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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히 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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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히 2:5-10)


어떤 분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아무개가 오래 전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 후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을까요?”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만일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했다면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또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아무개가 교회를 열심히 다녔고, 또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이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받았겠지요!”
제가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만일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했다면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다녔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다만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교회를 다녔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것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롬 10:9-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확실성은 마음으로 믿고, 믿는 것을 입으로 신앙고백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고백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려고 할 때,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우리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을 요약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도신경은 2000년 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이 고백해 온 정통기독교 신앙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도신경이 우리의 신앙고백을 올바르게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백의 내용

오늘은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내용 가운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중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신경에서는 이 부분이 이렇게 고백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고백의 내용

우선 이 고백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백의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예수님 외에 유일하게 그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이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이 사람은 주후 26-36 동안 팔레스틴 지역을 통치하도록 로마가 파송한 총독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원래 총독부가 있던 가이사랴에서 통치하고 있었는데, 유월절을 전후해서 소요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 ‘예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기소했습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빌라도는 이 예수 사건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노련한 정치 지도자입니다. 예수 사건을 조사해 본 결과 이것은 종교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무죄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사건은 대단히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만일 법적으로 예수를 무죄라고 선고하게 되면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판결을 합니다. 

빌라도는 유대인 명절에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관례를 활용했습니다. 군중들에게 당시 가장 악한 죄수인 바라바와 예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선택하리라는 계산이 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생각과 달리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워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달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이 재판 결과로 고난의 자리로 내 몰리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됐을까요? 도대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고난 받을 분이 아니신데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라는 사람의 불의한 재판 때문에 의인이 죄인이 되셨고, 죄 없으신 분이 죄로 인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 원인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고난을 받으셔야 할 그 어떤 이유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자발적인 고난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어떤 고난이 있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을 통해 죄인의 자리에 서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이미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셨던 분이십니다. 이 고난을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의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분으로서 죄인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결코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는 분으로서 고난의 자리에 서셨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고난의 쓴 잔을 마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단지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으로 끝난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난의 절정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단지 생명이 끝나는 여느 사람들의 죽음이 아닙니다. 이 죽음 안에는 놀라운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이 비밀을 막 10:4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죽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이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영 죽을 우리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는 ‘놀라운 교환’이 있습니다. 저주스러운 것들을 복된 것으로 바꿔주는 놀라운 교환이 있습니다.

저 어려서 엿장수들이 흔했습니다. 쓸모없는 빈병, 폐지, 그리고 쇠붙이를 가지고 가면 엿장수 아저씨가 엿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엿을 그저 공짜로 얻는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버릴 것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쓸모없고 골치 아픈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맛있는 엿으로 바꿔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정말 고마운 교환을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죽음이 저 십자가에서 생명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절망이 저 십자가에서 희망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상처가 저 십자가에서 위로로 바뀝니다. 우리의 실패가 저 십자가에서 성공으로 바뀝니다.

고백의 태도

다음으로 고백의 태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태도로 신앙고백을 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역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 감사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선 우리가 취할 태도는 아주 명백합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때문에 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로 이 고백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일전에 한 수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박성원이라는 분이 쓴 “OK 캘린더”라는 수필입니다.
이분이 월남전에 참전했던 때를 회상해서 글을 썼습니다. 당시 전투가 치열해서 매일 사상자가 나던 상황이었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남는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더랍니다.
그러다 보니 습관이 하나 생기더랍니다. 매일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면 달력에 “OK”라고 썼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오늘 하루 살아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고 귀국할 때 그 “OK 캘린더”를 품에 안고 뜨거운 감사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귀국하고 시간이 흐르니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감격이 사라지고 말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그 “OK 캘린더”를 보면서 회개하고 감사를 회복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감격했었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바쁘고 삶에 쫓기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 감사 그 감격이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때문에 고난 당하셨고, 또 우리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은혜를 점점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특히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다시 감사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뜨거운 감격으로 감사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박성원이라는 수필가가 “ok 캘린더”로 감사를 회복했듯이, 고난당하신 주님에 대한 고백으로 우리가 감사가 회복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최근에 제가 마음으로 따라 부르는 ccm 곡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때문에]라는 곡입니다. 그 가사가 우리가 감사로 고백해야 할 내용 바로 그것입니다.

1. 잊을 수 없네 하나님의 사랑 날 살리시려고 주신 생명
  내 십자가 지고 오르신 갈보리 언덕 날 향한 사랑 때문에
2. 나는 보았네 피 묻은 십자가 날 구하시려고 흘린 사랑
  나를 바라보시며 흘리신 용서의 눈물 날 향한 사랑 때문에
*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 당하셨네
  우리 때문에 갈보리 오르셨네 무지한 우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이런 마음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런 마음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둘, 결단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다음으로 우리가 취할 태도는 바로 결단입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닥쳐올 때 주님처럼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그 고난을 받겠다는 결단으로 이 고백을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예수 믿고 복을 받으라”, “예수와 함께 복을 받으라”는 말은 없습니다. 대신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13),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그리고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이런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 ‘고난 받으라’는 말씀이 실종됐습니다. 대신 ‘복 받으라’는 말이 넘쳐납니다. 특히 이런 저런 ‘축복성회’라는 홍보물이 넘쳐납니다. ‘고난성회’라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하고자 할 때 고난에 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특히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나도 주님처럼 고난이 다가오면 물러서지 않고 그 고난을 당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전에 우리 시대에 마치 초대교회의 대 박해 때와 같은 일이 생생하게 일어나고 있는 보고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중국의 북한 접경지역에서 선교사들에게 신앙훈련을 받고 북한에서 복음을 전하다 붙잡혀 회령 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한 청년의 보고입니다.
회령 보위부에서 대대적으로 기독교인을 색출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8살짜리 남자 아이와 13살짜리 여자 아이 남매가 체포되어왔습니다.

보위부원들도 너무 어린 아이들이라서 측은했던지 예수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 지금이라도 돌려보내주겠다고 회유를 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자 저들은 더욱 비열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8살짜리 남자 동생이 보는 앞에서 누나인 13살짜리 여자 아이를 때리고 심지어 입을 찢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보던 동생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 누나 때리지 말기요 그래도 예수님은 꼭 믿어야 합네다.”
그러자 간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악질 반동분자 새끼들 데려다 총살시키라” 두 남매가 끌려 나간 뒤 다시는 이 아이들을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우선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 아이들이 그 모진 고난과 싸워 이길 수 있었을까? 히 2:18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고난당하신 주님께서 이 아이들을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난 앞에 당당했던 이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부끄러웠습니다. 조그만 고난이 닥칠까 두려워 떨고, 고난이 다가올 때 그거 고난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던 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우리도 이런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가오는 고난과 맞서겠다는 결단 말입니다. 고난과 싸워 이기겠다는 결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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