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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의 경건과 구제 (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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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경건과 구제 (마 6:1-4)

먼저 오늘 본문 6:1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 6장에서 말하는 ‘의’와 앞의 5장에서 말한 ‘의’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늘 본문에 이르는 문맥을 먼저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셨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취임하셨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구약의 남은 자의 구원을 완성하는 적임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에 거하셨고 갈릴리에서 그의 천국 복음을 먼저 외치셨습니다. 그 천국 복음을 따라 갈릴리 사람들을 치료하심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 천국의 복을 받은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천국의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훨씬 탁월한 가르침을 능력있게 나타내셨습니다. 

구약의 남은 자에게 약속하신 복을 산에 모인 무리들에게 선포하셨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은 아버지의 나라에게 상이 더욱 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을 봉사하는 제자들은 어떤 사명을 가져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는 사명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사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지자와 율법을 완전케 하는 천국의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의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5장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6개의 대립명제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5장은 천국의 제자로써 그 사명을 지키기 위하여 천국 율법을 따라야 하는데 그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의라고 하심으로, 천국 제자가 지켜야 하는 법적 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원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반면에 6장은 그 의이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면이 더 두드러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6장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보이는 경건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 경건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러한 경건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6:24절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보이는 경건에 대하여 말씀하는가? 또한 그 경건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으로 말하는가?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 나라의 목표가 가나안 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목표가 가나안 땅의 풍성한 삶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온 부자청년과 같이 구약 백성의 복은 재물의 축복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경건의 표식이 바로 재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천국의 복과 경건은 그와 전혀 다르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6장의 전체적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아야 하겠습니다. 6장 1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 말과 상대적으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라는 말씀이 자주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에 대하여 말하면서 6장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것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라는 말이 대조적으로 쓰인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6장에는 ‘자기 상을 받았다’는 말과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도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경건의 의를 행한 보상을 말하면서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조적인 면을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1절입니다. 설교 처음에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이 구절은 6장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이 1절에 6장의 전체적 내용이 다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은밀한 중에 보시는’이라는 말씀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은 2절에서는 ‘외식하는 자’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것을 고치기 위하여 이 6장의 말씀을 하셨던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말씀을 드려왔던 것처럼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고치시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모세의 법을 고치시러 오셨다면 모세의 법에 속한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모세의 하나님으로, 모세의 주인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해석할 때 주요한 점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는 것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토대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외식하는 것, 거짓말이나 위선이나, 겉과 속이 다른 점을 지적해서 그것을 고치시려고 오셨다면 굳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은 이미 세상에도 널려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이 구약에서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가를 먼저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너무 쉽게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랑하려고 하는 모습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게 감추어서 행하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태가 쓰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에게 익숙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던, 그리고 경배했던 성소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냈던 경건을 알아야 이런 표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경건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나타낼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하나님은 저 지성소 안에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지성소 안에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신 분이 휘장 밖에다 대리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제사장이나 재판관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경건함을 보일 때 처음에 이 제사장이나 재판관들에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드리는 제물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 우선적으로 이 제사장으로부터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건한 삶도 모두 재판관으로부터 판단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제도 자체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으로 이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운 제사장이나 재판관이 없어졌습니다. 휘장이 없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새로운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아들들로,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경건 제도가 사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경건함이 필요가 없어요.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우리가 현대의 인간적 삶에 나타나는 도덕적인 현상으로 접근하니까 성경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의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저희 집 딸에게 용돈을 주는 비유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삼국지를 보면 조조에 이어 그 아들 조비가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 조비는 왕자들 가운데 뛰어난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자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조의 4번째 자식인 조식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아들은 아주 글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주변에 문인들이 많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학식이 매우 높은 선비였습니다. 이 조식을 시기해서 조비는 이 동생을 죽이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왕의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속셈이지요. 

