돈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바울은 돈을 좋아 하지 않았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일생을 선교하러 다니면서 누구에게 손을 벌려서 선교비를 달라고 손을 벌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텐트를 수리하면서 돈을 벌어서 사용하였습니다. 평생 돈을 모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없으면 일했고 있으면 전도하였습니다. 이 때 같은 직업을 가진 브리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 같이 일하며 전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 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 18;1-3)
이 두 부부는 바울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하나님은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이에게 목숨을 내놓고 같이 일할 동력자를 보내 주십니다.끼리끼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청빈한 사람의 모본이었습니다. 
테레사는 평생 청빈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가난하게 사십니까?”
테레사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거지의 가난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난을 배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청빈하게, 바울처럼 청빈하게 살은 이가 마더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옛날 군주들은 자기 자녀가 훌륭한 군주가 되게 하려고 세자들에게 궁밖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일정 기간동안 어둠과 추위를 맛보게 하였습니다. 성종이 그랬습니다. 세종은 자기 세자를 남대문 밖 강 희맹 집에 의탁하여 길렀습니다. 청빈하기로 이름나고 법도가 엄한 집안이었습니다. 그 청빈을 배우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미국의 대재벌들도 자녀들을 아르바이트로 공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난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청빈을 원하시며 청빈의 모본은 바울입니다.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서쪽 야산에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하나 새겨져 있다.
"일생을 남을 위해 살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
이 비석의 주인공이 남강 이승훈 선생입니다. 남강은 모진 고생을 하며 오산학교를 건설하였습니다. 학교를 건축할 때였습니다. 건축하던 일꾼이 기와가 모자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내 집 기와를 떼다가 학교를 지어라."

그는 오산학교를 위하여 가산을 다 팔았습니다. 나중에는 부엌 세간까지 다 팔았습니다. 남강은 1907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난 후 희생을 솔선 수범하는 생활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그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 간 감옥에 있으면서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오랜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암송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철저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오산 학교에서 그는 추운 겨울, 변소에 얼어붙은 오물을 교장인 자기가 먼저 도끼로 깨고 청소하는 솔선수범을 보였습니다. 학생들과 교직원에게 청결 관념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남강 이 승훈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겨레를 위하여 걸레질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
남강 이 승훈은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박사님,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가장 잘 가르칠 수가 있지요?"
슈바이처 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즉 첫째는 모본을 보이는 것이고, 둘째로, 모본을 보이는 것이며, 셋째도, 역시 모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실례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여섯 살짜리 아이를 옆자리에 태우고 운전중이었습니다. 신호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잡혔습습니다. 아버지는 차를 세웠습니다. 운전면허증과 그 밑에 만 원짜리 세 장을 살짝 감추어 주었습니다. 경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경례를 붙이며 그냥 보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괜찮다. 다들 그렇게 한단다." 

그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삼촌이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는지를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고 돌아갔습니다. 옆에서 의아해 하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괜찮아. 세금 제대로 다 내다간 남는 게 없어. 다들 그렇게 한단다." 

그 아들이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방학에 과일가게에서 한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싱싱한 과일은 잘 보이게 해놓고 오래된 과일은 뒤에 감춰두었다가 팔 때 끼워 파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괜찮아. 다들 그렇게 한단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취직하였습니다. 큰 횡령사건을 저질렀습니다. 수감되고 말았습니다. 면회를 온 부모님들이 말했습니다.
"아이고 이놈아 넌 도대체 누굴 닮은 거냐! 왜 너는 가르치지도 않은 짓을 했느냔 말이다." 
그 아들이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아버지. 다들 그렇게 해요. 전 재수가 없어서 걸린 것뿐이에요."

어른은 아이의 본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대로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모본인 자기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청빈의 모본을 보여주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이 부러웠습니다.

2. 약한 사람을 돕는 데 모본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35)

바울은 모본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모본을 보였다고 하는 말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모든 면에서 바울은 모본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약한 사람을 돕는 일에 모본이었습니다.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있으면 돕고, 없으면 못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수고하여 도왔습니다. 자기는 갖지 않았습니다. 

나는 얼마전에 TV에서 감동스러운 사람을 시청하였습니다. 오전은 호떡을 길거리에 팝니다. 그리고 2시경까지 판 돈을 가지고 양노원을 찾아 그 돈으로 봉사하며 평생을 지내는 있는 가난한 부부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모두가 감탄하며 감동을 받으면서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진행자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디서 호떡을 파는 지 알려 주십시오. 사람들이 많이 몰릴 것입니다.“ 그는 끝내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동정적으로 와서 호떡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수고하여 벌 것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존경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약한 사람을 돕기 위하여 수고하였습니다. 약한 사람이란 약하기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것도 약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가 좌절한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새 출발할 수 있습니다. 나는 평생 잊지 못 할 조그만 사건이 있습니다.
개척교회 하느라고 진액을 빼고 목회를 포기하려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한 마디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어려웠지 지금부터는 쉬울 거예요. 고생 다 했어요.” 몇 년후에 그를 만났습니다. 교회가 정상화되고 성장하며 이제는 어려움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강 목사님이 그 때 한 마디 하여 주신 것이 용기가 되어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놀랐습니다. 말 한마디로 약한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문자 멧세지 하나로도 약한 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80세가 되신 김 홍태 목사님이 매 주일 아침 8시면 문자를 보내주십니다.

