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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하라 받으리라 (요 16: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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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받으리라 (요 16:16-24)


부잣집에 어리석은 종이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어리석긴 했어도 심성이 착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그 종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너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을 보면 이 지팡이를 주어라”라고 했습니다. 
종은 수년이 지나도록 자신보다 어리석은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주인은 중병에 걸렸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날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종은 주인이 떠난다는 말을 듣고는 “무슨 준비를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며 낙심만 했습니다. 
그 때 종은 자기 방에 둔 지팡이를 가져와서 지팡이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리를 가도 나한테 이것저것 준비시키더니, 영영 못 오는 길을 떠나면서 아무 것도 준비 못한 당신이 나보다 어리석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근원적 물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준비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책망하며 꾸짖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어리석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책망하며 꾸짖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어리석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비웃지 말고 사랑하며 사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세상을 떠나게 되는 자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과의 이별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별은커녕 오히려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왕과 신하로서 권세를 누릴 생각에만 젖어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한편으로는 한심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제자들이 그렇게 딱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것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이 수도 없이 고난과 죽음을 말씀했지만 제자들은 그건 남들의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주님이 곧 왕이 되실 것이니 그렇다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만이 그들의 관심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는 지금 죽게 될 것인데 그렇다면 남겨지는 제자들 그것도 한참 승리의 환상으로만 가득 차 있는 제자들이 어떻게 될 지를 생각하면 주님의 마음이 참으로 아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제자들을 바로 세워줄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생각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을 이어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조금 있으면”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이가 놀이방에 가지 않겠다고 악을 쓰며 웁니다. 몇 시간 후면 집으로 돌아오지만, 마치 다시는 엄마를 보지 못할 것처럼 안쓰럽게 매달리며 웁니다. 생각해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길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것을 이별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이방으로 가는 아이는 다릅니다. 아이에게 그것은 이별입니다. 두려움과 고통을 동반하는 아픈 이별입니다. 

