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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아버지 (눅 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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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아버지 (눅 11:1-13)
   
오늘 우리는 짧은 주기도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우리 교단이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을 이제는 잘 암송하고 있지만, 개정되어 나왔을 때에는 암송이 쉽지 않았습니다. 심방 가서 주기도문 하다보면 옛날 것으로 돌아갈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한번 정확하게 암송해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우리는 수 없는 예배 시간에 주기도문을 암송하였습니다. 이 주기도문은 잘못 이해하면 막 그냥 외워야 하는 기도, 빨리 외워 제치는 기도, 예배나 집회를 속히 마쳐야 하니 외워야 하는 기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주기도문에 대하여 아주 귀한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주기도문은 모든 기도들 중의 기도이다. 그것은 지고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로서, 그 안에는 모든 영적이고 일시적 축복들과 모든 시험, 유혹, 고난 속에서의, 심지어 죽음의 시간에서의 가장 강력한 위로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주기도문은 교인들 앞에 가장 가련한 순교자가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주기도가 가진 의미를 알고, 기도문에 전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미신을 믿거나, 다른 신에게 술술 나오는 주문을 들어보셨습니까? 주기도문도 잘못 사용하면 주문이 될 수 있습니다. 

“주기도로 마치겠습니다.” 한 선교회에서 월례회를 마치면서 주기도문으로 끝내자고 했습니다. 점심식사 시간도 많이 지났고, 행사는 길어졌는데, 주기도문으로 마치자고 하니, 누가 빨리 외우나 시합하는 것처럼 외워 제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무슨 기도입니까? 마치 100m 달리기 선수들이 뛰쳐나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말 달변입니다. 얼마나 빠르게 암송하는지 저는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터튤리안은 “이 주기도문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잘 압축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주기도문에 담겨진 깊은 뜻을 기억하면서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풀러’라는 신학자는 주기도문에 담겨 있는 엄청난 가치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신뢰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거룩한 두려움과 사랑을 지니고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는 거룩한 두려움과 함께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 절대적인 비이기성이라고 했습니다. 주기도문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 우리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실 때는 나만의 기도가 아니라, 나를 포함하는 우리 모두의 기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3) 전적인 영성 : 주기도문에 제시되어 있는 간구들 중에 세속적인 행복을 위한 간구는 가장 기본적인 것 단 한가지가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인데, 그것도 필요한 양식을 달라는 정도였습니다. 

4) 어떤 간구도 중복되지 않는 간결성입니다. 중언부언이 없습니다. 

5) 그 전체적인 인식에 있어서 학문이나 지식을 요하지 않고, 오직 거룩함과 신실함만을 요하는 단순성입니다. 이렇게 주기도문은 기도의 형식으로 아주 모범적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를 정의하면서 소요리문답의 98문에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자비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데, 우리에게 거룩한 소원을 두시고, 그 소원을 아뢰게 하시고 그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내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요?’라고 묻는다면 주님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 피조물들에게 주신 가장 근본적인 명령이고, 인간이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가장 본질적인 순종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는 무엇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윤리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기도는 무엇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기도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나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나약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간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되고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간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일생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찾아와 함께 예배드리고 이 예배당을 가장 소중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예배당을 가리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마21:13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배당이 주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 예배당을 두신 목적에 합당한 일이 있다면 찬양보다는 기도에 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유창하지는 않지만, 바르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에게 기도에 대하여 물어봅니다. “회개 기도할 때에 몸과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나요? 기도하는 방법과 기도의 순서를 말씀해주세요. 기도하는 내용과 말씀을 가르쳐주세요.”라고 질문합니다. 우리 성도님으로부터 받은 문자 메시지입니다. 장문의 답장을 드렸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아버지 앞에 자녀로서 말씀드리고 아버지에게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나 혼자 만의 독백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간결하며, 꾸밈이 없고, 솔직한 마음과 언어로 나의 부족한 죄와 허물을 낱낱이 아뢰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다 용서해주신 것을 믿고 감사로 기도를 끝내야 합니다. 

생명력 있는 기도의 순서로 ACTS라고 하여 찬양(Adoration- 시100편), 죄의 고백 (Confession- 요일1:9), 감사(Thanksgiving- 눅17:11-19, 살전5:16-18), 간구(Supplication- 빌4:6-7, 요일5:14-15) 이런 순서로 기도하시면 좋습니다.”라고 답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인데, 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요청입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다 암송하는 기도문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짧은 형태의 기도문인 카디쉬라는 기도가 있으며, “18번 축복의 기도”라고 하는 “세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도 있었습니다. 

“카디쉬”라는 기도문이 있었는데, 이 기도문을 가지고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카디쉬라는 기도문은 회당에서 설교 후에 드리는 기도문이었습니다. 또한 아침과 오후가 시작되는 낮과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에 암송해야 하는 기도문이었습니다. 