마침 이 조식이 조비가 왕위를 이어 왕좌에 올랐는데도 그 즉위식에 나오지도 않고 그저 문인들과 어울려 술과 글짓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를 꽤씸하게 여겨서 조비는 경호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장수 허저를 동생을 잡으러 군사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조식을 생포하려고 하자 술이 흠뻑 취한 가운데서도 조식은 크게 화를 나타냅니다. 왕이 명령을 내려서 잡아오라고 하였더라도 그를 잡으러 간 군사가 감히 왕의 동생인 자신에게 손을 댈 수가 있는 것이냐고 큰 소리로 화를 내었습니다. 일반 백성을 왕이 친히 명령을 내려서 잡으러 보냈다면 아마 오랏줄로 꽁꽁 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랏줄로 묶기는커녕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아무리 뛰어난 장수요 왕의 총애를 받는 장군이라 하더라도 조식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조식이 왕의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왕족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볼 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왕이 대리로 보낸 장수의 판단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만약 장수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장수의 칼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거든요. 즉 하늘 왕족들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이나 재판관이 임의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차이가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를 말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타내는 경건은 이처럼 일차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백성인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판단을 듣는 관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 어떤 대리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제에 대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사람에게 보이려고’는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구제할 때에 제일 큰 원칙은 바로 사람에게 자기를 과시해서 나타내려 하는 것은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과시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로이드 존스 목사는 우선 광고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에게 자기가 구제한 것을 일일이 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자기가 구제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구제한 것을 잊으라는 것입니다. 구제한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더라도 자기 개인 스스로 장부를 작성해 기록함으로 기억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수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뇌물 장부와 같이 그런 것을 기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도 모르게 구제하라는 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해석과 같이 하게 되면 과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되는가? 그래서 교회나 세상이나 무명 독지가로 자기 이름을 나타내지 않고 몰래 누구를 도왔다고 하면 그것을 일등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정말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산상수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문자적으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으니 그럼 왼손에 눈이 달려 있어서 무슨 기억장치처럼 기억하지 말라는 것인가? 어떻게 오른손이 할 때 왼손은 모르게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러한 말씀도 구약적인 배경이 없이 그냥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하면 이처럼 아주 우스꽝스럽게 됩니다. 구약의 오른손은 몸을 대표할 때 쓰는 말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되는 것은 광고하지 않는다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표현은 몸의 관계를 알아야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을 비추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남에게 돈을 꾸어준 것은 전혀 잊혀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꾼 것은 상대적으로 잘 잊어버립니다. 장부에 기록하지 않아도 남에게 꾸어준 것은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족 중에 형제나 자식에게 꾸어준 것은 꾸어준 것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꾸어주는 형식이 되었을망정 다 잊어버립니다. 그냥 준 것으로 생각하고 맙니다. 

구약은 회당과 거리에서 판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팔을 불어 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재의연금을 모은다 하면 방송국에서 모임 행사를 하게 되고 그 곳에 나아가서 얼마를 수재의연금으로 내어놓았다고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낸 기업이나 사람의 이름을 TV 화면에 보여주게 됩니다. 이것은 외식하는 자와 같이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선량한 사람들이 모두 다 하는 구제방식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이 수재를 당한 것을 돕기 위해 얼마 내놓은 것을 TV에 광고하거나 이름을 써서 나타내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웃을 것입니다. 이처럼 일반 국민이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위해 돕는 것과 부모가 자식을 돕는 것이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이런 차이에 대하여 보상에 관해 말씀드릴 때도 이미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직원이 회사일로 야근을 했다고 하면 마땅히 보상을 요구합니다. 만일 회사가 그런 야근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머리띠를 두르고 시위를 벌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아들이 아버지 회사를 위해 야근을 했다고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건 우스운 경우가 된다고요.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은 사람에게 보이게 하는 경건을 나타내도록 합니다.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을 가지고 오면 반드시 제사장에게 그 제물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 판정을 받아야 그 제물을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은밀한 가운데 계신 아버지께 보이는 구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하는 것을 모르게 할 수가 있는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자식을 기르면서 이제까지 자식에게 투자한 것을 일일이 장부에 기록하여 기억하지 않습니다. 아마 자식의 입장에서도 부모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일일이 다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다른 사람에게 한 것은 잊지 않고 기억을 합니다. 

이것은 한 가족, 한 몸의 관계 때문에 차이가 나게 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가리움이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그의 몸에 연합시키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룹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성도들을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새로운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교회가 구제하는 것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구제하는 것은 자기 몸, 자기 가족, 자기 형제, 자기 부모에게 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거나 장부에 기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아주 사악하게 행동하는 것은 바로 주보에 헌금한 자의 명단을 기록해 광고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습니다. 무명으로 헌금하는 것을 제일로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공공연히 주보에 이름을 광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구제를 무명으로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자식이 잘한다면 다른 자녀에게 이를 알리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알리는가, 감추는가, 광고하는가, 기억하지 아니하는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 몸으로, 하늘 가족으로 서로 구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제를 가족에게, 형제에게 하듯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의 성도들을 경제적인 이익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타인이 아니고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서로 사랑하여 화평을 이루는 것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경건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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