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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동이를 버린 여인 (요 4: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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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동이를 버린 여인 (요 4:27-30) 
 
 
미래학자 가운데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디슨 이후 최고의 발명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미래를 예측한 것 가운데 86%를 적중시킨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구글에서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총책임자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뇌에 80%를 차지하고 있는 신피질을 통해 생각을 하며 산다고 합니다. 

신피질은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3억 개의 모듈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거대한 저장 창고가 있는데 그 창고 안에는 물건들을 저장할 수 있는 3억 개의 방이 있는 겁니다. 사람은 20세 전후로 뇌의 신피질의 3억 개의 모듈에 우리가 배우고 경험한 기억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지능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3억 개의 모듈 안에 어떤 것들이 저장되어 있느냐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3억 개의 모듈에 정보가 가득 차 있는데  대부분의 정보는 반복되고, 중복된 정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단순한 정보들이 중복되어 쓸데없이 저장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능이 높지를 못하고 명석함이 조금 떨어집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의 뇌는 다양한 경험과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낀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능이 높고 명석함이 뛰어납니다. 

사람은 나이가 20세를 넘어서부터는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려면 기존의 기억을 하나씩 지워야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기존 기억들을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넣기가 그렇게 쉽지를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이가 들수록 어렸을 때의 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며칠 전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런 뇌의 작용으로 인해 사람들이 변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어렸을 때 매우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생각과 경험 속에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국민 학교를 다닐 때 미술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 그림을 그리면 어김없이 운동장 구석에 있는 조그만 연못으로 갔습니다. 제가 앉는 곳에서 보면 학교 담 너머로 검은 기와집의 지붕이 보였고 학교 담장을 넘어 늘어져 있는 버드나무가 보였습니다. 저는 밖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되면 졸업할 때까지 항상 같은 장소에서 말씀 드린 그 장면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미술 시간마다 장소를 옮겨 다니며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겁니다. 설령 그 연못에 갔다 하더라도 연못에서 노는 소금쟁이를 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학교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을 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와 구름을 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릴 많은 장면들이 있는데 졸업할 때까지 생각 없이 한 장면만을 그렸습니다. 

그만큼 제 생각의 폭이 좁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도 없고, 도리어 새로운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경험과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제 뇌의 기억 창고에 별 볼일 없는 것들이 중복되어 쌓여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비생산적인 삶을 살았겠습니까? 

이런 저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 전환점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새로운 생각과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는 남들보다 더디게 진행되었지만 의미 없고 단순한 정보들로 가득 찬 뇌의 창고에 새로운 것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들이 너무나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며 배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부터 모든 삶의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기도 하고 도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경험하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들이 제 뇌의 창고에 쌓이기 시작하며 더딘 진행이지만 삶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변화는 느리지만 진행 중이지만 제가 볼 때 발전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변화된다는 것은 한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믿는  그 순간부터 변화는 조금씩 이뤄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변화하는 삶입니다. 삶이 변하지 않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의 변화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1에서 24절의 말씀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예수님을 믿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한 옛 기억을 지우라는 말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의 새로운 기억을 채워 새 사람으로 변화되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변화하는 삶입니다. 신앙은 변화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말씀에 따른 변화가 없이 복만을 받기 원하면 이것은 기복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마리아의 수가 성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가 성의 여인은 창녀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가장 뜨거운 시간에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녀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이 28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물동이는 그녀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녀의 절박한 삶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여인이 자신이 육체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얻기 원했던 물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자신의 문란했던 삶을 정리한다는 결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간 곳은 동네의 사람들입니다. 그녀가 하루 중의 가장 뜨거운 시간인 정오에 물동이를 가지고 우물에 온 이유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뛰어 갔습니다. 정오의 시간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막이나, 시원한 그늘을 찾아가 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 사람들을 찾아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외쳤습니다. 그녀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 자신이 변한 것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평과 불만을 토로할 때 다른 사람이 변하지 않고, 환경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힘든 삶을 다른 사람과 환경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나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가 성의 여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수가 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수치심, 죄책감에 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정오 시간에 물을 길러 우물에 나온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창녀의 삶을 살았기에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근거림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녀는 사람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하다가 창녀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 나오지는 않지만 다섯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을 했던 사람으로부터 다섯 번이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사람이 싫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처 속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겁이 났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에게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있었고 적대감은 분노와 미움으로 자리 잡아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꽁꽁 닫았습니다. 

그녀는 아픈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향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으면 그 물을 자신에게 주어서 우물에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을 때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다섯 명의 남편이 바뀌었고 지금도 한 남자와 살고 있지만 그녀는 남편이라고 말하지를 못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고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편이 없습니다’라는 그녀의 말에는 사람에 대한 불신과 공허함이 묻어 있습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변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진정으로 찾는 자는 인종과 신분과 성별을 떠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추한 삶을 다 아시면서도 다 용서해 주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창녀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수치감과 적대감, 그리고 인생의 허무함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일어납니다. 

여인이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모든 흐트러진 삶을 알고 계셨지만 한 마디도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여인이 당황스러워할  만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와 대화를 나눈 내용을 보면 그녀에게 가능성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모든  삶을 포기하고 살고 있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소망과 기대감을 심어주셨습니다. 여인이 처음으로 받아보는 자신에 대한 가치 인정이고 존재감입니다.   

여인의 삶의 상처와 아픔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물동이’입니다. 물동이는 여인의 처참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외칩니다. 그녀를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었던 부정적이고, 수치스럽고,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기억들 뒤로하고 새로운 두려워했던 새로운 세계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과 용기는 예수님의 그녀를 향한 사랑이고 칭찬이고 품어 주시는 넓은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물동이는 어떤 것들입니까? 역기능의 가정에서 자라며 겪게 된 아픔으로 인해 이어지는 아픔의 물동이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역기능 중에 역기능의 가정에서 자라 상처가 큰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예수님 안에서 가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부모가 무엇인지, 가정이 왜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고 그 안에서 가정을 나름대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합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라는 좌절감의 물동이를 가지고 있습니까? 미숙한 성품으로 인해 이웃들과 깨어진 관계로 인한 아픔의 물동이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모두가 질고의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물동이’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 물동이를 가지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의 물동이를 가지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세계로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올무가 되어 있는 물동이를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는 자의 기쁨을 선포하며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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