카디쉬라는 기도문을 읽어봅니다.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 그 분이 그 분의 뜻에 따라 지으신 세상 안에서 / 그 분이 자신의 나라/ 다스리심이 다스리게 하시기를/ 너희들의 생애에 그리고 너희들의 날들에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조만간 그 분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되소서. 이에 대하여 말하라 아멘” 

12제자들은 이방인도 아니고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수많은 기도에 익숙한 사람들인데, 새롭게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왜 이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임박한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면서 회개를 강조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신학과 종말론적인 소망을 표현하는 기도문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요한 공동체의 기도문, 바리새인의 기도문, 쿰란공동체의 기도문 등 여러 기도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나와서 세례요한의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기도문과는 차별이 있는 새로운 기도문을 만들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운동,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예수님 공동체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주기도문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라고 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이지만, 예수님 공동체의 신앙고백서라고 해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앙과 이상과 소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기도하라”라고 하여 이런 형식과 내용을 따라서 기도하라는 것이지만,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잘 암송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종이와 펜을 주시면서 네가 기도하고 싶은 제목이 있으면 꼭 한 가지만 써보라고 하시면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두 가지도 아니고 꼭 하나입니다. 무엇을 쓰시겠습니까? 

사람마다 다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제목의 공통분모는 각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시급한 것, 지금까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면서 기도하던 바로 그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구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 가장 절실하고, 다음으로 미룰 수 없고, 다른 비슷한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우선순위로 말하면 1순위도 아닌 영순위를 적으셨습니다. 심령의 펜으로 적습니다. 설교는 듣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시면서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이 무리를 지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발걸음 소리가 다릅니다.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누가 지나갑니까?” 그 지나가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그 맹인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은 한번 두 번 외치고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된다, 안 된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부르짖었습니다. 하도 시끄럽게 소리쳐대니 주변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고 망신을 주었습니다. 시끄럽다고 하는데, 맹인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그 맹인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간절함이 주님의 마음에 도달하였고, 주님의 마음에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던 길을 잠시 멈추고 머물러 서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시는 발길을 멈출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외마디 절규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 맹인을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저가 가까이 왔을 때에 주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은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때 예수님은 그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좇으니 백성들이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언젠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이고, 여리고라는 성의 성에 들어오신다고 생각하고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쉽게 주어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잘 사용하여 남은 생애 밝은 눈으로 보면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잘 이용하였습니다. 

우리는 단 한 가지 절실한 기도의 제목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누구나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실 줄 압니다. 지금 생각하고 마음으로 쓰신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부끄러워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기도하시려는 그 제목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조금 미흡하다 하시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수정할 수 있는 감동을 주시고, 기도하기 위하여 엎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 더욱 풍성하고 좋은 것으로 이루어주십니다.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제목이 달라지고, 기도하는 자세도 더욱 성숙하게 이끌어 가시고 친히 지도하십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맡아 목회하는 저에게 한 가지 기도제목을 써보라고 하시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 성령을 주옵소서, 저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저를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옛날 목사님들 사이에서 제일 큰 욕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성령 받지 않고 목회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열심히 봉사는 하는데 심령이 답답합니까?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공부해도 전혀 생활의 변화가 따르지 않습니까? 성령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충만하여 찬송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내 힘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 힘은 얼마가지 않습니다. 내 의지는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할 만큼 성실하지 못합니다. 

스가랴4:6에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사람이 어떤 능력이 있다고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직 성령으로 다 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는 기도할 때에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 첫 번째 예가 떡 세 덩이를 빌리는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5-8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모든 성경 주석들도 거의 다 “강청한다”는 말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강청한다는 말은 귀찮게 졸라대는 것을 말합니다. 

8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그 강청함을 인하여”,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라고만 설교하였습니다. 정말 그렇게 강청하면 됩니까? 우리의 기도에 인내심이 있어야, 간절해야 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계속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눅11:9-10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구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시고 우리는 응답을 받습니다. 찾을 때에 찾게 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릴 때에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김이 없습니다. 이르고 늦은 것뿐이지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 들어주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기 육신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저도 두 딸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물며’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강청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사람도 그렇다고 하면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눅11:11-13에 보면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1-13) 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에는 병행구절이 있습니다. 마7: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한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 아닙니다. 문 두드리는 친구에게 귀찮아서 떡을 건네주는 정도의 속 좁은 친구가 아닙니다. 세상의 악한 아비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가장 있어야 할 것,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하신 성령을 주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렘29: 12-13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50:15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58:9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렘33:3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만 바라볼지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너의 모든 것 창조 하신 우리 주님이 /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 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하나님은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기도합시다. 스펄죤 목사는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간 기도하는 났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헝클어진 문제를 풀어내는 마스터키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우리 교회는 기도에 응답받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길을 가다보니 복권 판매하는 가계인데, ‘명당’이라는 간판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종류의 명당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기도를 응답받는 교회입니다. 기도는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기도에 응답받는 것으로 가장 많은 응답을 받고, 간증거리가 많은 사람은 성목사입니다. 일생 기도 중에 목회하였고,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항상 더 좋은 것으로 넘치게 들어주셨습니다. 

청구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청구서를 내놓지 않고 잘 되면 자기는 운이 좋다니, 하나님 없이도 잘 된다고 교만해지고 불신앙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청구서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마6: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겔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강청하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를 말합니다. 성령 받기 위한 기도에 이런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셔서 모두다 성령의 충만 받으십시오.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성도들, 기도에 응답으로 성숙한 신앙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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