이별의 본질은 만나고 헤어지는 시공간적인 분리라기보다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이별이 아닙니다. 아침에 남편을 직장으로 보내는 아내가, 아이를 학교로 보내는 엄마가, 남편과 아이와 헤어지는 것을 이별이라 여기지 않는 것은, 바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 후면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아이에게는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생각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을 쓰며 웁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이별은 일종의 죽음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이별의 절정입니다. 삶이란 결국 크고 작은 이별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별을 통하여 죽음을 연습합니다. 도둑처럼 몰래 기어드는 죽음을 연습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큰 이별을 위하여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잊지 못할 사랑은 잊지 못할 이별을 낳기 마련이요. 이별 속에는 끝이 있고, 끝은 절망인 동시에 또한 새로운 출발입니다.
2009년 8월, 운전기사 교대 근무를 마치고 뉴욕 맨해튼에서 퇴근하던 조 티랄로시는 속이 메스껍고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걸 느꼈습니다. 티랄로시는 도로에 멈춘 차 안에서 발견됐습니다. 심장 정지, 의학적 사망 상태로 그는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뉴욕 장로교병원의 소생의학 전문 의료진은 냉각식염수 등을 사용해 체온을 낮추는 냉각요법으로 뇌와 장기의 손상을 최소화했습니다. 각종 약물과 첨단 기기를 동원한 심폐소생술이 시작됐습니다. 40분이 흘렀고 회생 가능성은 희박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외쳤습니다. “잠깐만요. 맥박이 돌아온 것 같아요!” 15분 뒤 티랄로시의 심장은 한 번 더 멈췄지만 의료진은 다시 한 번 심장을 뛰게 했습니다. ‘두 번 사망’했다가 살아난 것도 놀랍지만 다시 살아난 그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환하게 빛나는 존재를 만났습니다. 부피나 형태는 없었어요. 그건 단지 사랑과 인정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감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다시 쓴다”는 책의 저자 샘 파르니아는 뉴욕 주립대 소생술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소생의학’ 권위자입니다. 그는 “의학의 발달로 ‘죽음’은 최후가 아니라 ‘과정’임이 드러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에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의 경험은 의식·영혼·자아의 존재, 삶과 죽음의 경계, 사후생(死後生) 등에 관한 새로운 의문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단순히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 너머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실이 주님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확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비록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나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딸 그리고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이 다시 살리시기는 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살아도 또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죽음에 대한 말씀은 제자들을 근심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주님이 죽어 세상을 떠나신다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즉 내가 죽어 너희 곁을 떠나게 될 것이지만 조금 있으면 다시 나를 보게 될 거야 왜냐하면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주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립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또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기야 한 번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이런 궁금함이 당연합니다. 여전히 저들에게는 죽음은 영원한 단절입니다. 영원한 헤어짐입니다. 모든 기회가 그로 말미암아 다 사라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당황하지 않겠으며 어찌 그들의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는 것은 불과 몇 시간 후면 다가올 당국자들에 의한 체포를 말씀하시는 것이요 이어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있으면 이라는 말은 곧 벌어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 다음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씀이 되고 말 것이겠지만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새 생명의 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면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습니다. 아니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더군다나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요 우리가 서로 말을 주고받는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딱한 일도 없습니다. 입이 아프도록 말을 해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건 자그마치 삼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해 온 제자들이 이 모양이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래요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 때 우리는 흔히 상대방이 내 말을 다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대화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부부 사이나 동료들, 또는 친구들과의 대화중에 대화에 짜증을 느끼는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공감하지 않으려 하고 판단하려 하는” 대화에서 짜증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사실을 말한 것은 “그저 그렇다. 이런 일도 있더라.”라는 것이고 “세상의 다양함에 대해 나는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어.” 라는 뜻인데도, “그건 일부분일 뿐이지. 대부분은 안 그렇다고.”라는 식으로 무언가를 판단하려고 하는 말을 듣게 되면, 핀트가 안 맞은 것이고, 그러한 핀트가 맞지 않는 대화가 계속되면 짜증이 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말하기를 “우리는 눈빛만 봐도 서로 그 마음을 다 안다”고 하지만 그런 내 착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누구든 부정확하게 알아듣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는 정확하게 말했다고 하는데 상대방은 사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데 지금 예수님은 애매하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앞으로 자신과 제자들에게 이루어지게 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수준이 안 맞는다고 할까요? 아니 예수님은 이 세상의 삶이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 너머 천국 입성 즉 우리들의 구원이 주님의 주된 관심사인데 제자들은 세상사가 관심사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제자들의 관심사이다 보니 주님은 구원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세상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령 충만 말씀 충만하지 않고서는 결국 세상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고 세상의 잣대로 저울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셨고 또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여 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미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 잘 배우고 알고 있습니다. 즉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은 다 예수님처럼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부활과 승천의 삶을 깨닫고 있고 또 믿음 안에서 바라고 있습니다. 그 주님은 우리는 조금 있으면 다시 뵙게 될 것이요 그곳은 바로 주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할지라도 오직 주님만 바라고 주님과 함께 오늘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날에는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좋은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성격이 사나운 사람과는 함께 지내기를 한사코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사람 곁에서보다도 성격이 사나운 사람 곁에서 겸손의 덕을 닦기가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까다로운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참아야 할 일이 있고. 남에게 시달리는 일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내의 덕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나의 일을 가로막는 사람 없이 어떻게 용서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나의 뜻을 반대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인종의 아름다운 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부당한 명령을 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자기 부정의 연단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고, 나에게 빈번히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없이 어떻게 남에게 자비를 베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서보다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서 더 훌륭한 덕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을 절대로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괴로움과 시달림을 받으면서 다듬어져 나오는 보석 같은 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말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우리는 믿습니다. 사실 어떤 어려움과 슬픔과 고통이 닥쳐올 때는 왜 그런가 하여 답답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욥이 친구들과 논쟁하던 바였습니다. 나는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과 대면하여 따져보고 싶다고까지 말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그렇게까지 말하겠습니까? 
한데 제자들의 입장은 욥과는 또 다릅니다. 욥은 영문을 모르고 당한 환난입니다. 지금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 있습니다. 친구라고 위로해 주겠다고 찾아와서는 자기들의 입장만 내세우고 욥을 비난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로서는 욥과는 입장이 조금 다릅니다. 그건 지금 그들이 어떤 환난을 당하고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게 될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답답한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시니까 제자들이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립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냐?” 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서로 궁금해 할 뿐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너희 똑똑히 잘 들어둬. 내가 말이야 조금 있으면 당국자들에게 잡혀가서 재판을 받게 될 거야.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당연히 너희는 슬퍼할 것이야 어찌 그렇지 않겠니? 너희들의 꿈과 야망이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나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니? 아니 그렇지 않다 해도 인간적으로 매우 슬프겠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함께 생활해 왔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하지만 세상은 나를 죽이고 나서 기뻐할 거다. 자기들이 승리할 줄 알 테니 당연히 기뻐하겠지. 하지만 말이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거야. 생각해 봐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지 않니? 혹시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많이 아프다던데 어떻게 견딜 수 있지 뭐 여러 가지로 근심이 될 거야. 

하지만 막상 아기를 낳으면 어떻게 되겠니?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러니까 다시 아이를 또 낳게 되는 것이 아니겠니? 마찬가지야 내가 죽어 장사되고 나면 너희들 슬프겠지. 허망해지겠지. 어디에도 마음을 둘 곳이 없겠지. 하지만 말야. 그게 끝이 아니야. 왜냐하면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거든. 그러면 근심하던 너희는 기뻐하게 될 것이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신난다고 날뛰던 그들 앓던 이가 빠졌다고 하면 두 다리를 쭉 펴고 자던 그들은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게 될 거야. 하지만 너희로서는 다시 살아난 나를 보게 될 터이니 당연히 신나겠지. 그 무엇으로도 너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 아니겠니? 