“강 목사님! 예수님과 같이 강대상에 올라가 승리하세요.” 나는 주일에는 핸드폰을 열어 놓기는 하지만 잘 보지 않습니다. 또 전화거는 분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만은 꼰 핸드폰을 드려다 봅니다. 얼마나 힘이 되는 지 주님을 모시고 강대상으로 올라갑니다.
어느 날 문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전화를 드렸습니다. 김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 아파!” 나는 그의 쾌유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문자 하나로 약한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약한 사람을 돕는 데 모본이었습니다.

잠언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잠 28;27)
그런데 바울은 약한 자를 돕는 데 모본이었습니다.

영국의 버트란트 러셀(1872-1970)은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을 많이 끼친 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논리학자요 철학자요 수학자였습니다. 그는 핵무장 반대 운동도 전개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진진하게 살았던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인생을 좌우한 세 가지 열정이 있었습니다.

1. 사랑 
2. 지식에 대한 탐구
3. 인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정심이었습니다.”
약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35)

무슨 모범입니까?
이미 언급한 대로 바울은 전도비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도비를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일하였습니다. 텐트를 기워주며 고쳐주며 선교비를 벌어서 썼습니다. 누구에게도 자기를 위하여 돈을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주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자에게는 후히 주되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바울은 약한 사람을 돌보는 모본이었습니다.

3. 전도에 모본

바울은 전도에 모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일생을 전도 하나를 사명으로 알고 살았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
그는 일생을 전도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요약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19-21)

무디가 바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50가지 일을 잘 하는 사람보다 바울같이 오직 전도 한 가지만 하는 사람을 따르고 싶다.”
바울이 전도에 모본이 된 데에는 6가지 원칙이 들어 있습니다.

1. 겸손으로

바울은 겸손의 모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바울은 겸손하였습니다. 요즈음 카토릭에서 일어난 교황 선출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5년 동안 감리교 감독회자을 뽑지 못 한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부러운 지 눈물이 흐를 정도입니다.

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나이가 많으니 스스로 교황에서 물러 가겠다고 2월 11일 발표하고 28일에 물러났습니다. 스스로 물러난 교황은 5098년만에 처음입니다.

그래서 3월 14일 12억 케토릭을 이끄는 프란체스코가 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는 유명한 방법입니다. 115명 추기경이 밀폐된 공간에 모입니다. 투표를 합니다. 77표를 받는 사람이 나오면 굴뚝에 흰 연기를 피우면 밖에 있는 사람들은 새 교황이 탄생된 것을 알아 봅니다. 만일 77표를 얻지 못 하면 검은 연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3일만에 5번 선거후에 프란케스코가 뽑혔습니다. 모두가 좋아 하였습니다. 좋아한 이유가 청빈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검소하고 청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선되고 나서 모두 호텔로 가는 데 전용차가 있는 데 마다하고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호텔로 가서 직접 자기 호텔비를 자기가 냈습니다. 사람들은 청빈하고 겸손한 사람들 좋아 합니다. 바울은 겸손 모본으로 살았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2. 눈물로
눈물은 진실입니다. 억지로 웃을 수는 있어도 억지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습니다. 눈물의 사람은 진실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눈물을 보면 감격합니다.

3. 참음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참았습니다. 참음의 모본을 바울이 보여 주었습니다. 참지 못 하고 혈기를 부리며 꽁한 사람을 사람들은 좋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인내에도 모본이었습니다.

4. 주님을 섬김으로
우리의 삶은 오직 예수여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전도하였습니다. 

5. 누구에게나 
바울은 누구에게나 전도하였습니다. 언제나 전도하였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였습니다. 

6. 꺼리낌없이.
바울은 거리낌이 없이 전도하였습니다. 항상 당당하였습니다. 

이같이 바울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향하여 모본을 보였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모본을 보였습니까?

1. 청빈에 모본
2. 약한 사람을 돕는 데 모본
3. 전도에 모본

얼마 전에 우리 장로님이 안보 관광을 떠났습니다. 철원 제일 교회에 가서 민족 운동을 하던 이야기를 듣고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2 땅굴 그리고 백마 고지에 가서 치열하였던 전투사를 들었습니다. 그 곳은 비무장지대였습니다. 연못이 있는 데 아무도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고기들이 얼마나 많은 지 돌을 던지면 가라앉는 데 3박 4일 걸린다는 것입니다. 고기가 많아서 돌이 가라앉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지뢰를 캐내지 못 한 곳이 많아서 울타리 쳐 놓은 곳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멧돼지들은 그 산속으로 다니면서 죽지 않습니다. 지뢰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멧돼지 발자국만 그대로 밟고 다니면 지뢰를 피하여 다닐 수가 있습니다.
1000명이 움직여도 멧돼지 발자국만 밟으면 생명에 위험이 없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하였습니다. 모본되는 예수님의 발자국, 바울의 발자국만 그대로 밟으면 안전하게 걸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나는 외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본입니다.
바울이 우리의 모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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