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출 34:1-9)

첨부 1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출 34:1-9)

1.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기신 ‘십계명’받았습니다.
(출31:18)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이 때가 시내산에 오른 지 40일이 다 되어가는 때였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지 40일이 다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모세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다며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이는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낸 신이라.’며 숭배하며 음탕한 축제를 벌였습니다.

(출32:4-6)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은망덕하고 부패한 행태를 보시고 진노하셨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아예 이스라엘 전 백성을 다 진멸해버리시고 모세 한 사람을 통해 큰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출32:10)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를 갖지 않겠다, 지금까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따라 항상 함께 하셨지만, 그 모든 언약을 파기하고,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두 심판하여 진멸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말씀은 참으로 모세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출32:11-13)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진멸되면 이방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니 뜻을 돌이키시어 화를 거두어 주시라는 간구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주시라는 간곡한 중보의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화를 거두시었습니다.

(출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렇게 모세는 중보의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시게 하고 십계명이 기록된 증거판, 하나님께서 직접 그 판을 만드시고 직접 새기신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진영 가까이 이르러 보니 과연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실만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음란하게 우상을 숭배하며 패역한 백성들의 작태를 보고 모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내산 산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에 대해 듣고, 처음에 모세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백성들의 범죄 현장을 보고서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증거판을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던져 버렸습니다. 여지없이 그 증거판은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십계명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깨뜨린 것은 법이 새겨진 증거 돌판이며, 그 법 자체를 깨뜨린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증거판에 직접 새기신 하나님의 법 자체를 깨뜨린 것이 아닙니다. 


2. 이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명령하시는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34:1-3입니다. 

(출34: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증거판을 깨뜨린 당사자가 모세이기 때문에 모세에게 그 증거판을 준비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증거판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지 않고, 모세가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첫 번째 증거판에 새겨진 십계명과 동일한 내용으로 두 번째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기서 세우는 언약이 첫 번째 세운 언약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의 회복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을 회복하기 위해 두 번째 40일 금식을 했습니다. 이는 한번 파기된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두 번째 증거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는데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4:29을 보겠습니다.

(출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시내산에 언약의 증거판을 가지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모습에 아론과 전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세 자신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 알렉산더 맥클라렌(Alexander MacLaren)은 19세기 말에 영국에 많은 설교를 남겼습니다. 그분이 이 본문을 가지고 한 설교가 ‘복된 무의식’(Blessed unconsciousness)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의 얼굴꺼풀에 광채를 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복된 무의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을 맥클라렌 목사님은 ‘비극적 무의식’(Tragic unconsciousness)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며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나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외칩니다. 

(마3:7-10)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겉으로는 거룩한 체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죄악을 회개할 줄 모르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 뿌리까지 찍어버리기 위해 심판의 도끼가 임박한 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죄악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비극적 무의식’(Tragic unconsciousness)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비극적 무의식’의 주인공이 되지 마시고 모세와 같이 ‘복된 무의식’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복된 무의식’,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있어서 본인은 모를지라도 남들은 알아보는 그런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두 번째 돌판에 십계명을 새기시고 그것을 조각목으로 만든 궤, 이른바 언약궤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신10:1-5)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내가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10:12-16)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이는 두 번째로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언약궤에 넣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겠느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은 너희 행복을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은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며, 제 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는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이를 더욱 간단히 정리하면, 첫째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것입니다.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합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6-40)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므로 십계명,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 십계명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롬13: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십계명이 담긴 언약궤를 주시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행복을 위해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십계명을 언약궤에 담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마지막에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신30:6-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그러면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죄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멸망 직전에 놓여 있는 유다를 향해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렘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한 그들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언약궤에 담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언약을 맺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 언약’은 이제 돌판에 새기지 아니하고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31:31-33을 보겠습니다.

(렘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 ‘새 언약을 맺으리라.’는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는 말씀은 이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그 몸이 찢기시고 피흘려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2:12-16입니다.

(엡2:12-16)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이지만,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은 언약에 대해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모두가 다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거룩한 백성이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합니다.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성도를 두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의 마음판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3:2-3입니다. 

(고후3:2-3)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으면 십계명, 율법을 증거 돌판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마음, 즉 심비(心碑), 마음의 돌판에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육의 심비에 기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긴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징으로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마음으로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 할례’를 받아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증거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 ‘율법’을 ‘마음에 할례를 받아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음에도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배역했습니다. 할례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그들의 행위는 무할례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했습니다. 

(롬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됩니다.

(갈3:8-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은 더 이상 돌판에 새기신 계명의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 말씀을 새겨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눈에 보이는 ‘돌판’이 아닌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히 8:10,10:16)은 옛 언약이 할 수 없었던 양심의 정결(히9:9-10)을 온전히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여 그의 인격을 그리스도의 마음, 신의 성품으로 변화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렘31:33-34)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오늘 본문에서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의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록된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말씀이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일서2:3-5을 보겠습니다.

(요일2:3-5)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 안에 계셔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요한일서2:14-17을 보겠습니다.

(요일2:14-17)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신 것처럼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게 하시는 영광스러운 삶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14:20-21입니다.

(요14:20-21)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성도 여러분의 마음판에 기록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