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호 1:2-9)

첨부 1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호 1:2-9)


오늘 우리는 호세아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아니 사실은 그가 특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그에게 맡기신 과제가 아주 특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가서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부르시면서 그처럼 가혹한 과제를 주셨다는 것이 오늘 우리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그는 심한 갈등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명령에 즉시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즉시 그 명령에 순종한 것을 보면 그가 평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짐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뜻을 나름대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신 까닭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호 1:2 하반절) 무슨 말씀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등진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씀이고 그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그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꾼을 부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부르심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그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부르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순종이 일꾼에게 요구된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나중에 그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지만 그의 처음 과제는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실제적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해야 할 그 어떤 일이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음란한 여인을 맞이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자식들까지 음란할 것 같으면 그로서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로 선지자들의 말을 통해서 말씀하시지만 선지자들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호세아의 결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결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제 경우를 보더라도 평생 많은 설교을 들었지만 그 설교들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그것이 좋은 면이 되었든지 아니면 좋지 못한 면이 되었든지 저에게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하여간 호세아는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통해서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 그 다음으로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르엘은 이스르엘 땅에서 발생한 예후의 쿠데타와 그에 따른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기억나게 하는 이름입니다. 바로 그 이름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가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딸 로루하마의 이름이 지닌 의미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로암미라는 이름은 가장 두려운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등지신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계약 파기 선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기반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호세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활동하던 시기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호세아 1장 1절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새롭게 일어나는 앗수르 나라는 아직 그 세력이 팔레스타인 지역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힘의 공백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로보암 2세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상 숭배와 부정 부패라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가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어려움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어느 때보다 번성했던 시기에 이스라엘에 무서운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마침내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호세아가 분명히 대언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호 1:10~11) 장차 때가 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호세아의 삶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가슴 아픈 사랑과 역설적인 구원 행위를 심판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을 깨우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호세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고 그가 대언한 말씀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어 음란한 여인의 남편이 되었고 또한 음란한 자식들의 아버지가 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분노와 복수와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때문에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사랑의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호세아 11장 8절, 9절 말씀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호 1:6 하반절) 더 이상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말에는 겉으로 드러난 뜻이 있고 그 안에 숨겨진 뜻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겠으면 그냥 놔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뭔가 강조하고 싶을 때에 즐겨 사용하는 반어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젊은 연인들을 보면 종종 “미워 죽겠어!”라는 말을 합니다. 진짜 미워서 하는 말입니까? 진짜 상대방이 미워서 죽고 싶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 아닙니까?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역사를 왜 기억하게 하십니까? 그런 비참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이 좋아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못합니까? 그냥 놔 두면 이제 곧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을 텐데... 로암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시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계약을 파기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끝까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호세아를 통해서 그렇게 특이한 방법으로 호소하셨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신 까닭은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구원 역사를 펼쳐 가신다는 말입니다. 먼저 그 주님 앞에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구체적인 삶으로 참 사랑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믿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