그런데 이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시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주님이 죽는다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요. 우리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는 그 길이 그렇게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시 그 길을 가게 될 때는 어 이 길이 이렇게 가까웠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제자들로서는 아직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루살이에게 내일 다시 만나자고 하면 하루살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일이 뭔데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를 하나씩 낳다보면 나중에 그런 일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 삼촌이 어쩌고저쩌고 이모가 어쩌고저쩌고 하면 삼촌은 뭐고 이모는 또 뭔데 하지 않겠냐고요?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그래요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 우리를 두렵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지금은 슬픈 것 같으나 오히려 기뻐하게 되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야말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니까 궁금해서 자기들끼리 수군대기도 하고 그러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눈앞에 보게 되는 날에는 뭐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날에는 슬퍼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십자가도 죽음도 두려워할 것도 슬퍼할 것도 아니더란 말입니다. 죽음 그거 별 거 아니네 다시 살아나는데 죽음이 뭐 대수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을 죽인 사건입니다. 더 이상 죽음은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난 기쁨 다시 살아난 주님을 보는 기쁨을 누가 빼앗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다시 사신 것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그 기쁨을 누가 빼앗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너무 좋아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데 감사와 찬양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데 그걸 누구라서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 안에서 날마다 기쁨으로 가득한 나날을 살아가시는 주의 거룩한 백성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날에는 구하면 받을 것입니다.
버려진 개를 많이 키우는 어느 할머니가 계십니다. 이 할머니가 키우는 수백 마리의 개들 중에서 너무 사나운 개에게는 ‘착한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너무 나약한 개에게는 ‘용맹아’라는 이름을 지어서 불렀다고 합니다. 몇 달이 지나서 그 개들이 그 이름대로 착해지고 용맹해졌다고 합니다. 동물인 개에게 사람이 이름으로 부른 말이 개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심리학에서 사람의 말은 견인력 즉, 끄는 힘이 있고 파괴력과 응집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때 신중하고 긍정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버지’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또 그의 아내 사래에게는 사라 곧 ‘열국의 어머니’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은 언어 곧 말로 표현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그 이름대로 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마음에만 갖고 있으면 안 됩니다. 믿음은 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 말대로, 그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위대한 언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닙니다. 삶의 전 영역의 문제를 구하십시오. 주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 7:7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받을 것이고 찾아낼 것이고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 성도들에게는 특별한 은혜가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 14:4을 통해서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특권입니다. 또 요 15:16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3~24절에서 또 다시 약속하시기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게 되면 그날부터 이제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대로 우리들에게 들어주시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 영광이 되도록 우리들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게 되고 그래서 이제 승리의 기쁨을 갖게 되면 다시 사신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유일한 상급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못했더라면 다 헛것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게 된다면 당연히 기도하는 것도 힘이 넘칠 것입니다. 당당할 것입니다. 주님이 해답이요 만능 열쇄가 되시고 주님이 제일 좋은 상급인데 너무 좋아서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최상의 대답이고 유일한 해결이고 유일한 상급입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한데 우리가 지금까지는 어땠습니까? 항상 불만스런 마음으로 그냥 한이 맺혀 가지고 서럽고 원통하고 피해 의식만 가득해서 나는 이렇게 억울한 꼴만 당하고 이렇게 그냥 불쌍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스스로 불쌍히 여기니까 그저 만날 하나님 앞에 이 한을 풀어주세요 저 한을 풀어주시오 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 기도도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항상 체험하면서 산다면 그 한이 그렇게도 안 풀리는 겁니까? 

그 억울하고 원통한 게 그렇게 안 풀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실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참으로 체험하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참으로 경험하는 그런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했기에 아직도 한이 이렇게 많고 그냥 원통한 게 이렇게 많은 거지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게 와서 나와 함께 계시다면 그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성령님이 나의 능력이 되시고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고 할 때 뭐가 그렇게 불만스럽고 한스러운 게 그렇게 많겠습니까? 

사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 봤자 잠깐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힘들게 살아가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주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중보자인 예수님만 바라고 있지 말고 너희 스스로 기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할 것도 없고 속상해할 것도 없고 원통해할 것도 없습니다. 좌절할 것도 낙망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기도하면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십니다. 공급해 주십니다. 함께 하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그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날마다 엎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고 간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넘치도록 갚아 주시는 귀한 역사가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세기의 성자 제롬이 베들레헴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롬은 기뻐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주님께 무슨 선물을 드릴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 내 것인데 네가 무슨 선물을 내게 주겠느냐?”
제롬이 말했습니다.
“이 성경을 다 번역해서 그것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에게 선물을 주겠느냐? 그러면 한 가지만 다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죄와 고통을 다 내게 다오…….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 안에 있는 무기력과 절망, 자포자기와 한숨, 우울증과 탄식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부끄럽고 추해 보여도 그것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깊은 곳”에서 만나시는 분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탄식은 인간에게 큰 힘이고, 하나님께는 큰 약점이 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탄식소리에 가장 약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탄식은 우리에게 오히려 큰 힘이 됩니다.
어머니가 가장 약한 것은 자녀들이 슬피 우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식을 살리십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약속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 앞에 엎드림으로 우리의 약점도 강점으로 바꾸어주시고 부족한 것도 넘치도록 채우실 뿐 아니라 슬픔도 변하여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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